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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말씀 묵상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 - 그것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었다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5. 16.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 된 이름들이 있더라.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이상히 여겨 짐승을 따르고,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가로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뇨 누가 능히 이로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 또 짐승이 큰말과 참람 된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 두달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하더라.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요한계시록 12:17,13:1~8)

사람들은 오랫동안 '
짐승'의 얼굴을 찾으려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13장을 펼칠 때마다 누군가는 손가락을 들어 특정한 인물을 가리켰습니다. 어떤 이는 네로라 했고, 어떤 이는 히틀러라 했으며, 어떤 이는 아직 등장하지 않은 미래의 독재자라고 했습니다. 이마나 손목에 새겨질 바코드나 전자 칩을 상상하며 두려움에 떨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두려워해야 할 것은 따로 있었고, 짐승은 훨씬 더 오래전부터, 훨씬 더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

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할 때, 그는 전혀 새로운 이야기를 쓰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니엘서 7장을 펼쳐 들었습니다. 바벨론 왕 벨사살 원년, 다니엘이 꾼 꿈 속에서 바다로부터 네 짐승이 차례로 올라왔습니다. 사자 같은 것, 곰 같은 것, 표범 같은 것, 그리고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무시무시한 네 번째 짐승, 다니엘서는 그 짐승들의 정체를 '
세상에 일어날 네 왕, 네 나라'라고 스스로 밝힙니다. 이스라엘을 차례로 짓밟았던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로마였습니다.

요한은 그 네 짐승을 하나로 합쳤습니다. 표범의 몸에 곰의 발, 사자의 입을 가진 한 짐승, 이것은 암호가 아닙니다. 선언입니다. 그 네 제국이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실은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는 선언입니다. 하나의 주인, 하나의 출처, 하나의 사탄으로부터 권세를 받은 세력들의 총칭이라는 것입니다.

다니엘서에는 이 이야기의 또 다른 버전이 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꾼 신상의 꿈입니다. 왕은 꿈속에서 거대한 형상을 보았습니다. 머리는 순금이요, 가슴과 팔은 은이요, 배와 허벅지는 놋이요, 다리는 철이었습니다. 눈부신 형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돌'이 나타나 그 신상의 발을 치매 온 형상이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바람에 날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자리에, 그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 찼습니다.

다니엘은 이 꿈을 금 머리는 바벨론이요, 은 가슴은 페르시아요, 놋 배는 헬라요, 철 다리는 로마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이 정말 말하고 싶었던 것은 각각의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그 신상 전체였습니다. 한 몸으로 서 있는 그 거대한 형상이 바로 사탄의 대리 세력이 이 역사 속에서 취하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박살 내는 것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어떤 힘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돌.' 요한은 이 표현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 돌이 어디서 굴러왔는지도 기억했습니다. 모리아 산,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드리러 올랐던 그 산, 훗날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진 그 시온 산, 바로 그 산에서 뜨인 돌인 예수 그리스도가 이 신상을 부숩니다.

그렇다면 세상을 이기는 그 돌은 어떤 모습입니까? 이사야 53장이 대답합니다. "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이것이 세상을 이기는 돌의 얼굴입니다. 강하지 않습니다. 화려하지 않습니다. 군중의 환호를 받지 않습니다. 오히려 멸시받고, 고난받고, 버림받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연약함이 철과 놋과 금으로 이루어진 신상을 산산조각 냅니다.

여기서 우리는 짐승의 전략을 정확히 읽어야 합니다. 짐승은 언제나 이렇게 말합니다. "
힘을 가져라. 세상적인 성공이 곧 하나님의 축복이다. 예수의 이름으로 네가 원하는 것을 쟁취해라." 겉으로는 신앙처럼 들리지만, 그것은 바벨탑입니다. 하늘에 오르려는 인간의 오래된 욕망에 종교의 옷을 입힌 것입니다.

라디오에서 설교자가 청중에게 "
기도하면 됩니다, 기도하면 됩니다"를 반복시키며 응원을 유도하는 것도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격도 체온도 없는 깡통 로봇의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 것, 그것이야말로 짐승의 논리입니다.

요한은 한 가지 흥미로운 장치를 사용합니다. 계시록 5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런데 13장에서 짐승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짐승을 따릅니다. 표현이 너무나 닮았습니다. 의도적입니다. 마귀는 언제나 하나님을 패러디합니다.

신학자들은 이것을 '
기독론적 풍자'라고 부릅니다. 마귀는 창조하지 못합니다. 새로운 것을 만들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이 하신 것을 비틀고 흉내 낼 뿐입니다. 용이 짐승에게 능력과 보좌와 권세를 주는 것도, 성부 하나님이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권세와 보좌를 허락하신 것의 열등한 복사판입니다.

1세기 로마제국의 성도들은 이 구절을 읽으며 즉각 네로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당시 로마에는 이런 소문이 퍼져 있었습니다. 암살된 네로가 실은 죽지 않고 파르티아로 건너갔으며, 그 무시무시한 기마 군대를 이끌고 돌아올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른바 '
네로 재래설'이었습니다. 요한은 그 시대의 공포를 차용하면서 말합니다. "그렇다, 지금 너희를 짓밟는 네로가 바로 그 짐승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짐승은 계속 이어진다."

네로 다음에 히틀러가 왔고, 히틀러 다음에 스탈린이 왔고, 스탈린 다음에 김일성이 왔습니다. 그리고 총칼을 들지 않은 짐승들도 왔습니다. 물질주의, 과학 만능주의, 자연주의, 뉴에이지, 짐승은 총구를 겨누기도 하지만, 때로는 번쩍이는 광고판으로, 때로는 시대의 유행으로, 때로는 상식처럼 들리는 철학으로 옵니다.

1848년 1월,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 인근의 한 물방앗간에서 목수 제임스 마샬이 수로를 수리하다 반짝이는 것을 발견했다. 사금이었습니다. 소문은 불길처럼 번졌습니다. 전보도 전화도 없던 시절에, 단 석 달 만에 미국 전역에 '
서부에 금이 난다'는 소식이 퍼졌습니다. 이듬해인 1849년, 노다지를 꿈꾸는 사람들이 물밀 듯 서쪽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역사는 그들을 '49ers' (1849년 금광 붐의 개척자들, 또는 골드러시 개척자들)이라 불렀습니다.

세수대야 하나, 곡괭이 하나를 들고 가족을 뒤로한 채 서부로 향했던 그 사람들입니다. 1849년 캘리포니아 인구는 15,000명이었는데, 불과 2년 만에 20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그 폭발적인 성장 덕분에 캘리포니아는 단 2년 만에 미국의 정식 주로 승격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황금의 땅은 동시에 전 미국에서 살인, 강도, 마약 중독자가 가장 많은 곳이 되었습니다. 서부 영화에 등장하는 무법자들이 실은 모두 그 꿈을 좇아 모여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금을 구경조차 하지 못한 채, 낯선 땅에서 고향을 그리며 쓸쓸히 생을 마쳤습니다. 당시 그들이 즐겨 부른 노래가 '
오! 수재너'였습니다. "멀고 먼 알라바마, 나의 고향은 그곳." 금을 찾으러 왔다가 고향만 잃은 사람들의 노래였습니다. 짐승은 바로 이런 방식으로 일합니다. '저기 가면 금이 있다.' 그 말 한마디로 수십만 명을 움직입니다. 정작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는 말하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그리스 신화의 마이다스 왕 이야기는 더 직접적입니다. 황금을 사랑했던 마이다스는 신 디오니소스에게 자신이 손으로 만지는 모든 것이 금으로 변하게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소원이 이루어졌습니다. 처음에는 황홀했습니다. 나뭇가지를 만지면 금가지가 되고, 돌을 만지면 금덩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공포가 밀려왔습니다. 빵을 들자 금이 되었습니다. 포도주를 마시려 하자 금으로 굳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딸이 아버지를 안으러 달려오는 순간, 딸마저 차가운 황금 조각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마이다스는 무릎을 꿇고 이 능력을 거두어 달라고 빌었습니다. 세상의 힘과 부를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의 끝이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성공을 위해 모든 것을 수단으로 삼다 보면, 어느 순간 밥상 앞에 함께 앉을 사람이 없습니다. 가족도 동료도 모두 내 목적을 위한 도구가 되어 있고, 정작 내가 원했던 것을 손에 넣었을 때 그것을 함께 기뻐할 사람이 곁에 없습니다.

13장 5절은 짐승이 "
마흔 두 달" 동안 권세를 받는다고 말합니다. 이 기간 동안 짐승은 성도들과 싸워 이깁니다. 핍박합니다. 짓밟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순교합니다. 앞 장에서는 성도들이 왕 노릇 한다고 했는데 이 장에서는 진다고 하니, 모순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계시록이 일관되게 말하는 역설입니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입니다. 뜨인 돌이 신상을 부수는 것처럼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깁니다.

그리고 '
마흔 두 달'은 끝이 있다는 선언입니다. 무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경계를 정해 두셨습니다. 욥기를 보십시오. 사탄이 욥을 고소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십니다. 욥은 영문도 모른 채 모든 것을 잃습니다. 그러나 이야기의 끝에서 욥이 정금처럼 나올 때, 사탄은 조용히 퇴장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과 사탄과 욥이 함께 등장했지만, 마지막에는 하나님과 욥만 남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도구였을 뿐입니다. 불쌍하리만치 초라한 존재였습니다.

우리를 향한 짐승의 핍박도 그러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기간 안에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목적을 위해 작동하는 도구입니다. 그 도구가 아무리 무시무시하게 보여도, 기한이 차면 조용히 사라집니다.

계시록 21장은 새 예루살렘을 묘사합니다. 그 성벽은 각색 보석으로 빛납니다. 벽옥, 남보석, 옥수, 에메랄드, 홍마노, 홍보석, 황옥, 녹옥, 담황옥, 비취옥, 청옥, 자수정. 열두 보석이 성벽의 기초를 이루며 찬란하게 빛납니다. 그 보석은 바로 성도들입니다. 당신입니다. 짐승은 당신에게 이 땅의 보석을 창고에 쌓으라고 말합니다. 재산을 쌓고, 명예를 쌓고, 권력을 쌓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창고를 채워야 할 존재가 아니라, 당신 자신이 이미 보석입니다. 해야 할 일은 창고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그 보석을 닦는 것입니다. 보석은 어떻게 닦입니까? 연마는 언제나 마찰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고난을 통해, 인내를 통해, 섬김을 통해, 겸손을 통해, 이사야 53장의 뜨인 돌이 그렇게 다듬어졌듯이 말입니다.

어느 선배 목사가 후배 목사에게 충고를 건넨 적이 있었습니다. "
승마를 잘 하는 방법이 뭔지 아나? 말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면 말이 움직이는 대로 몸을 맞춰줘야 해. 그래야 오래오래 안전하게 갈 수 있어." 세상의 흐름에 조금씩 맞춰 가면, 덜 부러진다는 것이었습니다. 대세에 타협하며 오래 살아남으라는 충고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말의 리듬에 몸을 맞추는 것은 기수가 말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 기수를 통제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흐름에 몸을 맞추다 보면, 어느 순간 우리가 세상을 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실려 가게 됩니다. 진정한 신앙은 불편합니다. 이 땅에서 돈이 있어도 으스댈 수 없고, 힘이 있어도 함부로 쓸 수 없고, 많이 알아도 교만할 수 없습니다. 어찌 보면 그보다 힘든 삶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불편함이 보석을 닦는 마찰인 것입니다.

짐승은 때로는 로마 황제의 얼굴로, 때로는 골드러시의 함성으로, 때로는 번지르르한 자기계발의 언어로, 때로는 "
기도하면 다 된다"는 달콤한 말로, 언제나 우리 곁에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의 공통점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말고 세상의 힘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짐승들이 아무리 강하게 신상을 이루고 서 있어도, 결국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돌 하나에 부서진다는 것을 역사는 증명합니다. 연한 순 같고, 고운 모양도 없고, 멸시받은 그 돌이 온 세상을 가득 채우는 태산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그 돌의 모양을 닮아 가는 사람들입니다. 힘들어도, 보잘것없어 보여도, 세상 눈에 지는 삶처럼 보여도, 그게 이기는 삶입니다. 바다에서 올라온 그 짐승에게, 절대 지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