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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말씀 묵상

예수를 낳은 교회, 예수를 낳을 교회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4. 29.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아래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 두 별의 면류관을 썼더라.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써 부르짖더라.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면류관이 있는데, 그 꼬리가 하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일천 이백 육십일 동안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요한계시록 12:1~6)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별들이 보입니다. 그 별들은 수천 년 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바라보는 별빛은 사실 수천 광년 전에 출발한 빛입니다. 별은 이미 그 빛을 쏘아 보냈고, 우리는 지금에야 그것을 받아보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출발한 일이 땅에서 완성되는 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요한계시록 12장은 정확히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1절에서 요한은 이렇게 씁니다.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요한이 기록하는 이 이야기는 하늘에서 이미 완성된 사건입니다. 하늘에서 다 이루어진 일은 반드시 이 땅에서도 이루어집니다. 별빛이 반드시 땅에 닿듯이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는 이 본문은 단 두 절 안에 성경 전체의 복음을 압축해 놓았습니다. 해를 입은 여인, 그 여인이 낳은 아이, 그리고 그 아이를 삼키려는 용, 이 세 존재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 전체가 펼쳐집니다.

그 여인은 해를 입고 있습니다. 발 아래는 달이 있고, 머리에는 열두 별로 만든 면류관을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은 아이를 배어 해산하려는 참입니다. 아파서 부르짖습니다. 이 여인이 낳은 아이는 5절에서 정체가 밝혀집니다.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 이것은 시편 2편에서 예고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낳은 이 여인은 누구입니까?

성경에서 해·달·별은 특정한 의미를 가지고 반복됩니다. 시편 89편에서 하나님은 다윗의 위(位)가 해처럼, 달처럼 영원히 빛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시편 8편에서는 만물을 발 아래 두고 다스리는 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노래합니다. 그러므로 해를 입고 달을 발 아래 두고 별을 쓴 이 여인은, 그리스도의 천상적 영광을 함께 소유한 존재입니다.

예수가 예수를 낳을 수는 없습니다. 그 영광을 함께 입은 여인, 그것은 교회입니다. 영적 이스라엘,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그 여인의 면류관은 12지파와 12사도를 상징하는 열두 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해산하는 여인의 이야기는 사실 창세기 3장에서 시작됩니다. 선악과 사건 직후, 뱀과 여자가 한 편이 되어 하나님을 대적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창 3:15) 우리가 원시복음이라 부르는 이 말씀은, 하나의 약속입니다. 뱀과 한 편이 되어버린 여자를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 여자를 다시 자기 편으로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가능한 것은 오직 하나, 그 여자가 낳을 후손 때문입니다. 그 후손이 뱀의 머리를 밟을 것입니다.

이 약속은 한 세대로 끝나지 않습니다. 수백 년이 흘러 요셉이 꿈을 꿉니다.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오늘 본문과 똑같은 언어입니다. 그 꿈은 야곱의 유언으로 이어지고, 유다 지파에서 메시아가 나올 것이라는 예언이 됩니다. 다시 수백 년이 흘러 다윗에게 약속이 주어집니다. "너의 후손의 나라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그리고 미가 선지자는 이렇게 외칩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태초에니라." 창세기 3장에서 약속하신 그 아이가, 마침내 계시록 12장에서 태어납니다. 수천 년의 해산이 끝난 것입니다.

이 과정이 얼마나 긴 기다림인지, 한 가지 비유를 생각해 보십시오. 씨앗 하나가 땅에 떨어집니다. 겨우내 그 씨앗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차가운 흙 속에 있습니다. 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고, 아무도 그 씨앗을 기억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봄이 오면 씨앗은 반드시 싹을 틔웁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씨앗과 같습니다. 창세기에 떨어진 그 씨앗이 수천 년의 땅속 시간을 지나 마침내 베들레헴에서 싹을 틔운 것입니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여인이 아이를 낳은 것입니다. 아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필요에 의해 예수가 오셨다는 것입니다. 마치 이런 것입니다. 깊은 산중에 홀로 쓰러진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혼자 힘으로는 절대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의 절박한 필요가 구조대를 부릅니다. 구조대는 그 필요에 응답하여 산을 오릅니다. 쓰러진 사람이 없었다면 구조대는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것을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요 16:21) 십자가를 앞두고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그 근심하는 열두 제자가 바로 해산하는 여인입니다. 교회를 상징하는 이들입니다. 그 여인이 낳는 아이가 바로 주님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십자가와 부활을 교회가 낳는 아이로 표현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살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주변에는 이상하게도 한 이름만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요 19:25) 거기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서가 기록하는 이름은 오직 하나입니다. '마리아.' 왜 그렇습니까? 헬라어 '마리아'는 히브리어 '메리'에서 온 말입니다. 뜻은 '쓰다', 혹은 '패역하다'입니다. 에스겔 2장 7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가리켜 "심히 패역한 자"라고 하시는데, 거기 쓰인 단어가 바로 '메리'입니다.

이 이름이 사람에게 처음 붙여진 것은 룻기에서입니다. 남편과 두 아들을 모두 잃고 모압 땅에서 빈손으로 돌아온 나오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나오미, 즉 '은혜로운 자'라는 이름을 버리고 스스로를 '마라', 쓴 인생의 소유자라고 부른 것입니다. 모든 가능성이 사라지고, 후사도 끊기고, 기댈 곳도 없는 여인이 마라입니다.

출애굽기 15장에도 '
마라'가 등장합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사흘을 걸어 도착한 곳의 물이 써서 마실 수 없었습니다. 목이 말라 죽게 된 그 자리가 '마라'였습니다. 절체절명의 순간,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뭇가지를 꺾어 그 쓴 물에 던지게 하십니다. 그러자 쓴 물이 단물로 변합니다. 이제 보이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주변에 왜 '마리아'만 등장하는지를 말입니다.

십자가는 나뭇가지입니다. 그 십자가 나무 곁에 수많은 마라들이 있습니다. 쓰디쓴 인생의 소유자들, 패역하고 소망 없는 자들, 목마르고 지쳐 쓰러져 가는 자들입니다. 그 쓴 물 속에 십자가라는 나뭇가지가 던져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쓴 물이 단물로 변합니다. 그 결과를 보십시오. 절망에 잠겨 무덤을 찾아온 마리아들이 부활의 소식을 듣고 어떻게 됩니까?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나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음질할새."(마 28:8) 쓴 인생이 단 인생이 된 사람은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달립니다. 그 기쁨을 나누지 않고는 견딜 수 없습니다. 나오미가 마라에서 나오미로 돌아온 것처럼, 마라의 쓴 물이 단물이 된 것처럼, 슬픔의 마리아들이 기쁨의 마리아들이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사건입니다.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니라."(사 54:1) 불가능해 보이는 자리에서 가장 풍성한 열매가 납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 마리아들입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신 당신에게 묻고 싶습니다. 혹시 지금 '
마라'의 시간을 보내고 계십니까? 소망이 사라진 것 같은 자리, 오랫동안 기다렸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것 같은 자리, 모든 것이 쓰고 차갑게 느껴지는 자리, 그 자리가 바로 마리아들이 서 있던 자리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가 바로 십자가 나뭇가지가 던져진 자리입니다.

당신이 겪고 있는 그 고통이 의미 없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씨앗처럼 땅속에 묻혀 있는 것 같아도, 해산의 고통처럼 끝이 없어 보여도,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갈렙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발을 디딘 갈렙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네가 밟는 땅을 너에게 주리라." 그런데 그 약속이 이루어진 것은 45년 후였습니다. 45년 동안 갈렙의 눈에는 그 약속이 이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믿었습니다. 그리고 여든다섯의 노구에 칼을 뽑아 헤브론으로 쳐들어가며 외쳤습니다.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필경 내가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그들은 나의 밥입니다." 그 날은 반드시 옵니다.

요한계시록 12장의 여인은 단지 역사 속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여인은 지금 이 시대의 교회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지금도 해산하는 여인처럼 신음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압제 아래, 유혹과 박해 사이에서, 때로는 내부의 갈등과 연약함 속에서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산고는 재림의 예수 그리스도를 낳기 위한 산고입니다. 하늘에서 이미 완성된 그 이야기는 반드시 이 땅에서도 완성됩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2, 6) 쓴 물이었던 우리에게 십자가 나뭇가지가 던져졌습니다. 우리는 슬픔의 마리아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기쁨의 마리아들이 되었습니다. 그분이 오셨고, 그분이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날까지 힘을 내십시오. 기죽지 마십시오. 이제 곧 영원한 당신의 세상이 펼쳐질 것입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이사야 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