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면류관이 있는데, 그 꼬리가 하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일 천 이 백 육십일 동안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요한계시록 12:3~6)
어느 날 한 아이가 왕궁에서 태어났습니다. 온 나라가 그 탄생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왕궁 밖에서는 거대한 그림자 하나가 성문 앞을 서성이고 있었습니다. 그 그림자는 이 아이가 살아서 자라면 자신의 시대가 끝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온 힘을 다해 막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태어났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지금 그 아이는 보좌에 앉아 온 세상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이 그리는 장면입니다.
붉은 용이 등장합니다. 머리 일곱, 뿔 열, 면류관 일곱, 요한계시록은 그 정체를 9절에서 직접 밝힙니다.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자." 붉은 색은 성경에서 언제나 죄를 상징합니다. 그러니 붉은 용은 죄의 원흉, 사단 마귀입니다. 요한이 굳이 '옛 뱀'이라는 표현을 쓴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단순히 사단이라 불러도 될 것을, 그는 우리들을 창세기의 그 장면으로 데려갑니다. 에덴동산에서 하와에게 속삭이던 그 뱀, 아담과 하와를 미혹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게 했던 바로 그 존재를 요한은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를 괴롭히는 자는 어제오늘 생겨난 자가 아닙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단 하나의 이야기가 있는데, 그 이야기의 처음부터 이 존재가 있었던 것입니다.
일곱 머리는 교회를 핍박하는 세상 권세를 상징합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일곱 산'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즉시 로마를 떠올렸습니다. 고대 로마는 일곱 산 위에 세워진 도시였고, '칠산절'이라는 축제를 해마다 열었기 때문입니다. 로마는 그리스도인들을 가장 잔인하게 핍박하던 나라였습니다. 열 뿔은 그 권세의 엄청난 크기를 보여줍니다. 하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 땅에 던진다는 표현은 그 세력이 얼마나 거대한지를 한 번 더 강조합니다.
붉은 용은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삼키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장면은 그러나 단지 베들레헴의 밤 하나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사단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 아이가 오는 것을 막으려 온갖 방법을 써왔습니다. 가인을 부추겨 아벨을 죽였습니다. 아벨의 혈통을 끊으면 약속이 무너질 것이라고 계산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셋을 주셨습니다.
애굽의 바로를 움직여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빼앗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막으셨습니다. 바로로 하여금 히브리 남자아이들을 전부 죽이게 했습니다. 그러나 산파들이 목숨을 걸었습니다. 하만을 통해 페르시아 전역의 유대인을 학살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에스더가 일어섰습니다.
헤롯으로 하여금 아기 예수를 죽이게 했습니다. 그러나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매번 실패했습니다.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단 한 치도 어긋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죽으셨고, 부활하셨고, 승천하셨습니다. 지금 그분은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아 철장으로 온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철장으로 세상을 다스리신다는데, 왜 우리의 삶은 이렇게 고단합니까? 왜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 더 잘 되는 것처럼 보입니까? 왜 이 땅에서의 성도의 삶은 승리보다 고난 쪽에 더 가까운 것처럼 느껴집니까? 그 대답이 하나의 단어 안에 들어 있습니다. '아이'입니다.
요한계시록 본문에서 이 아이를 가리키는 헬라어는 '테크논', 즉 '아주 어린 아이'입니다.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리는 분을 성경은 왜 지금도 '아이'라고, '어린 양'이라고 부르는 것입니까? 아이는 자기 힘으로 살지 않습니다. 아이는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존합니다. 아이는 자신을 증명하려 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그냥 아버지가 이끄는 대로 따라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그분이 이 땅에서 그렇게 사셨다는 뜻입니다.
자신을 과시하지 않으셨습니다. 군림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낮은 자리에서 섬기며, 자신을 내어주며 사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보좌에 오르신 뒤에도, 그분의 다스리심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겸손의 다스림, 섬기는 다스림, 순종의 다스림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아이'입니다.
이청준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에는 소록도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센병 환자들이 모여 사는 소록도, 그 섬에 부임하는 병원장들은 하나같이 같은 약속을 했습니다. 소록도를 지상천국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환자들을 그 낙원 건설에 동원했습니다. 환자들은 죽도록 일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환자들의 꿈은 무엇이었습니까? 소록도를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그 섬 밖 육지에서 평범한 시민으로 살아보는 것이었습니다. 낙원을 만들어 주겠다는 병원장의 말은 그들에게 이렇게 들렸습니다. 여기서 영원히 살라는 말입니다. 결국 그 낙원은 병원장 자신의 공명심과 과시욕이 만든 '병원장의 천국'이었을 뿐이었습니다. 나환자들의 천국이 아니었습니다.
소설 속 병원장은 낙원이 완성되는 날, 한 나환자에게 살해당합니다. 이것은 당신들의 천국이지, 우리의 천국이 아니라는 처절한 항변이었습니다.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우리의 힘과 비전을 동원해 이 땅에 세우려는 하나님 나라가, 어쩌면 하나님과는 무관한 우리 자신의 왕국은 아닙니까? 겉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다고 하면서, 속으로는 나의 꿈과 명예와 야망을 좇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아브라함 카이퍼는 탁월한 신학자였고 결국 네덜란드 수상까지 지냈습니다. 그의 내각 열두 각료가 모두 목사였습니다. 이보다 더 기독교적인 정부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시절 네덜란드는 전 세계 최고의 포르노 생산국이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세상은 바뀌지 않습니다.
한때 어느 노인이 마을 어귀에서 홀로 사과나무를 돌보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이가 물었습니다. "어르신, 그 나무에서 사과가 열리려면 몇 년이 걸립니까?" 노인이 답했습니다. "한 십 년쯤 걸리지요." "그럼 어르신은 그 열매를 못 보시겠네요." 노인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내가 지금 이 나무 아래 서 있는 것은, 누군가 심어준 나무 덕분이오. 나는 다음 사람을 위해 심는 것이지요." 그것이 철장으로 다스리는 방식입니다. 자신이 열매를 거두지 않아도, 다음 사람을 위해 심는 것입니다. 자신이 인정받지 않아도,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것입니다. 군림하지 않고, 내어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는 성전 문 앞 앉은뱅이에게 말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베드로의 손에 쥐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세상이 알아주는 힘도, 돈도, 지위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예수가 있었습니다. 그 예수를 내어주었더니, 앉은뱅이가 일어나 걸었습니다. 그리고 그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뒤에서 꽉 껴안았습니다. 헬라어 '크라티오', 너무 감사하고 기뻐서 등 뒤에서 껴안는 행동입니다.
세상의 힘으로는 사람을 일으킬 수 없습니다. 예수를 주어야 합니다. 예수의 인격으로, 예수의 자리에서, 예수의 방식으로 그 사람을 대해야 합니다. 그때 사람들은 일어섭니다. 그리고 언젠가, 등 뒤에서 꽉 껴안아 줍니다.
톨스토이의 단편 소설에 탐욕스러운 농부 파콤이 등장합니다. 어느 날 그는 기회를 얻습니다. 하루 동안 달려서 돌아온 만큼의 땅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쉬지 않고 달렸습니다. 더 많은 땅을 얻으려고, 더 멀리, 더 빠르게 달렸습니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리니 해가 기울고 있었습니다. 돌아가야 했습니다. 죽을힘을 다해 달렸습니다. 출발점에 도착하는 순간, 그는 쓰러져 죽었습니다. 그가 죽도록 달려서 얻은 땅은 자기 무덤 반 평이었습니다.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세스쿠는 김일성의 주석궁을 보고 질투가 생겼습니다. 돌아가 그보다 더 큰 궁전을 지었습니다. 주변 동네를 철거하고, 아내를 위한 궁전도 하나 더 지었습니다. 24년 동안 수만 명을 학살하며 권력을 유지했습니다. 그리고 1989년, 민중 봉기로 아내와 함께 총살당했습니다. 그가 묻힌 곳은 시골 공동묘지의 길가였습니다. 사람들이 무심히 밟고 지나가는 흙 위 반 평이었습니다.
파리의 앵발리드 성당에는 나폴레옹의 관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관 안에는 시신이 없습니다. 나폴레옹은 유배지에서 죽어 20년이 지난 뒤에야 복권되어 한 줌 재로 돌아왔습니다. 그 성당의 이름 '앵발리드'는 '무효'라는 뜻입니다. 수십만 젊은이의 목숨을 세계정복의 꿈에 바쳤던 그 삶, 하나님 앞에서는 무효인 삶입니다.
왜 헤밍웨이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까? 왜 마이클 잭슨은 "나는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이라고 했습니까? 세상이 부러워하는 것들을 다 가졌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 주변의 사람들은 그들로 인해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전부를 말해줍니다.
6절은 말합니다.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일천이백육십 일 동안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에서 양육을 받더라." 우리의 인생은 양육 과정입니다. 이 땅은 훈련소입니다.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는 병사가 내무반에 자개장롱을 들여놓는 법은 없습니다. 명품 양복을 입고 진흙탕 구르기를 하지 않습니다. 훈련소는 훈련소답게 살면 됩니다. 나그네답게, 잠시 머무는 자답게 살면 됩니다.
그리고 훈련이 고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만한 훈련을 받을 자격이 있는 병사라는 뜻입니다. 방위병에게는 특전사 훈련을 시키지 않습니다. 싸울 만한 사람이기에 고된 훈련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지금 삶이 버겁고 눈물이 앞을 가린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인정하고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그 훈련의 내용은 하나입니다. 나를 비우는 것, 내가 눈을 두었던 것들에서 눈을 거두는 것, 나의 힘을 내려놓고 어린아이처럼 아버지의 손을 잡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아름다웠다고 마태복음 18장 3절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어린아이처럼 자기 힘으로 군림하지 않고, 아버지가 이끄시는 대로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사랑하고, 용서하고, 참아주고, 낮은 자리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게 천국 시민의 삶입니다.
천국은 내가 원하는 것이 다 이루어지는 곳이 아닙니다. 내가 나를 내어줌으로써 다른 사람이 행복해지는 곳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사는 곳이 천국입니다. 예수님은 지상에서 그 천국의 삶을 몸소 보여주고 가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 연습을 하는 중입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됩니다. 힘에 부쳐도 됩니다. 안 된다 싶을 때, 처절하게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뒤로 숨으면 됩니다. 그때 내 안에 계신 예수가 나를 살아내십니다.
어린아이처럼, 조용히, 겸손하게, 그러나 열심히, 그렇게 살다가 주님 앞에 서는 날, 이렇게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참 아름다웠다고 말씀드려야지요." 철장을 쥔 손은 어린아이의 손이었습니다. 그 손이 세상을 다스리는 방식은, 내려놓음이었고, 섬김이었고,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어린아이는 우리에게도 같은 손을 내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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