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주하는 자들 곧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그가 큰 음성으로 이르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에게 그의 음행으로 말미암아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 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이르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요한계시록 14:6~13)
어느 해 늦가을, 한 노인이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의 자녀들은 그 곁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죽어가는 당사자는 조용히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자녀 중 하나가 물었습니다. "아버지, 무섭지 않으세요?" 노인은 천천히 눈을 뜨며 말했습니다. "무섭긴 왜 무서워. 나는 지금 집에 가는 거야." 그 노인은 평생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넉넉한 것 하나 없이 살았지만, 새벽마다 무릎을 꿇었고, 이웃을 섬겼고, 주어진 하루를 감사로 살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 그의 삶은 초라해 보였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마지막 순간, 그는 누구보다 당당하고 평안했습니다. 그 노인이 알고 있었던 것이 오늘 요한계시록 14장이 우리에게 말하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4장 6절에 복음을 가진 천사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 천사가 전하는 복음의 내용이 뜻밖입니다. '심판'입니다. 심판이 어떻게 복음, 곧 기쁜 소식이 될 수 있을까요? 영화관을 생각해 보십시오. 똑같은 영화를 보면서 어떤 사람은 눈물을 흘리고 어떤 사람은 박수를 칩니다. 결말을 알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이 마침내 승리하는 장면에서 그 여정을 함께한 사람은 환호하지만, 중간부터 들어온 사람은 무슨 영문인지 모릅니다. 심판의 날도 그렇습니다. 이 땅의 삶이 전부라고 믿는 사람에게 그날은 공포와 절망입니다. 그러나 이 땅 너머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는 사람에게 그날은 오랫동안 기다리던 완성의 날, 잔치 날입니다. 그래서 천사는 말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심판의 날이 복음이 되기 위한 조건은 오직 하나입니다. 오늘을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사는 것입니다.
AD 79년, 이탈리아 남부의 폼페이는 번성하는 로마의 도시였습니다. 그날도 사람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목욕탕에서 몸을 씻고, 시장에서 흥정하고, 아이들은 골목에서 뛰어놀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했습니다. 3미터 높이의 화산재가 도시를 덮었고, 모든 것이 그 순간 그대로 멈췄습니다. 1700여 년이 지나 발굴된 시신들은 하나같이 죽음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표정 그대로였습니다. 밥을 짓던 아주머니, 아이를 낳던 산모, 놀이터의 아이들, 아무도 그날이 마지막인 줄 몰랐습니다.
예수님은 종말은 노아의 때처럼, 소돔의 때처럼 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고된 종말은 없습니다. 세계대전의 선포도, 하늘의 경보음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장가가고 시집가고 밭을 갈다가 갑자기 그날이 임합니다. 몇 해 전, 어떤 지인이 헬스클럽에서 운동을 하다가 화장실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보내던 분이었습니다. 죽음은 그렇게 아무런 예고 없이 옵니다. 그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렇기에 천사의 선언은 오늘 이 순간 우리를 향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라. 그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 죽음은 두려움이 아니라 귀향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이런 의문을 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제 욕심대로 사는 사람들이 왜 저렇게 잘 될까? 반면 하나님을 믿고 바르게 살려는 우리는 왜 이렇게 힘들까? 시편 73편의 시편 기자도 똑같은 질문 앞에서 비틀거렸습니다. "악인들은 죽을 때도 고통이 없고 사업도 번창하는데,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고 아침마다 징책을 받는구나."
그러나 요한계시록과 로마서는 놀라운 반전을 보여줍니다. 세상 사람들은 지금 이미 심판을 받고 있다고 말입니다. 로마서 1장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을 거부한 자들에게 하나님이 내리신 심판이 무엇입니까? 유황불이 먼저가 아닙니다. "그들을 내버려두셨다"는 것입니다. 욕정대로, 부끄러운 정욕대로, 타락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셨습니다. 이것이 저주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충격적인 진실과 마주합니다.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며 사는 것이 축복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사실은 하나님의 저주라는 것입니다. 원하는 것을 다 이루고, 욕망을 다 채워도 왜 만족이 없습니까? 왜 세상에 우울증은 더 늘어나고, 자살률은 올라가고, 중독자들은 갈수록 많아집니까? 죄는 인간을 파괴하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는 채울수록 더 크게 비워놓습니다. 계시록 14장 11절이 말합니다. "짐승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이것은 미래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원어는 현재 진행형입니다. 지금 이 순간,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은 밤낮 쉬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을 풍요로운 애굽에서 끌어내어 척박한 가나안으로 이끄셨을까요? 애굽은 나일 강 삼각주의 기름진 땅이었습니다. 물을 부으면 곡식이 쏟아지는 곳이었습니다. 반면 가나안은 하늘에서 비가 내려야만 농사가 되는 천수답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차이가 핵심입니다. 물만 부으면 곡식이 나오는 곳에서는 사람이 절대 쉬지 못합니다. 밤에 자다가도 옆집 불빛이 보이면 벌떡 일어나야 합니다. 저 사람이 나보다 한 바가지 더 붓기 전에 나가야 합니다. 인간의 욕심은 같은 환경에서 옆 사람이 나보다 더 갖는 것을 결코 견디지 못합니다. 그것이 지옥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말입니다.
그러나 하늘만 바라봐야 하는 가나안에서는 씨를 뿌리고 나서 마음 편히 잠들 수 있습니다. 어차피 하나님이 비를 주셔야 농사가 됩니다. 내가 더 애쓴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옆집을 시기할 이유도, 밤을 지새울 이유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면 먹고, 하나님이 거두시면 감사합니다. 그것이 쉼입니다. 참된 안식은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에서 옵니다.
그렇다면 왜 성도의 삶은 세상 눈에 고단해 보일까요? 히브리서 12장은 그것을 '파이데이아', 곧 '자식 만들기'라고 부릅니다. 우리말 성경은 이것을 '징계'라고 번역했지만, 원뜻은 훈육, 양육, 자녀 교육입니다. 영국의 이튼스쿨, 미국의 필립스 엑서터 아카데미 같은 세계 명문 사립학교들의 공통점은 혹독한 훈련입니다. 졸업생들이 그 학교를 회고할 때 종종 '지옥 같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왜 부모들은 거금을 들여 자녀를 그 학교에 보내려 합니까? 그 과정을 통과한 사람이 다른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이 땅에서의 삶이 바로 그 훈련 과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만드시기 위해 우리가 원하는 것을 때로 막으시고, 하기 싫어도 해야 할 일을 허락하십니다.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는 과정은 결코 편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힘들어 보이는 것입니다.
호세아 2장 6절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가시나무로 그의 길을 막고 담을 둘러쳐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겠다." 우리가 헛된 것을 도모할 때 하나님은 막으십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방치가 저주라면, 간섭은 은혜입니다. 그렇게 모든 훈련 과정을 마치는 날, 하나님은 성도의 죽음을 귀하게 보십니다(시 116:15). 명문학교 졸업식이 성대한 축제인 것처럼, 이 땅의 훈련을 마치고 죽음의 문을 통과하는 그날은 천군 천사가 환호하는 날이 됩니다. 그러니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날까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사도 바울은 다메섹에서 광주리를 타고 도망쳤습니다. 베드로는 감옥에서 풀려난 뒤 서둘러 몸을 피했습니다. 때로는 그것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왜 '죽으면 죽으리라'하고 맞서지 않느냐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압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 날까지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몸을 아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날까지는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합니다. 건강을 챙기고, 몸을 해치는 것들을 멀리하고,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의 거룩을 이루어가기 위해 건강한 몸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영혼을 파먹는 죄를 멀리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의 헛된 것들을 좇고 스스로 만든 우상을 섬기는 한, 우리도 그들처럼 밤낮 쉼을 얻지 못합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처음의 그 노인은 왜 죽음 앞에서 미소를 지을 수 있었을까요? 그는 자신이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 목적지가 아니라 과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혹독한 훈련 과정을 마치고 드디어 졸업하는 날이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계시록 14장 13절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지금 이 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주 안에서 죽는 것은 복입니다. 수고가 끝나고 드디어 쉼이 시작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삶에서 행한 모든 것들이 우리보다 먼저 하나님 앞에 가 있습니다.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고 계십니까? '이 세상에서 살 날이 하루 줄어들었구나' 하고 불안해하십니까, 아니면 '주님 만날 날이 하루 가까워졌구나' 하고 기대하고 계십니까? 그 차이가 바로 심판이 저주가 되느냐, 복음이 되느냐의 차이입니다. 성도의 인내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 믿음을 붙드는 것, 조금만 더 가면 영원한 쉼이 옵니다. 아버지의 훈련을 잘 이겨내십시오. 당신은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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