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 후로 주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요한계시록 14:12~13)
어느 해 겨울, 한 중학교 교사가 시험지를 나눠주다가 실수를 했습니다. 이름이 비슷한 두 학생의 시험지가 바뀐 것입니다. 80점짜리 시험지를 받아든 아이는 순간 머리가 하얘졌습니다. 분명히 다 맞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디서 틀렸을까? 아이는 고개를 숙이고 한참을 절망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시험지 상단의 이름을 다시 들여다보았습니다. 자기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짝꿍 것이었습니다. 아이는 그제야 선생님께 달려가 자기 시험지를 받아왔습니다. 100점이었습니다.
우리 중 많은 사람이 이와 비슷한 실수를 하며 삽니다. 남의 시험지를 들고 절망합니다. 내 것이 아닌 점수표를 보며 낙담합니다. 오늘 이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우리가 진짜 누구의 시험지를 들고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요한계시록 14장 1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이 구절을 처음 읽으면 가슴이 조금 답답해집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그 계명을 지키고 있습니까? 솔직하게 자신을 들여다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개를 가로젓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처음 만드셨을 때, 그 관계는 아름다운 질서 위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만물을 다스리는 왕권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단 하나를 금하셨습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금령의 본질은 단순합니다. 인간은 만물 위에 있는 존재이지만, 그 복을 온전히 누리려면 반드시 하나님 아래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너는 내 말을 들어야 하는 자다"라는 관계의 질서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 자리를 거부했습니다. 하나님마저 자기 아래로 밀어내고 스스로 왕이 되려 했습니다. 이것이 타락입니다. 그리고 그 타락 이후 인간에게서 하나님의 복, 히브리어로 '바라크'가 끊겼습니다. 마치 전원 코드를 뽑아버린 것처럼,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스스로 단절되어 버린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받은 성도라는 것은, 그 뽑혀 있던 코드를 다시 꽂은 사람들입니다. 자기 욕심과 야망과 계획을 내려놓고, 다시 하나님 아래로 내려와 그분의 말씀을 듣기로 결단한 사람들이 계명을 지킨다는 말의 진짜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살펴보면, 우리는 곧 벽에 부딪힙니다.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주신 십계명만 해도 그렇습니다.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이를 악물고 노력하면 외형적으로는 어느 정도 지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그 계명의 요구를 전혀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리셨습니다.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2, 28) 행동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다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스치는 분노 하나, 눈길 하나까지도 계명의 영역 안에 들어옵니다. 야고보서는 더 나아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된다"(약 2:10)고 선언합니다. 이쯤 되면 우리는 솔직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계명은 우리가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학 시절, 철학과 교수이자 교회 장로였던 친구 아버지를 종종 뵙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당시 지식인 사이에서 유행하던 자유주의 신학자 불트만의 이론을 즐겨 이야기하셨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제자들이 그 가르침을 더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 신화화한 것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의 삶을 본받아 고결한 도덕과 정신문화를 갈고닦으면 충분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듣고 나서 한 가지 질문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이 죽으셔야 했을까요? 단지 위대한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면 되는 것이라면, 굳이 십자가가 필요했을까요? 기독교는 위대한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더 나은 인간이 되는 종교가 아닙니다. 간디나 슈바이처처럼 고결하게 사는 것이 기독교의 목적이라면, 십자가는 불필요한 사건이 됩니다. 우리가 그 계명을 스스로 지켜낼 수 있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죽으실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의 십자가가 필요한 것은, 우리가 그 계명을 도저히 지켜낼 수 없는 타락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오늘 본문의 두 번째 구절이 등장합니다.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계명만 나오고 끝났다면 우리는 모두 절망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즉시 '예수 믿음'이 따라옵니다. 헬라어 '텐 피스틴 예수'는 소유격 구문입니다. '예수의 믿음', '예수가 가진 믿음', '예수를 향한 믿음'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방향이 어디를 향하든, 내용은 하나로 수렴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이 그대로 우리의 것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장에는 아주 섬세한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신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으셨습니다. 결례의 날이 되자 마리아는 아기 예수를 안고 성전에 올라가 정결 예식을 행했습니다. 이것은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작은 장면 같지만, 사실 복음의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처음 하신 일이, 율법의 요구에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탄생하시는 순간부터 율법의 모든 세세한 요구들을 하나하나 지켜 나가셨습니다. 절기마다 성전에 오르셨고, 도덕법의 요구도 완전히 이루셨습니다. 마음속에 단 한 번의 분노도, 단 한 번의 불순한 생각도 없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그 완성된 순종의 삶 전체를, 우리에게 거저 주셨습니다. 이것을 신학에서는 '전가'라고 합니다. 그분의 완전한 순종이 우리의 것으로 여겨진다는 뜻입니다. 마치 다른 사람의 백 점짜리 시험지가 내 것이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를 우리의 것으로 여겨 주십니다. 그래서 구원이 '은혜'요 '선물'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질문이 하나 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냥 막 살아도 됩니까? 춘추전국 시대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잔치 자리에서 갑자기 불이 꺼졌습니다. 그 틈을 타 한 장수가 황후의 볼에 몰래 입을 맞추고 도망쳤습니다. 황후는 그자의 갓 끈을 끊어 쥐고 황제에게 고발했습니다. 그러나 황제는 그 자리의 모든 장수에게 즉시 갓 끈을 끊어버리라 명했습니다. 범인을 찾을 수 없게 만들어, 그 장수를 조용히 살려준 것입니다.
훗날 전쟁에서 황제가 적진에 포위당했을 때, 한 장수가 홀로 적진을 뚫고 들어와 황제를 구해냈습니다. 황제가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죽을 지도 모를 사지에 홀로 들어왔느냐?" 그 장수가 대답했습니다. "그날 잔치 때 갓 끈을 뜯긴 자가 바로 저였습니다. 황제께서 너그러이 살려주셨기에, 저는 그날부터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것이 은혜를 입은 자의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강요받아서가 아닙니다. 살려주신 분에 대한 감격이 절로 그 삶을 움직인 것입니다.
복음을 진정으로 이해한 사람은 막 살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가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깊은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거룩이 어디서 오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의무감에서 나오는 거룩이 아니라, 감격에서 흘러나오는 거룩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거룩은 단순히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사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바르고 정직하게 사는데 왠지 함께 있기 불편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선함 어딘가에 자기 자랑이 배어있기 때문입니다. 남을 위하는 것 같지만 결국 자기를 드러내기 위한 선행은, 사람을 편하게 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정확하게 짚었습니다.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 10:2~3). 자기 의를 세우기 위한 열심, 이것이 기독교의 가장 위험한 적입니다. 그러나 거룩은 이것과 다릅니다. 자신이 얼마나 불가능한 존재인지를 깨닫고, 스스로 왕의 자리에서 내려와 하나님 앞에 항복하는 것,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사는 것이 진짜 행복이구나"를 뼛속으로 깨달은 자가, 그 지식을 근거로 자연스럽게 살아내는 것, 그것이 거룩입니다.
하나님은 그 항복을 얻어내시기 위해, 때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법을 쓰십니다. 왜 모세를 의욕 넘치는 40세에는 쓰지 않으시고, 다 죽어가는 80세에 부르셨을까요? 왜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을 일찍 죽게 하셨을까요? 왜 바울에게 사단의 가시를 그냥 두셨을까요?
어느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10년을 일군 교회를 부목사에게 물려주고, 어려운 개척 교회로 자진해서 떠나신 분이었습니다. 떠나시면서 이런 기도 부탁을 남기셨습니다. "혹시 제가 가서 그 교회를 부흥시켰다는 소리를 듣지 않게 기도해 주십시오. 사람들이 저를 능력 있는 종이라 부를까 두렵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결국 문을 닫았습니다. 마지막 설교에서 그분이 하신 말씀이 이것이었습니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보잘것없고 무능한 존재인지 너무나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도움 없이 저는 매 순간 실패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고백을 원하셨던 것입니다. 유능한 목사를 망하게 만드신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하나님의 자녀를 만들어 가신 것입니다.
C. S. 루이스는 59세까지 독신으로 살다가 조이라는 여성 작가를 만나 결혼했습니다. 몇 년간의 행복한 결혼 생활 끝에 아내는 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루이스는 그 슬픔을 글로 옮겼는데, 그것이 바로 『헤아려 본 슬픔』입니다.『나니아 연대기』와 『순전한 기독교』를 쓴 그 루이스가, 이 책에서는 하나님을 향해 거의 삿대질하는 수준의 말들을 쏟아냅니다. 하늘의 소망을 이야기하며 위로하는 사람들을 몰지각하다고 몰아세우기도 합니다. 처음 읽으면 당황스럽습니다.
그러나 그 책의 끝자락에서 루이스는 이런 고백을 합니다. 자신은 그때까지 가짜 돈으로 포커 게임을 하듯 신앙을 다루어 왔다고 말입니다. 믿음, 고통, 슬픔 같은 것들을 머릿속의 이미지로만 알고 있었는데, 막상 실제 고통이 닥치자 그것이 전 재산을 건 생사의 게임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가 마분지로 쌓아올린 신앙의 성을 왕창 무너뜨리셨다고, 다시 짓게 하시려고,
우리 삶에도 그런 순간들이 옵니다. 질병, 실직, 관계의 파괴, 오랫동안 기다린 기도의 응답 없음, 그 모든 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불가능함을 직면하게 만들고, 마침내 "나는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자"라는 고백에 이르게 합니다. 하나님은 그 고백을 들으시려고 우리 인생의 모든 사건과 상황을 동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서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이를 악물고 버티는 인내가 아닙니다. "나는 이미 하나님의 계명을 다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고, 반드시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고통조차 나에게 유익하다"는 믿음에서 나오는 인내입니다. 우리 삶의 점수를 매겨보면 20점도 안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시험지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시험을 치러 주셨고, 그 백 점짜리 시험지를 우리 것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이 육신의 옛 몸이 받아온 시험지를 들고 절망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이미 백 점짜리들입니다.
자주 실패할 것입니다. 자주 넘어질 것입니다. C. S. 루이스처럼 하나님께 삿대질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다시 자신의 실존 앞에 서십시오. "나는 이런 존재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 감격으로 다시 일어나십시오. 베드로후서 1장 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다 주셨습니다. 이미 다 주셨습니다. 그 은혜가 믿어지는 사람은, 막 살 수가 없습니다. 감격하고, 또 실수하고, 또 감격하고. 그렇게 열심히 가다 보면, 곧 끝이 올 것입니다. 그때까지 힘을 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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