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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말씀 묵상

유리 바다 앞에 서다 - 흔들리는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는 이유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7. 15.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요한계시록 15:1~4)

어릴 적 할머니의 반짇고리를 열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 안에는 색색의 실타래가 있었는데, 어느 날 고양이가 그것을 온통 헝클어 놓았습니다. 실은 서로 엉키고, 매듭이 지고,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는 혼돈 덩어리가 되어 있었습니다.

인간의 역사도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실이 가지런히 감겨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질서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실은 엉키기 시작했고, 지금 우리는 그 엉킨 실타래 한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놀라운 것을 말합니다. 그 실타래는 반드시, 마지막에는, 다시 가지런히 풀릴 것이라고 말입니다. 요한계시록 15장은 바로 그 마지막 순간, 실이 완전히 풀려나가기 직전의 장면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지으셨을 때, 세상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하시자 그 무질서가 질서로 바뀌었습니다. 빛과 어둠이 나뉘고, 하늘과 바다가 나뉘고, 마침내 사람이 지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보시고 하나님은 "
심히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심히 좋았다는 말은 다른 게 아닙니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 질서에는 순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위에, 그 아래 사람이, 그 아래 만물이 있었습니다. 사람은 만물을 다스리되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지어졌습니다.

이 질서가 얼마나 완벽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모든 생물의 이름을 지으라 하셨을 때, 아담은 망설임 없이 그 자리에서 이름을 지었습니다. 당신이 이름을 짓는다면,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십니까? 자녀 이름 하나 짓는 데도 몇 날 며칠을 고민합니다. 그 존재의 본질을 꿰뚫어야 이름을 붙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사자를 보면 "
사자", 독수리를 보면 "독수리"라고 즉시 이름 붙였습니다. 이것은 아담이 그만큼 만물을 온전히 파악하고 다스리는 자리에 서 있었다는 뜻입니다. 마치 능숙한 정원사가 자신의 정원에 있는 모든 나무와 꽃의 이름과 특성을 훤히 꿰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 정원사에게 정원의 무질서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완벽한 실타래에 고양이 한 마리가 뛰어들었습니다. 마귀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마귀가 유혹한 순서입니다. 마귀는 곧바로 아담에게 가지 않았습니다. 대신 사람이 다스려야 할 짐승인 뱀이, 뱀보다 위에 있는 하와에게 다가갑니다. 그리고 하와가 자기보다 위에 있는 아담을 유혹합니다. 그렇게 아담이 자기 위에 계신 하나님을 거역합니다.

이것을 회사 조직에 빗대어 보면 이렇습니다. 말단 직원이 부서장을 부추기고, 부서장이 사장을 흔들고, 결국 사장이 회사의 근본 방침을 어기는 것과 같습니다. 아래서부터 순서가 뒤집히는 것이 바로 죄의 본질입니다. 누군가 자기 자리를 벗어나 남의 자리를 탐하고, 결국 가장 위에 계셔야 할 하나님의 자리까지 넘보는 것입니다.

그 결과 실타래는 완전히 엉켜버렸습니다. 창세기 3장 16절을 보면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그런데 여기 "사모한다"는 단어는 원어로 '테슈카', 사실은 "지배하려 한다"는 뜻입니다. 같은 단어가 창세기 4장, 가인에게 하신 말씀에도 등장합니다. "죄의 소원(테슈카)이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죄가 가인을 지배하려 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타락 이후 세상에는 끊임없는 자리다툼이 벌어집니다. 아내는 남편의 자리를 넘보고 남편은 그 자리를 지키지 못해 흔들립니다. 자연은 인간에게 순종하지 않고 가시와 엉겅퀴로 저항합니다. 마치 배의 균형이 무너져 승객들이 서로 뒤엉키며 넘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원래 각자의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할 사람들이 자리를 벗어나면서 배 전체가 휘청거리는 것이 타락한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그 백성을 다시 택하시어, 흔들리지 않는 영원한 질서 속으로 되돌려 놓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우리는 오늘, 이 시간에도 그 태초의 질서로 돌아가 살아야 합니다. 배의 승객이 다시 제자리에 앉을 때 배가 균형을 찾듯,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이 아내를 위해 자기 목숨을 걸고,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릴 때, 그 무너진 질서가 다시 세워집니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이렇게 완전히 엉켜버린 실타래를, 하나님은 어떻게 다시 풀어내실까요? 한 번에 확 풀어버리실 수도 있었을 텐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마치 인내심 많은 할머니가 엉킨 실타래를 조급해하지 않고 한 올 한 올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풀어내시듯, 하나님은 성경 전체를 통해 점진적으로 구원의 이야기를 풀어내십니다.

첫째 매듭 - 한 사람. 가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 하나님은 그 자리에 셋을 세우십니다(창4:25). 의인이 죽고 새로운 씨가 태어나는 이 사건은, 히브리서 12장 24절이 밝히듯 장차 흘리실 그리스도의 피를 예표하는 것이었습니다.

둘째 매듭 - 한 가족. 셋의 후손 노아의 시대, 방주가 저주의 홍수를 대신 맞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온 세상이 물에 잠기는 그 심판의 한복판에서, 방주라는 배 하나만이 물살 위에 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여덟 식구가 안전하게 품겨 있습니다. 심판은 임하되, 그 심판을 대신 짊어진 무언가로 인해 그 안에 있는 자들은 살아남습니다.

셋째 매듭 - 한 민족. 애굽에서 하나님은 장자를 심판하시고, 이스라엘은 모세의 인도로 홍해를 건넙니다. 장자는 그 집안 전체를 대표하는 자리였기에, 이 사건은 이제 한 가족의 구원에서 한 민족 전체의 구원으로 확장됩니다.

넷째 매듭 - 한 국가. 다윗이 골리앗의 머리를 치고 가나안 족속을 정복함으로, 이야기는 한 국가의 구원으로 넓어집니다.

마지막 매듭 - 만국. 그리고 마침내 신약에 이르러, 이 모든 상징이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해 실체로 이루어집니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한 사람, 한 가족, 한 민족, 한 국가로 조금씩 넓혀가며 설명하셨을까요? 마치 어린아이에게 큰 개념을 가르칠 때 작은 그림책부터 시작해서 점점 두꺼운 책으로 넘어가듯, 인과율에 갇힌 우리의 좁은 이해력을 배려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창세기부터 차근차근 밝혀오신 구원의 실체가, 마침내 요한계시록에서 완전히 드러납니다. 뱀의 머리가 밟히는 그 순간이 무엇인지, 심판과 구원의 전모가 가시적으로 펼쳐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에는 "
마지막 재앙"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얼핏 보면 인 재앙, 나팔 재앙, 대접 재앙이 시간 순서대로 일어나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이 셋은 사실 같은 사건을 세 개의 다른 카메라 앵글로 찍은 것과 같습니다. 다큐멘터리 감독이 하나의 전쟁을 병사의 시점, 지휘관의 시점, 그리고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으로 각각 촬영하듯, 인·나팔·대접 재앙은 같은 심판을 서로 다른 각도에서 보여줍니다.

다만 그 규모는 점점 커집니다. 인 재앙에서는 땅의 4분의 1이, 나팔 재앙에서는 3분의 1이 피해를 입지만, 대접 재앙에 이르면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그래서 이 마지막 환상 앞에 "
에스카토스", 곧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붙는 것입니다. 시간상 마지막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여주신 재앙의 환상 중 가장 마지막이자 가장 크고 완전한 환상이라는 뜻입니다.

2절에는 놀라운 장면이 등장합니다. "
불이 섞인 유리 바다." 이 유리 바다는 이미 4장에서 다룬 적이 있는, 하나님 보좌 앞의 수정처럼 맑은 바다입니다. 짐승이 올라오던 저 혼돈의 바다와 정반대로,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완전히 재창조된 새 하늘의 바다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 유리 바다에 불이 섞여 있습니다. 이는 곧 심판이 땅으로 쏟아지기 직전임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바닷가에, 짐승과 그 우상과 그 이름의 수(666)를 이긴 성도들이 서서 찬양하고 있습니다.

여기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 심판의 대접은 아직 쏟아지지 않았지만, 성도들은 이미 유리 바닷가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태풍이 몰아치는 바다 한복판에 거대한 여객선이 떠 있는데, 그 배 안의 특등실만은 완벽한 방음과 방진 장치로 흔들림 없이 고요한 것과 같습니다. 배 밖에서는 파도가 몰아쳐도, 그 방 안에 있는 사람은 이미 안전합니다. 성도는 이 세상의 전쟁과 기근과 질병이라는 대접 재앙에 세상 사람들과 함께 노출되어도, 그 신분만은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환난이야말로 성도를 유리 바닷가의 완성된 백성으로 빚어가는 필연적인 과정입니다.

성도들은 "
짐승의 이름의 수를 이긴 자들"이라 불립니다. 계시록 13장에 나오는 그 666 말입니다. 그런데 이 숫자를 두고 세상에는 온갖 억측이 난무합니다. 바코드다, 전자 칩이다, 특정 인물의 이름이다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여기서 간단한 시험을 하나 해봅시다. 그 억측을 오늘 본문에 그대로 대입해 보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백성은 바코드를 이긴 자들이다." 이게 말이 됩니까? "하나님의 자녀는 전자 신분증을 이긴 자들이다." 역시 어색합니다. 666은 삼위 하나님을 흉내 내며 대적하는 악한 세력 전체를 가리키는 상징적 숫자입니다. 그 세력을 이긴 자, 그것이 곧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3~4절에서 성도들이 부르는 노래는 출애굽기 15장, 홍해를 건넌 뒤 이스라엘 백성이 불렀던 그 노래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이를 "
모세의 노래"이자 동시에 "어린양의 노래"라고 부릅니다.
"
모세의 노래"에서 모세는 노래를 부르는 주체입니다. 반면 "어린양의 노래"에서 어린양은 노래의 대상, 곧 그 노래가 다루는 내용의 주인공입니다. 이 둘을 나란히 놓은 것은, 마치 오래된 흑백사진과 최근에 찍은 컬러 사진을 나란히 놓고 보니 놀랍게도 같은 장소, 같은 구도였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과 같습니다. 모세와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 구원받은 그 옛 흑백사진은,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질 구원이라는 컬러 사진을 미리 찍어둔 것이었습니다.

누가복음 9장에서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모세, 엘리야와 함께 나누신 대화의 주제도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누가는 그 대화의 내용을 예수님의 "
별세", 헬라어로 "엑소더스"라고 표현합니다. 엑소더스, 곧 출애굽입니다. 성경의 모든 사건은 결국 예수님의 엑소더스로 수렴됩니다. 그래서 유리 바닷가의 성도들이 부르는 노래는 모세의 노래이자 동시에 어린양의 노래인 것입니다.

3절에서 성도들은 하나님을 "
전능하신 이", "만국의 왕"이라 부릅니다. 뭐든지 다 하실 수 있고,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 마음에 정직한 질문 하나가 떠오릅니다. 그렇게 뭐든 다 하실 수 있는 분이라면, 왜 내 삶의 이 고통을 막아주지 않으실까요? 마치 최고의 실력을 가진 의사가 환자 곁에 있으면서도 일부러 아픈 주사를 놓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 의사가 무능해서가 아니라, 그 주사가 결국 그 환자를 살리는 치료의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이 땅에서 우리의 소원을 다 들어주시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늘 백성을 만드시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자격을 갖추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관문이 있으니, 그것이 고난입니다(빌1:29-30, 딤후2:3-4, 롬8:17-18).

왜 굳이 고난이어야 하는지, 우리는 그 전부를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다만 고백할 뿐입니다. "
하나님이 맞고 내가 틀립니다." 우리는 더 이상 이 땅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을 하도록 부름받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 시키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선교입니까, 봉사입니까, 구제입니까? 요한복음 6장은 답합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우리가 선교하고 봉사하고 구제하는 것은, 결국 내가 예수를 더 잘 믿는 사람이 되기 위한 과정입니다. 그것이 목적이지, 다른 활동들이 목적이 아닙니다.

헤밍웨이의 소설 속에는 쿠바의 늙은 어부 산티아고가 등장합니다. 한때는 팔씨름 왕이었던 그가 늙어서는 84일 동안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먼바다에서 자기 배보다도 큰 청새치를 만납니다. 나흘 밤낮을 사투 끝에 결국 그 물고기를 잡아냅니다. 배 옆에 묶고 의기양양하게 돌아오는 길, 그런데 상어 떼가 나타나 그 청새치를 조금씩 뜯어먹습니다. 결국 집에 도착했을 때 남은 것은 앙상한 뼈뿐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없는 인생의 초상입니다. 무언가를 잡을 듯 잡을 듯하다가, 결국 빈 뼈만 쥐고 지친 몸을 이끌고 잠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헤밍웨이 자신도 이 허무를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부귀와 명예와 재능이 결코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 뒤에 이어질 소망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도 여전히 이 땅에서는 청새치를 상어에게 뜯기는 것 같은 상실과 허무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고백은 다릅니다. "
인생이 허무하니 오늘 포기하겠다"가 아니라, "인생은 허무하지만 그 뒤에 예비된 삶이 있음을 알기에, 오늘도 최선을 다해 산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걷다가 빠진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예수님만 바라볼 때는 물 위를 마치 땅처럼 걸었습니다. 그러나 발밑의 파도를 보는 순간, 그는 빠져버렸습니다. 당신은 폭풍의 바다를 유리 바다처럼 걸어가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미 유리 바닷가에 서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자입니다. 이 땅에 닥치는 그 어떤 폭풍도 당신의 신분을 바꾸지 못합니다.

소설 속에서 산티아고가 돌아오지 않자, 그를 따르던 소년이 바닷가에서 할아버지를 향해 소리쳐 부릅니다. 그 모습을 본 산티아고의 딸 안젤라가 말합니다. "
소리는 듣는 사람이 없으면 그냥 허공에 흩어져 버리고 마는 거야."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신 이시요 만국의 왕이십니다. 그분이 지금 당신을 통치하고 계십니다. 당신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그분이,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의 삶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러니 오늘 이 말씀이, 허공에 흩어지는 소리가 아니라 당신의 마음 깊은 곳에 새겨지는 소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