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요한계시록 말씀 묵상

콧구멍이 막히는 순간 - 바보처럼 살다가 가지 마십시오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7. 8.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사람의 아들과 같은 이가 앉았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이한 낫을 가졌더라. 또 다른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구름 위에 앉은 이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네 낫을 휘둘러 거두라 거둘 때가 이르러 땅에 곡식이 다 익었음이로다 하니, 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낫을 땅에 휘두르매 곡식이 거두어지니라. 또 다른 천사가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나오는데 또한 이한 낫을 가졌더라. 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이한 낫 가진 자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불러 가로되 네 이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 하더라.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성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굴레까지 닿았고 일천 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요한계시록 14:14~20)

어느 의대생이 첫 해부학 실습을 앞두고 며칠을 뒤척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실습 첫날, 문을 열고 들어간 그는 하얀 천에 덮인 마흔 구의 몸을 마주했습니다. 머리를 빡빡 민 사람들, 남자와 여자, 늙은이와 젊은이, 팔뚝에 커다란 용 문신을 새긴 사람까지, 모두 벌거벗겨진 채 실습대 위에 나란히 누워 있었습니다. 그 순간 후배의 머릿속에 이상한 생각이 스쳤다고 합니다. '이 사람도 어제까지는 누군가의 아버지였겠지, 이 여자분도 아침마다 거울 앞에서 화장을 하고, 마음에 드는 옷을 고르며 하루를 시작했겠지.' 살아 있는 동안 그들도 우리처럼 다투고, 시기하고, 웃고, 울고, 사랑하고, 미워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누군가는 자식 대학 입시 때문에 애를 태웠을 것이고, 누군가는 승진 발표를 기다리며 밤잠을 설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그저 실습용 마네킹처럼 누워 있을 뿐이었습니다. 곧 배가 갈리고, 내장이 꺼내어져 병에 담기고, 머리뼈가 전기톱에 잘려 나갈 참이었습니다.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요? 대단한 일이 일어난 게 아닙니다. 그저 코끝에서 숨이 멎었을 뿐입니다. 이사야는 이미 이천육백 년 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사람을 믿지 말라. 코에 숨이 붙어 있을 뿐, 아무 보잘 것 없느니."(사2:22, 표준새번역)

숨이 붙어 있으면 사람이라 불리고, 숨이 끊기면 시체라 불립니다. 그리고 그 즉시 격리됩니다. 병원에서는 영안실로, 집에서는 병풍 뒤로, 그러고는 곧 부패가 시작됩니다. 시신을 이장하는 자리에 참관했던 어느 목회자는 그 냄새를 도무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고 고백합니다. 영안실 앞에 향을 짙게 피우는 이유도 실은 그 냄새를 감추기 위해서입니다.

몸속에 기생하던 것들조차 숨이 멎는 순간 밖으로 기어 나온다고 합니다. 우리가 평생 가꾸고 다듬고 자랑스러워했던 이 몸이, 결국 그렇게 됩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서, 지금부터 오십 년 후에도 여전히 살아 계실 분이 몇 분이나 되겠습니까? 우리 대부분은 그 오십 년 안에 병풍 뒤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협박이 아니라 통계이고, 통계이기 이전에 창조의 질서입니다.

요한계시록 14장 후반부는 바로 이 죽음 너머의 심판을 그리고 있습니다. 구름 위에 사람의 아들과 같은 이가 앉아 계십니다. 머리에는 금 면류관을, 손에는 날이 시퍼렇게 선 낫을 들고 계십니다. 다니엘서에서 이미 예언된 그 왕,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이분이 스스로 심판을 시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전에서 나온 천사의 외침을 듣고서야 낫을 휘두르십니다. "
거둘 때가 이르러 땅에 곡식이 다 익었음이로다." 왜 이런 절차가 필요합니까? 예수님 스스로 그 날과 그 때는 아버지만 아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막13:32). 아들도 모르는 그 시각을, 세상의 숱한 시한부 종말론자들은 어떻게 알았다고 큰소리쳤던 것일까요? 예수님보다 더 많이 아는 척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늘 있어 왔습니다.

"
곡식이 다 익었다"는 말은 무서운 말입니다. 이 땅의 죄악이 정점에 이르러 더 이상 봐줄 수 없는 지점에 도달했다는 뜻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하시고도 사백 년을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하였다"는 것이었다(창15:16). 죄에도 익어가는 시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열매가 완전히 무르익을 때까지 참으십니다. 그러니 세상이 점점 살기 좋아지고 착해질 것이라 기대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세상은 갈수록 잔인해지고, 갈수록 엽기적으로 변해갈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죄악의 정점에서 무너집니다.

이어지는 장면은 더 처절합니다. 포도가 다 익었다는 외침과 함께, 그 포도가 거두어져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 틀에 던져집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포도주 틀은 낯선 이미지가 아니었습니다. 물이 귀한 그 지역에서 포도주는 일상의 음료였고, 가을이면 남자들이 커다란 돌 틀에 올라가 맨발로 포도를 밟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옷자락과 허벅지까지 붉은 즙이 튀어 마치 피를 뒤집어쓴 듯했다고 합니다.

계시록은 바로 이 익숙한 장면을 빌려 심판을 묘사합니다. "
틀에서 피가 나서 말굴레까지 닿았고." 말의 재갈 높이까지 피가 튀었다는 것은 악인이 당할 고통이 얼마나 극심한지를 나타내는 관용적 표현입니다. 그리고 그 피가 "일천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다"고 합니다. 4는 온 세상을, 10은 왕권을 상징하는 숫자이니, 1,600(4×4×10×10)은 이 심판이 전 세계의 모든 권세를 향해 철저하게 임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20절은 이 포도주 틀이 "
성 밖에서" 밟힌다고 말합니다. 성 안은 새 예루살렘, 어린양과 함께 서게 될 거룩한 시온산입니다. 성 밖에 있는 자들만 그 틀에서 밟힙니다. 그렇다면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성 안에 들어갈 자격을 얻었습니까? 여전히 부족하고, 여전히 넘어지고, 여전히 죄짓는 우리가 말입니다. 답은 히브리서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히13:12) 우리의 피가 튀어야 했던 그 자리, 우리의 살이 찢겨야 했던 바로 그 성문 밖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튀고 그분의 살이 찢겼습니다. 우리 대신 그분이 그 포도주 틀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저주에서 놓여났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마음 놓고 살아도 되는 것입니까? 히브리서는 곧바로 답을 잇습니다. 그분의 능욕을 지고 우리도 영문 밖으로 그분께 나아가자고, 이 땅에 영구한 도성이 없음을 알고 장차 올 것을 찾으며, 늘 감사하고 선을 행하며 나누는 삶을 살자고 말합니다(히13:13~16). 그것이 구원받은 자의 삶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구원받았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엉터리로 삽니까? 이유는 단순합니다. 죽음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몇 해 전 텔레비전의 한 아침 프로그램에 나온 사연을 들었습니다. 어느 아주머니에게 병약한 홀어머니가 계셨습니다. 오래전부터 자리보전을 하고 계셔서 누군가 곁에서 대소변까지 받아내야 하는 상태였습니다. 아주머니에게는 남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어릴 적부터 자식처럼 아끼며 키워 온 존재였습니다. 남동생이 결혼하게 되었을 때, 아주머니는 새신랑이 된 동생이 병든 어머니까지 떠맡게 되는 것이 안쓰러워 남편의 동의를 얻어 어머니를 자신의 집으로 모셨습니다. 그리고 수년간 정성으로 병 수발을 들었습니다. 원망 한 번 없이, 오히려 기쁜 마음으로 말입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시기 얼마 전, 딸을 불러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서울 변두리에 아무도 모르던 작은 집 한 채가 있었는데, "
그 집은 네 남동생 주자"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아주머니의 마음속에서 무언가 무너져 내렸습니다. 아주머니는 방송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만일 그때 옆에 과도가 있었다면 어머니를 찌르고 싶었어요. 도끼가 있었다면 도끼로 찍고 싶었어요." 십수 년을 원망 한 번 없이 모신 어머니였습니다. 그런데 돈이 끼어드는 순간, 그 마음이 살의로 바뀌었습니다.

또 다른 사건이 있습니다. 평소 우애가 좋기로 소문난 형제가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며 사천오백만 원의 유산을 남기셨는데, 형에게 삼천만 원, 동생에게 천오백만 원이 돌아가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장례를 마치고 동생이 자기 몫을 요구하자, 형은 동생을 차에 태워 먼 곳으로 데려가 살해하고, 지문 감정을 피하려고 열 손가락을 전부 잘라 산에 묻었습니다. 그런데 뒤늦게 알고 보니 동생은 생명보험에 가입되어 있었고, 유족이 자신뿐이었으니 보험금도 자신에게 돌아올 참이었습니다. 문제는 손가락을 다 잘라 묻어버렸으니 사망을 증명할 길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형은 익명으로 시신의 위치를 알리는 편지를 보냈다가 필적 감정으로 붙잡혔습니다. 사천오백만 원, 그 돈만 없었더라도 그 두 형제는 여전히 평소처럼 사이좋게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돈을 감당할 실력이 없는 사람에게 돈은 축복이 아니라 독입니다. 재벌가의 형제들이 유산을 두고 몇 년씩 소송을 벌이는 모습, 부모의 재산을 물려받아 술과 도박으로 인생을 탕진하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우리는 심심찮게 듣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돈을 "
일만 악의 뿌리"라 부르고(딤전6:10), 심지어 그것을 '맘몬'이라는 세상 신으로 지칭합니다.

문제는 이 맘몬의 정신이 교회 담장을 넘어 예배당 안에까지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신앙을 거룩함과 성품의 문제로 보지 않고, "
저 사람이 예수 믿고 얼마나 잘 살게 되었나"로 판단하는 풍조가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던 사람의 사업이 망하거나 몸에 병이 들면, "혹시 하나님 앞에 지은 죄가 있는 거 아니냐"는 무례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습니다.

『목민심서』의 저자 정약용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는 한때 천주교 신자였습니다. 그러나 훗날 동부승지 자리를 사양하는 상소문에서 스스로 "
나는 천주를 버렸다"고 배교를 선언했습니다. 반면 그의 셋째 형 정약종은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가 서소문 밖에서 참수당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 땅을 굽어보며 죽을 수 없다"며 고개를 하늘로 향한 채 형을 받았고, 그 결기가 얼마나 서슬 퍼랬던지 집행하던 이가 손을 떨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런데 천주교에서 발표한 '위대한 신자 100인' 명단에는 순교자 정약종이 아니라 배교자 정약용이 이름을 올렸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정약용이 더 유명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인 성공 앞에서는 순교조차 빛을 잃어버립니다. 오늘날 교회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를 이용해 병을 고치고, 돈을 벌고, 자식을 좋은 대학에 보내는 도구쯤으로 신앙이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본질은 정반대입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나를 죽이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습니다.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많이 쌓아도,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 우리 손에 쥐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 땅의 삶을 소홀히 여기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가정과 일터에서 누구보다 성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돈도 벌 수 있으면 벌고, 명예도 주어지면 감사히 받으면 됩니다. 그것들은 다 일반은총으로 주어지는 것들이니 말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인에게 돈과 명예가 갖는 의미는 세상 사람들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세상 사람은 그것 자체를 인생의 목적으로 삼지만, 우리는 영원한 나라를 준비해 가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잠시 맡겨 두신 것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세상은 힘이 주어지면 교만해지지만, 그리스도인은 그 힘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섬깁니다.

'에노스'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셋의 아들로 태어난 그 아이의 이름 뜻은 "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에노스가 태어난 그 시점부터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창4:26).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진심으로 부르게 되는 시작점은,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그 순간입니다.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절박하게 기도하지 않습니다. 영원을 준비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진지하게 예배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죽습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오늘도 어느 병원의 응급실에서, 어느 도로 위의 사고 현장에서, 준비 없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으로 올라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배우지 못해서, 가난해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죽음 이후를 준비하며 살았습니까, 아니면 곧 썩어 없어질 이 육신 하나만을 위해 온 생을 소진했습니까? "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6:8)

그날, 도적처럼 죽음이 찾아올 그 순간, "
아, 나는 정말 바보처럼 한 세상을 살았구나" 하고 땅을 치며 후회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늘 하루를 그렇게 살아내는 것, 그것이 신앙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딤전6: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