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편 24편 1~10절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셀라).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셀라)."
주일 예배 시간에 찬양대가 정성껏 노래를 마치고 내려갑니다. 화음은 아름다웠고 박자도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질문이 남습니다. 이것으로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목소리가 크고 곡조가 곱다고 해서 찬양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찬양하는 것일까요? 시편 24편이 그 답을 줍니다. 이 시는 다윗이 오벧에돔의 집에 있던 언약궤를 하나님의 성소로 모셔 올리며 지은 노래로 알려져 있습니다. 궤를 앞세우고 산을 오르는 행렬 속에서 흘러나온 노래이니, 찬양과 예배의 본질을 가장 현장감 있게 보여 줍니다.
시편 23편 6절의 고백이 이 장면과 같습니다.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언약궤에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 궤를 하나님의 집으로 옮기는 일은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있는 곳에서 영원히 살고 싶다는 소원의 행진이었습니다.
행렬의 첫 소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실 하나를 확인하려고 이 노래를 부른 것이 아닙니다. 그는 창조하신 하나님이 이루신 구원의 역사를 노래합니다.
집 마당에 정원을 가꾸는 사람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는 꽃을 심고 돌을 놓으며 자기 눈이 즐거울 만한 공간을 만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신 일은 이런 취미 생활이 아니었습니다. 처음부터 하나님께는 이루시려는 구원의 계획이 있었고, 세상은 그 계획이 펼쳐지는 무대였습니다.
여기서 오래된 질문이 하나 올라옵니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하늘에서 전쟁이 있었고, 패한 타락한 천사가 땅으로 쫓겨났다고 말합니다. 그가 사탄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실 때 땅에는 이미 사탄이 있었던 셈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묻습니다. 사탄을 먼저 없애 놓고 인간을 만드셨다면 죄도 사망도 없지 않았겠느냐고, 우리는 에덴에서 평안히 살았을 것 아니냐고 말입니다.
이 질문은 억울한 사람의 항변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이 항변이 어디서 나오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선악과를 먹고 스스로 선악의 심판자가 된 인간은 자기에게 불리하면 악이라고 판정합니다. "하나님이 왜 나에게 불리하게 일하셨습니까?"라는 불만은 그 판정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우리가 꿈꾸는 천국은 대개 걱정 없이 편안한 에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편안한 삶을 위해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에베소서 1장이 하나님의 뜻을 밝혀 줍니다. 하나님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신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서 받으시려는 것은 은혜의 영광에 대한 찬미입니다.
여기서 질문이 뒤집힙니다. 사탄이 없고 죄도 없는 에덴에서는 그 찬미가 가능했을까요? 죄에 떨어진 일이 없으니 그리스도가 오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오시지 않았다면 아들을 내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알 길이 없습니다. 모르는 것을 노래할 수는 없습니다.
물에 빠져 본 사람과 수영장 가장자리에서 구조 방법을 설명하는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구조 요령을 아무리 정확히 아는 사람도, 거센 물살에 휩쓸려 숨이 막히던 순간 누군가의 손에 붙잡혀 올라온 사람의 감사를 따라가지 못합니다. 그 사람은 기슭에 누워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합니다. 그 침묵이 곧 감사의 노래입니다.
그래서 은혜의 영광에 대한 찬미는 하늘의 천사들도 부르지 못합니다. 천사들은 죄의 자리에 떨어져 본 적이 없으므로 아들로 인해 임한 인자와 사랑을 맛본 적도 없습니다. 죄의 자리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올려다보며 올리는 성도의 감사가 천사의 찬미보다 귀하다고 말할 수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의 중심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성경을 "내가 구원받는 이야기"로만 읽으면 하나님의 일하심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습니다. 이해되지 않으니 불평이 나옵니다. 창조 한 줄에도 구원의 역사와 그 영광이 담겨 있습니다.
노래는 곧 질문으로 바뀝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당신이 궤를 앞세우고 성전 계단을 오르는 행렬 속에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이 노래를 소리 내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이 노랫말을 그대로 풀면 "여호와의 산에 오르는 나는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않고 거짓 맹세를 하지 않는 자다"라는 선언이 됩니다. 입이 떨어지지 않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노래를 부르며 걸어가는 사람은 다윗입니다. 밧세바를 범하고 그 남편 우리아를 죽인 사람입니다. 손에 피를 묻힌 다윗이 깨끗한 손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는 뻔뻔한 사람이었을까요, 아니면 자기 죄를 잊어버린 사람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도 자기 힘으로는 여호와의 산에 오를 수 없고 거룩한 곳에 설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당당하게 노래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가 앞세우고 가는 언약궤에 있었습니다.
사나운 겨울밤에 초라한 행색의 청년이 초대장을 손에 쥐고 대저택 앞에 서 있습니다. 입은 옷은 다 해진 작업복이고 주머니에는 동전 몇 닢뿐입니다. 문 앞의 경호원이 가로막습니다. 그때 청년이 초대장을 내밉니다. 거기에는 집주인의 직접 서명과 인장이 찍혀 있습니다. 경호원은 말없이 길을 비킵니다. 청년의 옷이 바뀐 것이 아닙니다. 그의 손에 들린 초대장이 그를 들여보낸 것입니다.
언약궤가 그런 것이었습니다. 언약궤 위 속죄소에는 죄 없는 제물의 피가 뿌려졌고, 그 피로 이스라엘의 죄가 덮이고 용서받았습니다. 하나님은 그 피를 보시고 "죄 없다" 하고 선언하셨습니다. 지금 우리의 처지로 옮겨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모든 허물을 덮으시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을 "죄 없다, 깨끗하다" 하고 선언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이 선언이 필요한 까닭이 있습니다. 죄인은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죄는 의 앞에서 소멸될 수밖에 없고, 그 앞에서 인간은 사라질 존재일 뿐입니다. 그런 우리가 온전하신 그리스도의 의 안에서 의롭다 여김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의 복을 누립니다. 이것이 구원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5절과 6절의 노래가 이어질 수 있습니다. "저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성도가 여호와를 찾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의가 오직 하나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는 의가 없고, 도덕을 쌓아 얻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의를 얻는 것이 최고의 복이 됩니다. 하나님의 의로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으로 "내 잔이 넘치나이다" 하고 노래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이런 노래가 입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점검해 볼 것이 있습니다. 죄의 자리에 있던 인간의 실상을 가볍게 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고 거룩한 곳에 설 수 없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거룩한 곳에 선다는 일 자체를 별로 값어치 없는 일로 여기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마음에는 늘 엉뚱한 것들이 가득합니다.
행렬이 성문 앞에 이릅니다. 다윗은 외칩니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찌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찌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이 구절을 읽을 때 다윗이 자기를 영광의 왕이라 부르는 것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다윗은 언약궤가 성전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영광의 왕이신 하나님이 자기 처소로 들어가시는 모습으로 그려 내고 있습니다. "영광의 왕이 뉘시뇨?" 하고 묻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하는 대답이 돌아옵니다. 이 노래가 두 번 반복되며 환호는 더 높아집니다.
그런데 이 왕이 성전으로 들어가신다는 말에는 더 깊은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처소로 들어가신다는 것은 자기 백성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시려고 피 흘려 죽으실 것을 미리 보여 주는 일입니다. 그 일은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전쟁에 능한 여호와의 강한 손이 나를 사탄의 손에서 건져 내시고, 그 피로 모든 죄를 용서하시며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들이셨다는 것이 이 시가 가리키는 구원입니다.
성도가 이것을 알고 감사하는 것이 곧 찬양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과 구원의 역사를 모르는 사람에게서는 이런 찬양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사람은 자기 영광을 구하지 않습니다.
시편 24편은 한 가지 질문으로 시작해서 한 가지 대답으로 끝납니다. 거룩한 곳에 설 자는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믿는 사람뿐입니다. 손이 깨끗해서 산에 오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깨끗하다는 선언을 받은 사람이 오릅니다. 도덕으로 올라가는 사람은 없고, 앞세운 피의 언약 덕분에 오릅니다. 그러니 오늘 하나님 앞에 서는 우리도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내가 어떻게 이 거룩한 곳에 서게 되었는가? 그 물음의 답은 내 손에 없고, 십자가에 있습니다.
그 답을 아는 사람은 이제 자기 이야기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아들을 보내신 인자와 자비를 감사하며 노래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가 바로 그 노래를 부르게 하시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자가 되도록, 그 은혜를 마음 깊이 누리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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