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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말씀 묵상

시편 1편 -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 고난 중에 누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11. 6.

시편 1편 1~6절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병실의 밤은 길고 깁니다. 항암 치료를 마치고 천장만 바라보는 분이 있고, 문을 닫은 가게 앞에서 한참을 서 있던 분이 있고, 갑작스러운 사고 소식에 모든 시간이 멈춰 버린 분이 있습니다. 이런 자리에서 "
복 있는 사람"이라는 말은 때로 아프게 들립니다. 나에게 복이 있다면 왜 이런 일이 생겼느냐는 질문이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편은 바로 그 질문 앞에서 시작합니다. 시편 1편은 "
복 있는 사람은"이라는 말로 문을 엽니다. 우리가 말하는 복은 건강하고, 자녀가 속 썩이지 않고, 형편이 넉넉하고, 집안이 평안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복은 그런 조건 목록이 아닙니다. 1, 2절은 복 있는 사람을 악인의 꾀를 좇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으며, 여호와의 말씀을 즐거워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건강이나 재산이 복의 기준이었다면 병들고 무너진 사람은 복 밖에 있는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전혀 다른 눈으로 사람을 봅니다.

솔직히 우리 가운데 이 복 있는 사람의 모습에 맞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자기 뜻과 욕심을 따라 살았고, 잘되면 내 공로를 내세우고 어려워지면 하나님을 원망하곤 했습니다. 그렇다면 시편 1편은 우리를 정죄하려고 기록된 말씀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시편이 가리키는 복 있는 사람은 먼저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악인의 길에 서지 않으셨고, 자기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끝까지 순종하셨으며, 말씀을 기뻐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이 아버지의 뜻이었을 때에도 "
내가 아들인데 왜 이 길입니까"라고 원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이 바라는 복은 예수님께 거의 없었습니다. 머리 둘 곳이 없으셨고, 배신당하셨고, 맨몸으로 죽으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분이 참으로 복 있는 분이셨다면, 복은 처지와 형편에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복음은 여기서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예수님은 그 복을 혼자 누리시지 않고, 자기 백성을 불러 그 복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순종이 모자라서 복에서 떨어진 자리에 있던 우리를, 그분의 순종으로 복 안에 넣어 주신 것입니다. 성도는 스스로 복 있는 사람이 된 사람이 아니라, 복 있는 사람이신 예수님과 연합하여 그 복에 참여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병상에 누워 있어도, 장부가 엉망이 되어도, 장례를 치르고 돌아와 울고 있어도, 이 복은 거두어지지 않습니다.

시편은 이 복을 한 폭의 그림으로 보여 줍니다. "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물이 귀한 땅에서 이 말은 사막 한가운데 마르지 않는 오아시스에 서 있는 나무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 나무는 물을 구하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잎을 푸르게 하려고 안간힘을 쓰지도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단 하나, 어디에 심겨 있느냐입니다. 시냇가에 심겨 있기에 물은 끊임없이 흘러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지쳐 있는 분들에게 이 말씀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아플 때도 무너졌을 때도 여전히 무언가를 해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더 믿어야 하고, 더 기도해야 하고, 더 긍정해야 한다고 자신을 몰아세웁니다. 그러나 나무를 살리는 것은 나무의 노력이 아니라 시냇물입니다. 성도의 생명도 내가 쥐어짜 내는 믿음의 분량이 아니라, 나를 심어 두신 그리스도께서 공급하시는 생명에서 옵니다. 기도할 힘조차 없는 밤에도 나무는 시냇가에 그대로 서 있습니다. 내가 붙잡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분이 나를 붙잡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시냇가의 나무에게 겨울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병과 실패와 상실은 여전히 우리의 계절 속으로 들어옵니다. 시편은 고난이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는다고 말합니다. 열매에는 때가 있고, 그 때를 정하시는 분은 시냇물의 주인이십니다. 지금 아무 열매도 보이지 않는 겨울 같은 시간에도 뿌리는 물을 향해 깊어지고 있습니다.

또한 "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라는 말씀도 만사가 뜻대로 풀린다는 약속이 아닙니다. 형통이란 악인의 길로 가지 않고 말씀 곁에 머무는 그 길을 끝까지 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업은 무너졌어도 이 길에서는 무너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4절의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고 합니다. 겨는 알맹이 없는 쭉정이입니다. 스스로 맺은 열매를 자랑하지만 시냇물에서 오지 않은 열매이기에 바람이 불면 날아갑니다. 건강도 재산도 자식의 성공도 그렇습니다. 붙들고 있던 모든 것이 바람에 날려 가는 것을 겪고 계신 분이 있다면, 그 아픔 속에서 어쩌면 처음으로 땅의 것들이 우리를 끝까지 지켜 주지 못한다는 것을 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시냇가를 바라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인도일 수 있습니다.

마지막 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여기서 "인정하신다"는 말은 아신다는 뜻입니다. 주께서 내 길을 아십니다. 몇 번째 항암인지, 얼마나 잠을 못 잤는지, 가게 문을 닫던 날의 얼굴을, 영안실 복도에서 흘린 눈물을 아십니다. 멀리서 지켜보는 구경꾼이 아니라 그 길을 먼저 걸으신 분으로서 아십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지나신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홀로 걷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고난 가운데 계신 분께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고난은 당신이 복 밖으로 밀려났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이 복의 길이었듯이, 그분과 함께 걷는 이 길도 복의 길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다 이해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답을 찾는 것보다 먼저 시냇가에 심겨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그분의 사랑은 당신의 건강 수치나 통장 잔고에 달려 있지 않고, 이미 십자가에서 확정되었습니다.

오늘 하루도 그저 예수님과 함께 걷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처지를 원망하지 않고, 이 길에서 그분과 동행하는 것만으로 만족하게 될 때, 마르지 않는 평안이 우리 마음에 흘러들 것입니다. 시냇물은 오늘도 흐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