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편 말씀 묵상

시편 150편 - 산 자여, 찬양하라!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6. 27.

"할렐루야 그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그의 능하신 행동을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위대하심을 따라 찬양할지어다.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소고 치며 춤 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시편 150:1~6)

어느 작은 산골 교회에 오래된 풍금이 하나 있었습니다. 몇 개의 건반은 소리가 나지 않았고, 페달은 삐걱거렸으며, 찬송가 책은 너덜너덜 해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일마다 그 교회 성도들은 그 풍금 앞에 모여 목청껏 찬양했습니다. 이웃 마을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듣고 "
저 교회는 뭐가 저렇게 좋은 일이 있나?" 하고 물었다고 합니다. 좋은 악기가 아니었습니다. 화려한 음향 시설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예배는 살아 있었습니다. 찬양이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편 150편은 시편 전체의 마지막 장입니다. 150편의 시편이 끝나는 자리에서 성령은 단 하나의 명령으로 마침표를 찍습니다.
"숨 쉬는 사람마다 주님을 찬양하여라. 할렐루야" (6절, 새번역). 이것은 권고가 아닙니다. 요청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살아 있다는 것, 숨을 쉰다는 것, 그 자체가 이미 찬양의 이유가 된다는 선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날을 기억해 보십시오. 뒤에서는 바로의 군대가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고 있었고, 앞에는 갈라진 바닷길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발밑의 땅은 기적이었고, 머리 위의 하늘은 하나님의 손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길을 건넜습니다. 모두 무사히 건넜습니다. 그때 모세와 미리암이 이끄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입니까?

다음 목적지로 서둘러 떠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멈추었습니다. 손에 소고를 들고, 입으로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출 15:1). 기쁨에 겨워 춤을 추었습니다. 그 찬양의 순간은 단순한 감정의 표출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신학적 행위였습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인도받았다. 우리의 인도자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은혜 받은 백성이다." 이 사실을 그들의 몸과 목소리와 발걸음으로 확인하는 행위였습니다.

우리는 너무 자주 홍해 건너는 기적을 경험하고도 곧바로 다음 일정으로 달려갑니다. 기도 제목이 응답되면 새 기도 제목을 적고, 위기가 지나가면 다음 위기를 걱정합니다. 잠시 멈추어 경축하는 법을 잊어버렸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바쁨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것을 오만이라고 부릅니다. 인도자 하나님을 무시하는 처사이며, 은혜를 은혜로 받지 않는 영적 둔감함입니다.

축구 경기에서 하프타임은 단순한 휴식이 아닙니다. 감독은 선수들을 불러 모아 전반전을 되돌아보고, 후반전의 전략을 세웁니다. 지친 선수들은 숨을 고르고 방향을 재정비합니다. 하프타임을 잘 쓰는 팀이 이기는 경기를 가져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공동체의 찬양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간은, 지나온 삶의 전반전을 하나님의 눈으로 되돌아보는 시간입니다. 내가 살아온 날들 속에 은혜가 있었음을 확인하고, 앞으로 걸어갈 길의 방향을 재확정하는 시간입니다. "
우리는 어디서 왔습니까? 누가 우리를 지키셨습니까? 우리는 어디로 갑니까?" 이 세 물음에 대한 답을 몸으로 고백하는 행위, 그것이 찬양입니다.

건강하고 복된 공동체는 언제나 찬양하는 공동체였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이 날마다 성전에 모여 하나님을 찬미하던 모습 (행 2:47), 빌립보 감옥에서 바울과 실라가 한밤중에 기도하고 찬송하던 장면 (행 16:25), 이 모두가 단순한 종교적 의식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확인하는 공동체적 선언이었습니다. "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이 어둠도, 이 감옥도, 우리의 마지막이 아니다."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나치 감옥에 갇혀 있던 시절에도 찬양과 예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가 동료 수감자들과 함께 성탄절 예배를 드린 이야기는 오늘까지 전해집니다. 누군가 그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찬양할 수 있습니까?" 본회퍼의 대답은 간결했습니다.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찬양합니다." 조건이 갖추어져야 찬양하는 것이 아니다. 살아 있기 때문에 찬양하는 것입니다.

시편 1편은 묻습니다. 누가 행복한 사람입니까? 그리고 시편 150편은 대답합니다.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들입니다. 행복은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찬양의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찬양하지 않는 삶은, 숨을 쉬고 있어도 이미 어딘가가 죽어 있는 삶입니다.

그 산골 교회의 너덜너덜한 찬송가 책과 삐걱거리는 풍금을 다시 떠올려 봅니다. 거기에는 조건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생명이 있었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좋은 음향 장비가 아닐지 모릅니다. 잠시 멈추는 용기입니다. 지나온 은혜를 돌아보는 겸손입니다. 입술을 열어 "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 찬양합니다"라고 고백하는 단순한 순종입니다. 숨을 쉬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에게는 찬양할 이유가 충분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