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시편 147:11)
쿠바에서 사역하는 한 선교사가 보내온 편지에 이런 이야기가 담겨 있었습니다. 마딴사스 교회의 엘리다 장로는 교회 일이라면 누구보다 앞장서는 여장부입니다. 덩치도 크고 목소리도 걸걸합니다. 그런데 그분에게는 한 가지 특별한 '은사'가 있으니, 바로 대단한 음치라는 것입니다. 박자도, 음정도 그분 앞에서는 맥을 못 춥니다. 게다가 목소리까지 워낙 커서 주변 사람들을 압도할 정도입니다. 그분의 아들 세르히오 집사는 예배 때마다 기타 반주를 맡습니다.
어느 주일, 선교사는 우연히 이 모자 바로 옆에 앉아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찬양 시간이 되자, 모자의 목소리가 나란히 들려왔습니다. 박자도, 음정도, 심지어 목소리의 크기까지, 어쩌면 그렇게 똑같은지, 선교사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배가 끝날 무렵, 그 웃음은 조용한 감동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음치면 어땋습니까? 씩씩하고 꿋꿋하게, 매 소절마다 온 힘을 다해 부르는 저 두 사람의 찬양을, 하나님은 분명히 기쁘게 들으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찬양을 '잘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음정이 맞아야 하고, 박자가 정확해야 하고, 목소리가 아름다워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예배 시간에 입을 꾹 다뭅니다. '내가 부르면 옆 사람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아예 찬양을 포기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하나님께 찬양함이 그 얼마나 아름답고 마땅한 일인가!"(시편 147:1, 새번역) 여기서 '마땅한'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마땅하다는 것은 조건이 없다는 뜻입니다. 잘하는 사람에게만 마땅한 것이 아닙니다. 음정이 맞는 사람에게만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열고 입을 여는 것 자체가, 이미 아름답고 마땅한 일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갓 태어난 아이가 처음으로 "엄마"라고 부를 때, 그 발음이 정확하지 않아도 어머니의 마음은 녹아내립니다. 세상 어느 성악가의 노래보다 그 어설픈 한마디가 더 깊이 어머니의 가슴에 울립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십니다. 그분은 음악 경연대회의 심사위원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십니다.
시편 147편은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이 부른 노래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들이 돌아온 도성은 폐허였습니다. 성벽은 무너졌고, 집들은 불탔으며, 사람들의 마음은 70년의 고통으로 메말라 있었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그들은 찬양했습니다. 완벽한 환경이 갖춰졌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이 회복되었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그들을 다시 모으셨고, 상한 마음을 싸매어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3절). 찬양은 조건이 충족될 때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찬양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기억할 때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나치 치하의 감옥 안에서도 동료 수감자들과 함께 찬송을 불렀다고 전해집니다. 그 노래가 음악적으로 아름다웠을 리 없습니다. 굶주리고 지친 목소리, 차갑고 좁은 감방 안에서 울려 퍼진 찬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찬양은 살아 있었습니다. 절망 한가운데서, 하나님을 향해 입을 열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강력한 신앙의 고백이었기 때문입니다.
쿠바의 엘리다 장로와 세르히오 집사, 그 모자(母子)는 아마 자신들이 음치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누군가 슬며시 귀띔해 주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매 소절마다 힘을 주어, 씩씩하게, 꿋꿋하게 불렀습니다. 그 찬양 안에는 기교가 없었지만, 진심이 있었습니다. 완성도는 없었지만, 담대함이 있었습니다.
시편 147편 1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뛰어난 재능이 아닙니다. 출중한 목소리가 아닙니다. 오직 그분을 경외하며, 그분의 한결같은 사랑을 신뢰하는 마음입니다. 엘리다 장로의 걸걸한 목소리 안에, 세르히오 집사의 박자 없는 노래 안에, 바로 그 마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찬양하고 있습니까? 혹시 '나는 음치니까', '나는 목소리가 안 좋으니까'라는 이유로 입을 닫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반대로, 찬양을 너무 잘 부르려는 나머지 정작 하나님께 드리는 마음을 잃어버리지는 않았습니까? 찬양은 공연이 아닙니다. 찬양은 고백입니다. 그것은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께 아뢰는 일입니다. 그 고백 앞에서 하나님은 음정표를 꺼내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그저 귀를 기울이십니다. 사랑하는 자녀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하시는 아버지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찬양하십시오. 잘 부르든 못 부르든, 목소리가 크든 작든, 음정이 맞든 틀리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향해, 진심으로, 입을 여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아름답고 마땅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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