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것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함은 그가 명령하시므로 지음을 받았음이로다. 총각과 처녀와 노인과 아이들아.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그의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의 영광이 땅과 하늘 위에 뛰어나심이라."(시편 148:5,12~13)
어느 날 밤, 빠삐용은 꿈을 꿉니다. 더스틴 호프만과 스티브 맥퀸이 주연한 영화 〈빠삐용〉은 실존 인물 앙리 샤리에르의 삶을 바탕으로 합니다. 파리 뒷골목의 건달 출신인 그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남미의 악명 높은 감옥 섬으로 유배됩니다. 그리고 탈출을 거듭하며 처절하게 자유를 향해 달려갑니다. 영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섬뜩한 장면은 화려한 탈출 장면도, 잔인한 감옥 생활도 아닙니다. 그것은 빠삐용이 꿈속에서 맞닥뜨리는 단 한 번의 재판 장면입니다.
황량한 사막의 재판정에서 빠삐용은 당당하게 항의합니다. "나는 사람을 죽인 일도 없고, 지금까지 사나이답게 떳떳하게 살았소!" 그러나 재판관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단호하게 선고합니다. "살인을 안 했다 해도, 너에게는 인생을 낭비한 죄가 있다. 그러므로 유죄!" 빠삐용은 "유죄… 유죄…"라고 중얼거리며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갑니다.
이 장면이 오래도록 마음에 걸리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 대부분이 그 재판정에서 빠삐용과 똑같은 자리에 서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나는 남에게 큰 잘못을 저지른 일이 없습니다. 그럭저럭 성실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만약 심판자가 묻는다면, "그래서 너는 무엇을 위해 살았느냐?" 우리는 무어라 대답할 수 있을까요?
시편 148편은 그 질문에 대한 가장 명쾌한 답을 제시합니다. 이 시편은 온 우주를 향한 찬양의 대합창입니다. 시편 기자는 하늘로부터 시작합니다. "천사들아, 해와 달아, 빛나는 별들아, 하늘 위의 하늘아, 찬양하라. 그리고 시선을 땅으로 내린다. 용들아, 바다 깊은 곳이여, 불과 우박과 눈과 안개야, 산들과 작은 언덕들아, 과일 나무들과 백향목아 찬양하라." 마침내 사람에게 이릅니다. "왕들과 모든 백성들아, 노인과 아이들아, 총각과 처녀들아 찬양하라."
이 거대한 합창 속에서 한 가지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찬양은 어떤 특별한 자격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해가 매일 아침 하늘을 가로지르는 것이 찬양이요, 폭풍이 산을 휘몰아치는 것이 찬양이요, 아이가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 찬양입니다. 피조물이 피조물답게 존재하는 것 자체가 이미 창조주를 향한 찬양의 행위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다릅니다. 사람은 찬양을 선택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별은 찬양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파도는 하나님을 외면하고 다른 방향으로 흐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찬양은 더 무겁고, 사람의 침묵은 더 비극적입니다.
시편 기자는 그 이유를 5절에서 이렇게 밝힙니다. "너희가 주님의 명을 따라서 창조되었으니, 너희는 그 이름을 찬양하여라"(새번역). 찬양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명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존재의 기원이 곧 존재의 목적을 결정합니다. 하나님의 명으로 왔으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어긋날 때, 그것이 바로 '삶을 낭비한 죄'가 됩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들로 하루를 채웁니까? 아침에 눈을 뜨면 스마트폰을 먼저 집어 듭니다. 간밤에 쌓인 알림들을 확인하고, 뉴스 헤드라인을 훑고, 타인의 일상을 구경합니다. 하루를 걱정으로 시작하거나, 비교로 시작하거나, 분주함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잠자리에 들 때까지 그 분주함은 끊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한 달이 가고, 일 년이 갑니다. 우리는 바쁘게 살았다고 느끼지만, 정작 무엇을 위해 그토록 바빴는지 묻는다면 대답이 흐려집니다.
한 중년 남성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평생 가족을 위해 일했습니다. 새벽같이 출근하고 밤늦게 귀가하는 삶을 수십 년 반복했습니다. 자식들을 대학에 보냈고, 집을 마련했고, 노후도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조용히 앉아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나는 하루라도 하나님 앞에서 살았던가? 한 번이라도 아침에 눈을 뜨며 '오늘도 당신의 날입니다'라고 고백했던가?" 그 순간, 그는 빠삐용의 꿈속 재판정이 낯설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삶을 낭비한다는 것은 반드시 방탕하게 산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실하게, 부지런하게, 그러나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살아가는 것 또한 낭비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숨과 시간과 재능을 모두 나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데만 쓰다가 생을 마감하는 것이 시편 기자의 눈에는 가장 큰 비극인 것입니다.
혹자는 말할 것입니다. "찬양이란 교회에서, 예배 시간에, 성가대원이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러나 시편 148편의 합창 목록을 다시 보십시오. 폭풍도 찬양하고, 눈도 찬양하고, 새들도 찬양합니다. 이들은 별도의 찬양 시간을 갖지 않습니다. 그들은 존재하는 방식 자체로 찬양합니다. 폭풍은 몰아침으로, 새는 노래함으로, 나무는 뿌리를 내림으로 찬양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며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찬양입니다. 아이에게 따뜻한 밥을 지어 주면서 "이 아이도 주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기억하는 것이 찬양입니다. 힘든 직장에서 정직하게 일하면서 "이 하루도 주님 앞에서"라고 다짐하는 것이 찬양입니다. 병상에 누워서도 "내 생명이 당신 손에 있습니다"라고 내어 드리는 것이 찬양입니다.
12절과 13절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총각과 처녀, 노인과 아이들아, 모두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여라." 젊은이만 찬양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력이 왕성한 사람만 찬양하는 것이 아닙니다. 총각도, 처녀도, 주름진 노인도, 아장아장 걷는 아이도, 모두가 찬양의 주체입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동일하게 그분의 명으로 창조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독일의 신학자이자 순교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나치 감옥에 갇혀 처형을 기다리면서도 동료 수감자들을 위해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하고,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의 마지막 말은 처형장으로 끌려가면서 남긴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것이 나의 끝이지만, 생명의 시작이다." 그의 삶은 비록 짧고 고난으로 가득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한 방향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 방향이 바로 찬양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의 인생을 단 한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면 얼마나 명쾌할까요? 어떤 이의 삶은 '야망'으로 요약되고, 어떤 이의 삶은 '불안'으로 요약되고, 어떤 이의 삶은 '후회'로 요약됩니다. 그러나 매일 아침 찬양으로 시작하고, 매일 저녁 감사로 마감하는 사람의 삶은, 그 인생 전체가 하나의 긴 '할렐루야'가 됩니다.
"할렐루야"는 히브리어로 "야훼를 찬양하라"는 뜻입니다. 시편 148편은 이 한 단어의 무한한 확장입니다. 하늘에서 땅까지, 천사에서 아이까지, 폭풍에서 과일 나무까지, 온 우주가 한목소리로 이 한 단어를 외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합창의 한 자리가 당신을 위해 비어 있습니다.
빠삐용의 꿈속 재판관은 물었습니다. "너는 무엇을 위해 살았느냐?" 그날, 당신과 나는 뭐라고 답할 수 있을까요? 그 답이 "할렐루야"가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것이 가장 당당하고, 가장 아름다운 인생의 결산인 것입니다.
"너희가 주님의 명을 따라서 창조되었으니, 너희는 그 이름을 찬양하여라" (시편 148:5, 새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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