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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말씀 묵상

시편 23편 - 내가 부족함이 없는 이유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10. 9.

시편 23편 1~6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시편 23편은 아마 성경에서 가장 많이 외워진 본문일 것입니다. 병원 중환자실 앞에서도, 장례식장에서도, 새해 첫 주일에도 이 시를 읽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읽는 우리의 속마음은 대개 이렇지 않았습니까? "
하나님이 내 목자가 되어 주시면, 내 인생은 걱정 없이 술술 풀리겠지." 그러나 이런 이해는 이 시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의 값을 떨어뜨리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목자로 여기지 않는 사람 중에도 사업이 잘되고 자식이 잘되고 건강하게 사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만 바라보며 살았는데 사업은 무너지고 몸은 병들고 자식은 속을 썩이는 성도도 있습니다. 인생이 잘 풀리는 것이 목자 되신 하나님의 증거라면, 이 두 사람 앞에서 우리는 무슨 말을 해야 합니까?

두 사람을 상상해 봅시다. 한 사람은 흔히 말하는 성공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 넓은 집, 잘 큰 자녀들. 다른 한 사람은 하는 일마다 꼬였습니다. 몇 번의 사업 실패, 오래 끈 병, 늘 모자란 살림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같은 해에 같은 병원에서 눈을 감습니다. 병실 문 앞에서 "
저분은 인생이 잘 풀렸고, 저분은 안 풀렸지요" 하고 말하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죽음 앞에서는 잘 풀렸느냐 아니냐가 아무것도 아닙니다. 둘 다 같은 자리로 갑니다.

만약 그 이후가 서로 달랐다면 인생이 어떻게 풀리느냐가 중대한 문제였겠지만, 이 땅의 형통과 불행은 죽음과 함께 사라지는 문제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23편은 "
인생이 풀리는 것"에 대한 시가 아닙니다. 이 시는 훨씬 깊은 곳을 말하고 있습니다.

1절의 "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를 우리는 이렇게 읽습니다. "하나님이 내가 원하는 것을 다 채워 주시겠다는 말이지."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하나님이 오늘부터 매일 당신이 원하는 것을 채워 주신다고 해 봅시다. 그러면 "
나는 부족함이 없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올까요?

작은 아파트에 사는 부부가 있습니다. 십 년을 모아 드디어 30평대로 이사했습니다. 이사하던 날 밤, 부부는 빈 거실 바닥에 누워 "
이제 소원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몇 달 뒤 같은 동 다른 층에 사는 이웃이 더 넓은 평수로 인테리어를 마쳤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 순간 기쁨이 슬그머니 빠져나갑니다. 소원이 없다던 마음에 다시 소원이 생깁니다.

우리는 늘 이렇게 삽니다. 내 손에 쥔 것을 바라보다가 옆 사람과 비교하고, 나보다 더 나은 것을 가진 사람을 보면 부족함을 느낍니다. 가뭄에 내린 이슬비처럼 만족은 순식간에 말라 버립니다. 욕심은 채워지는 만큼 자라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다윗의 고백은 "
앞으로 내 필요가 다 채워질 것"이라는 미래의 기대가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의 고백입니다. "지금 여호와가 나의 목자시니, 지금 나는 부족함이 없다." 다윗은 어떻게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요? 자기 형편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여호와가 누구신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말씀의 순서를 보십시오. 첫 문장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입니다. 부족함이 없다는 것은 결과이고, 목자이시라는 것이 이유입니다. 이유를 건너뛰고 결과만 가지려 하니 시가 오해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목자와 양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 생각해 봅시다. 양은 눈이 좋지 않고 방향 감각이 약하며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는 짐승입니다. 길을 잃으면 제자리에서 울기만 합니다. 그래서 양의 삶은 전적으로 목자에게 달려 있습니다. 목자는 양을 푸른 풀밭에만 데려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맹수로부터 지키고, 한순간도 양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길이 험하면 앞장서서 걷습니다. 양은 목자가 걷는 길이 자갈밭이든 비탈이든 따라갑니다. 목자가 자기를 해로운 곳으로 이끌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정말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 있습니까? 입으로는 "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고백하면서, 정작 그 자리에 돈이 앉아 있지는 않습니까? 통장 잔고가 줄어들면 잠을 못 이루는 이유는, 마음의 목자가 돈이기 때문은 아닐까요? 자존심이 목자일 때 우리는 무시당하는 순간 무너집니다. 권력이 목자일 때 우리는 자리를 잃는 순간 길을 잃습니다. 입술로는 여호와를 부르지만 삶은 다른 목자를 따라가고 있을 수 있습니다.

더 아픈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말하지만, 실은 좋은 것을 주시기를 막연히 기대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문제의 뿌리는 우리의 관심이 언제나 육신에서 떠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의 나에게는 깊이 집착하면서, 하나님 나라에서의 나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하지 않습니다. 몸이 살아남는 일에는 온 힘을 다하면서, 영혼이 잘되는 일에는 무관심합니다. 그러니 목자께서 이끄시는 길이 내 기대와 다를 때마다 불만이 터집니다.

그렇다면 질문은 이것입니다. 지금 내 형편을 바라보며 "
부족함이 없다"는 기쁨의 노래가 나옵니까? 이 노래는 감정을 억지로 쥐어짠다고 나오지 않습니다. 목자 되신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어디로 인도하시는지를 알고, 그곳을 향해 눈과 마음이 돌려질 때 비로소 터져 나옵니다. 그때에는 현재의 형편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이 노래가 가능해집니다.

2절은 말합니다. "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욕심의 눈으로 보면 푸른 초장은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이 풍성한 곳입니다. 큰 집, 안정된 직장, 아픈 데 없는 몸,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당신의 목자이시고 목자는 양을 푸른 초장에 눕히시는 분이라면, 당신은 지금 이미 푸른 초장에 누워 있어야 합니다. 20년, 30년을 믿었는데 아직도 "푸른 초장에 가는 중"이라면 말이 안 됩니다. 그것은 지난 수십 년 동안 한 번도 목자 되신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을 누려 보지 못했다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불편한 진실과 마주합니다. 내가 하나님이 가리키시는 방향으로 가지 않고 내가 원하는 길을 걸어왔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푸른 초장이 어디인지는 3절이 가르쳐 줍니다. "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목자께서 이끄시는 곳은 흙으로 돌아갈 육신을 위한 길이 아니라 영혼이 살아나는 길, 곧 의의 길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하나님 자신의 이름을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의의 길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죄로 죽은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킬 수 있는 의로우신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뿐입니다. 그러니 푸른 초장은 어떤 장소나 환경이 아닙니다. 푸른 초장은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목자 되신 하나님은 자기 양을 끝내 예수 그리스도께로 데려가십니다.

양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소식입니까? 양이 해야 할 일은 없습니다. 목자가 이끄시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의는 그리스도께 있고, 그 의 안에 영혼을 소생시키기에 충분한 모든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
내게 부족함이 없다"고 노래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4절의 노래도 이해가 됩니다. "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다윗이 골짜기를 피해 가겠다고 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하십시오. 골짜기로 다닐지라도라고 합니다. 성도의 길에도 골짜기는 있습니다. 갑작스러운 진단서, 직장에서의 해고, 사랑하는 사람의 장례, 하나님이 목자라고 해서 이 길이 면제되지 않습니다.

한 성도가 있습니다. 남편이 암 진단을 받고 일 년을 투병하다 떠났습니다. 장례를 치르고 돌아온 날 밤, 그 성도는 불 꺼진 거실에서 예배 때마다 불렀던 찬송을 웅얼거립니다. 기도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어둠 속에서도 한 가지만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이 골짜기에서도 나는 혼자가 아니다. 나를 끌고 가시는 분이 계신다. 아픔이 없어서가 아니라, 목자께서 함께 걸으신다는 사실이 그 사람을 붙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골짜기가 없다고 우기는 것이 아닙니다. 골짜기 한가운데서도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목자가 곁에 계신데 어떤 골짜기가 두렵겠습니까?

우리가 처한 형편이 어떠하든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는 영혼이 소생하는 의의 길로 지금도 인도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의 삶이 남보다 못하고 고생과 어려움으로 가득해 보여도, 그 모든 것조차 나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시려는 하나님의 인자하심 안에 있다고 믿는 것, 이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그래서 5절과 6절의 노래가 터져 나옵니다. "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 말은 형편이 넉넉하다는 자랑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영혼이 이미 충만하다는 고백입니다. 원수의 목전에서도 식탁이 차려지고, 평생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뒤를 따르며, 마침내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게 되는 것, 이것이 목자의 인도를 받는 양의 평안입니다.

그러니 이 노래가 오늘 당신의 노래가 되려면 무엇이 필요합니까? 더 많은 것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목자 되신 여호와가 어떤 분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분이 이끄시는 푸른 초장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푸른 초장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의는 그분께만 있고, 죄로 죽은 우리는 그분 안에서만 영혼이 소생하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소생되는 일에 마음을 둔 사람만이 형편과 상관없이 이렇게 노래할 수 있습니다. "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 기쁨의 노래가 이번 한 주 당신의 입술에도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