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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속으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by HappyPeople IN JESUS 2025. 6. 23.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태복음 5장 4절)

세상이 보기엔 이상한 말입니다. 애통함이 복이라니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애통함을 피하고자 살아갑니다. 누구도 기꺼이 가슴을 치며 울기를 원하지 않고,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기보다 감추고자 애씁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애통함은 때때로 ‘
믿음이 약한 증거’로 오해받곤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분명히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단지 인생의 고통을 겪는 자들을 위로하려는 감상적인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지금 하늘의 복을 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들의 정체성과 상태, 즉 복 있는 사람의 모습을 말씀하시는 중입니다. 그러니 ‘
애통함’이란 단어는 곧,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에 반드시 동반되는 영적 실재라는 뜻입니다.

과연 ‘
좋은 사람’으로 사는 것이 복일까요? 한때 우리는 착하게 살고, 타인을 위해 봉사하며, 정의를 추구하는 삶이 곧 기독교 신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치 가난한 이들의 벗이 되고 약자의 대변자가 되면 복을 받는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살면 세상은 조금씩 더 나아지고, 하나님도 기뻐하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산상수훈 앞에서, 그런 확신은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 이것은 우리가 생각했던 정의롭고 강한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자신이 철저히 무너지고, 자신의 내면의 썩은 냄새에 몸서리치며 울부짖는 사람을 복되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때 비로소 복 있는 자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이 아니라, 먼저 자신의 무능함과 죄악을 철저히 통곡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애통하다’는 말은 단순히 슬퍼한다는 의미를 넘어서 있습니다. 헬라어 '펜쏘운테스'는 죽은 자를 애도하며 통곡하는 깊은 슬픔을 말합니다. 애통은 겉치레 눈물이 아닙니다. 가슴이 찢어지고,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은 절망의 외침입니다.

하지만 이 애통은 세상의 실패나 손실로 인한 통곡이 아닙니다. 이것은 바로 자신의 죄에 대한 통곡입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추악한지, 겉은 그럴듯한데 속은 시체 냄새가 진동한다는 사실을 뼛속까지 깨달을 때 나오는 눈물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랬습니다. 그는 과거 자신을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후 그는 고백합니다.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딤전1:15) 그는 예수님을 더 깊이 알아갈수록 자신의 더러운 실체를 더욱 처절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로마서 7장에서 그는 절규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진정한 성도는 신앙이 깊어질수록 자신이 얼마나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습니다. 신앙의 성숙은 교양 있는 신자가 되어가는 과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참담한 자기 인식 속에서, 더 깊은 눈물과 애통이 솟구치는 길입니다. 그것이 바로 복 있는 자의 모습입니다.

놀라운 것은, 예수님이 바로 이 애통함을 ‘
’이라 부르신다는 사실입니다. 왜일까요? 애통함 자체에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 애통을 통해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기 때문입니다.

애통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위로는 세상의 위로와 다릅니다.
“괜찮아,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거야”라는 식의 인위적인 위로가 아닙니다. 이 위로는 십자가에서 이미 완성된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애통함을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우리의 눈물을 아시고, 친히 울어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로 인해 땅에 엎드려 피땀 흘리며 기도하셨고, 마침내 골고다에서 우리 대신 심판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애통하는 자는, 자기 죄를 바라보며 부서지는 자는, 반드시 십자가의 위로 앞에 무릎 꿇게 됩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7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위로는 회개를 통하여 오며, 회개는 애통하는 심령에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자주 복을 오해합니다. 성공, 문제 해결, 평안한 삶, 이것들이 복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가 그런 현실을 누리는 데 목적을 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자신을 찬송하게 하기 위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성도의 삶의 목적은, 자신의 죄인 됨을 올바로 직시하고, 주님의 은혜 없이는 한 순간도 설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도는 복 있는 사람이 아니라,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복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 자체입니다. 성도의 눈물이 의미 있는 이유는, 그 눈물이 하나님께 닿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시편 34:18)

그러므로 진정한 설교는 성도를 울리는 말씀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날선 검 같아서 우리의 속을 꿰뚫고, 감추어진 죄를 드러냅니다. 설교는 우리로 하여금 자아의 껍데기를 깨부수게 하고, 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위로를 맛보게 해야 합니다. 그 위로는 고요한 평안이 아니라, 복음의 능력이며 십자가의 치유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십자가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 앞에서 웃는 자가 아니라, 우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자신의 죄에 애통하며 눈물짓는 자가 진정으로 위로를 경험합니다. 그 위로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위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살아 있는 위로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이 말씀이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현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