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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말씀 묵상

애통하는 자에게만 약속된 위로

by HappyPeople IN JESUS 2025. 11. 12.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태복음 5:4)

세상은 “
슬퍼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웃어라, 긍정하라, 행복해야 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정반대로 말씀하십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 이 말씀은 언제 들어도 낯섭니다. 세상이 말하는 복은 기쁨과 성공, 위로와 평안에 있는데, 예수님은 왜 슬픔, 왜 눈물, 왜 애통 속에서 복을 보셨을까요?

진짜 애통이란 무엇인가? 성경에서 말하는 ‘
애통’은 단순한 감정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죽음을 슬퍼할 때 흘리는 눈물보다 더 깊고, 마음의 가장 밑바닥에서 끓어오르는 통곡과 같습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 안에서 가장 강한 비애의 언어로 사용됩니다. 즉, 단순히 세상의 불행을 안타까워하는 수준이 아니라, 자신의 죄,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현실을 인식한 자의 슬픔입니다.

하나님, 제가 이렇게도 주님을 모른 채 살았군요.” 이 깨달음에서 터져 나오는 절규, 그것이 애통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복은 바로 이 눈물을 말합니다. 자신의 무너짐을 보고 우는 자, 죄 때문에 애통하는 자,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음을 아는 자에게 임하는 복. 그런 자에게만 하나님이 위로하신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한때는 “
행복한 신앙생활”이 목표였습니다. 주일 성수하고 십일조 잘 하면 하나님께서 복 주시고, 기도 열심히 하면 병 낫고, 자녀 잘 되고, 사업 번창하는 것, 그게 신앙의 열매라 믿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예수님의 이 말씀 앞에서 멈춰 섰습니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

그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습니다.내가 믿었던 복음이 완전히 반대로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이 복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눈물을 멈추는 것이 복이라 믿었는데, 예수님은 눈물 흘리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내가 믿고 있던 신앙은 복음이 아니라 종교였다는 것을 말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내 욕망이 만들어 낸 신을 믿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자기 영혼의 빈곤을 아는 사람입니다. 나는 괜찮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 내 안에는 선이 없고, 의가 없고, 오직 은혜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한 사람입니다.

그런 깨달음이 깊어질수록, 우리 안에는 자연스레 애통이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이제야 비로소 내가 어떤 존재인지 보이기 때문입니다. 빛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그림자는 더 짙어지듯이 예수님의 거룩한 빛 앞에서 나는 철저히 드러납니다.

"하나님, 저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바울이 마지막 생애에 그렇게 고백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점점 더 ‘겸손해진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자신의 실체를 정확히 본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더 깊이 애통하게 됩니다.

왜 애통이 복인가? 애통은 절망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로 향하는 통로입니다. 자신의 죄와 무능함 때문에 애통할 때, 그 눈물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의 위로는 감정을 달래주는 위로입니다. “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그러나 하나님의 위로는 다릅니다. 그분은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실 뿐 아니라, 눈물의 이유를 없애주십니다. 즉, 죄와 사망의 원인을 제거하시고 그 자리에 새 생명을 심어 주십니다.

그래서 “
애통하는 자는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는 말씀은 단순한 위로의 약속이 아니라, 구원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애통하는 자를 그냥 위로하지 않으시고, 그의 영혼을 새롭게 하십니다. 그 눈물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통로가 됩니다.

진정한 위로는 십자가에서 옵니다. 예수님은 슬픔을 모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십자가 위에서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부르짖으며 하나님께 버림받는 애통을 겪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단절되어 울고 있을 때, 그분은 이미 우리의 애통보다 더 깊은 애통 속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애통은 더 이상 절망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애통이 우리의 애통을 품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분 안에서만 진짜 위로가 가능합니다.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이 위로는 상황의 해결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화해, 관계의 회복, 다시 하나님 품으로 돌아가는 안식입니다.

오늘날 많은 신앙이 ‘
웃음의 신앙’으로 변질되었습니다. 기쁨만을 추구하고, 성공을 복이라 여기며, 눈물은 실패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진짜 복음은 우리를 웃게 하기 전에 먼저 울게 만듭니다. 죄 때문에, 나의 무지 때문에, 하나님을 몰랐던 지난 시간 때문에 말입니다. 그 눈물을 통과한 자만이 참된 위로, 참된 기쁨을 맛봅니다. 십자가는 먼저 우리를 무너뜨리고, 그 다음에 살려내십니다. 그래서 애통은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그곳에서 복음이 시작됩니다.

"나는 언제 마지막으로 하나님 앞에서 눈물 흘렸는가? 내 눈물은 세상의 억울함 때문인가, 아니면 내 죄 때문인가? 예수님 앞에서 나의 자아인식은 점점 낮아지고 있는가? 세상의 위로보다 하나님의 위로를 더 구하고 있는가?"

하나님은 눈물이 없는 사람보다, 눈물로 무릎 꿇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분의 위로는 세상의 성공보다 더 깊고, 잠시의 평안보다 더 영원합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그 복은 지금도, 그 눈물 위에 자라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