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에베소서 1:3~7)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을 쉽게 사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본 적은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단순히 인간이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바르게 아는 데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신실하심, 인자하심, 그리고 무엇보다 그 사랑하심을 아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의 출발입니다.
에베소서 1장은 그 영광의 실체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특히 오늘 우리가 묵상할 6절과 7절은 하나님의 영광이 어떻게 죄인인 우리에게 실제가 되었는지를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바울은 이 구원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다.” 이 짧은 구절 안에 복음의 심장이 뛰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인입니까?” 이 질문 앞에서 어떤 이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네,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겸손해 보이는 이 대답은 사실 복음을 오해한 고백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은 노력 중인 사람이 아니라, 이미 은혜 안에 숨겨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하면 구원받는다”고 가르치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만약 인간이 가르침만으로 구원받을 수 있었다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릴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수천 년을 사시며 도덕 교사로 머무르시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는 교육으로 고쳐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원의 방법을 설명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그분 자신이 구원의 방법으로 오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책이 아닙니다. 이미 주어진 구원이 어떤 대가로, 어떤 사랑으로, 누구 안에서 우리에게 왔는지를 증언하는 책입니다.
구속의 출발점은 ‘죄 사함’입니다. 구원에 이르기까지 가장 큰 장애물은 언제나 하나였습니다. 바로 죄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벽을 세웠고, 그 벽은 인간의 노력으로는 결코 무너뜨릴 수 없었습니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다”(사 59:2). 그래서 바울은 구속을 말하면서 “구속 곧 죄 사함”이라고 표현합니다. 구속은 단순히 죄 사함에 그치지 않습니다. 장차 우리의 몸이 영화롭게 되는 것까지 포함하는 크고 풍성한 개념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구속의 여정은 죄 사함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죄의 용서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에게 구원은 의미가 없습니다. 죄에 대한 자각이 없는 사람은 은혜를 갈망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는 감정의 위로에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죄의 자각에서 출발합니다.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하는가? 바로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입니다. 그리고 그 진노는 우리의 죄 때문에 임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용서한다”는 한마디로 죄를 끝내지 않으셨을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이 공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그냥 덮을 수 없는 분이십니다. 죄에는 반드시 대가가 요구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거룩한 공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대가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받으셨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가 포기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자리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 자리입니다.
죄인은 원래 십자가에 달려야 했습니다. 그 자리는 우리가 서야 할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아들을 그 자리에 세우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그분께 전가하시고, 그분을 죄로 삼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의로우시면서도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분이 되셨습니다.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바울은 일부러 “그리스도 안에서” 대신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왜일까요?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분명히 말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단순한 구원자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영원 전부터 사랑하시던 독생자이십니다. 하늘이 열리고 들린 음성,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그 사랑받던 아들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영광의 보좌를 떠나, 구유의 짚더미 위에 누우셨습니다.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조롱받고, 침 뱉음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버지와의 단절을 경험하며 외치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은 아시면서도 허락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더 놀라운 진리는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그 아들을 사랑하시는 그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라”(요 17:23). 우리는 여전히 연약하고 부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보실 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로 보십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미 “사랑받는 자”입니다. 노력해서 되는 신분이 아니라, 선물로 주어진 신분입니다.
구원은 항복으로 누리는 선물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말합니다. “나는 아직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기엔 부족해.” “좀 더 나아지면 그때…” 그러나 복음은 말합니다. 지금 그분 안으로 숨으라. 그리스도인은 열심히 올라가는 사람이 아니라,이미 십자가 아래에서 항복한 사람입니다. 그 항복 안에서 순종이 나오고, 그 은혜 안에서 변화가 시작됩니다. 구원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주어진 완성된 선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도 그 은혜 앞에서 고백할 뿐입니다. “주님, 오직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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