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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으로 사는 삶

여한 없는 삶, 그 너머의 평안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7. 2.

시골 교회의 원로장로였던 이 장로는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서도 매주 새벽기도회에 가장 먼저 나와 불을 켜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해 겨울, 함께 새벽 예배를 드리던 젊은 목회자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장로님, 이렇게 오래 사시면서 아쉬운 게 없으세요?" 이 장로는 잠시 창밖의 어둠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웃으며 말했습니다. "이제는 오늘 밤에 주님이 부르셔도 여한이 없네요."

그 말은 허세도, 체념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삶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말의 무게를 알았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회사원으로 시작해 사업체를 일으켰고, 한때는 지역 정치에도 몸담아 지방의원을 지냈습니다. 예술 단체를 이끌기도 했고, 대학 강단에도 섰고, 책도 몇 권 펴냈습니다. 공기업 임원 자리까지 거쳤으니,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이력을 두루 갖춘 셈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가 지금 담담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화려한 이력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이 장로는 종종 젊은 성도들에게 자신의 사십 대 이전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습니다. "
그때 나는 진흙탕 속의 미꾸라지 같았어요. 무언가를 더 갖고 싶고,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 싶은 욕심에 늘 허우적거렸지요." 사업이 잘될 때는 더 큰 사업을 꿈꾸었고, 직함을 얻으면 더 높은 직함을 원했습니다. 남들이 보기엔 성공한 인생이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늘 결핍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무언가를 이루어도 만족은 잠시뿐, 곧 새로운 갈증이 찾아왔습니다.

그것은 비단 이 장로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전도서의 기자는 온갖 부귀와 권세와 지혜를 다 누려본 후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를 돌이켜 보니 모두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하도다"(전도서 2:11). 인생의 모든 것을 손에 넣어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백이었습니다. 성취가 부족해서 공허한 것이 아니라, 성취 그 자체로는 결코 채워질 수 없는 갈망이 인간 안에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이 장로에게도 전환점이 있었습니다. 이십여 년 전, 인생의 후반부를 준비하며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돌아보던 시기였습니다. 죽음을 깊이 묵상하던 어느 날 밤, 그는 자신이 살아온 세월이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졌다고 고백했습니다. "
그때는 억울했어요. 지금 죽는다면 너무 억울해서 눈을 감을 수 없을 것 같았지요." 이룬 것은 많았지만, 그 모든 것이 죽음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마주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자신의 옛 삶을 돌아보며 했던 고백과 닮아 있습니다. 바울은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였지만, 그리스도를 만난 후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빌립보서 3:7~8). 바울에게도 옛것을 해로 여기게 된 것은 자기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만난 은혜의 결과였습니다.

이 장로는 그 이후로 삶의 방식을 크게 바꾸었습니다. 마음을 다스리는 훈련에 힘쓰며 조금씩 달라져 갔고, 사십 대 중반을 지나면서는 예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더 갖고 싶은 것도, 더 되고 싶은 것도 사라졌습니다. 작은 집 한 채, 낡았지만 굴러가는 자동차, 곁을 지켜주는 아내, 이만하면 충분하다는 마음이 그를 채웠습니다. 그러나 이 장로가 나이 들어 신앙이 깊어지면서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얻은 그 평안이 스스로 수양하여 만들어낸 성취가 아니라, 결국은 하나님이 그에게 허락하신 은혜였다는 사실입니다.

바울도 같은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립보서 4:11-13). 바울의 자족은 감옥 안에서 나온 고백이었습니다. 상황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었기에 가능한 평안이었습니다.

이 지점이 이 장로가 성도들에게 가장 힘주어 나누던 부분이었습니다. "
명상으로 마음을 다스리는 것도 귀한 훈련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진짜 평안에 이를 수 없더군요. 내가 아무리 마음을 비워도, 결국 그 마음을 붙들어주시는 분이 계셔야 흔들리지 않습니다." 인간의 수양과 훈련은 마음의 표면을 잔잔하게 할 수는 있어도, 죽음이라는 궁극의 두려움 앞에서 참된 평강을 주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은혜라는 것입니다.

이 장로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인상 깊었습니다. "
여한이 없다는 것과, 소망이 있다는 것은 달라요. 여한이 없다는 건 '이만하면 됐다'는 만족이지만, 소망이 있다는 건 그 너머에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지요."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단지 체념이나 달관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사도 바울처럼 이 땅의 삶이 끝이 아니라 더 나은 본향으로 가는 여정임을 믿었습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립보서 1:21)는 고백이 그의 삶에도 새겨져 있었습니다.

세상은 많은 것을 이루고, 많은 것을 소유하고, 부족함 없이 살다가 미련 없이 떠나는 삶을 성공한 인생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참된 여한 없음은 이룬 것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어도,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어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이미 가장 귀한 것을 소유한 자입니다. 이 장로의 평안은 그가 다 이루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게 하신 은혜를 만났기 때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