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립보서 3:8)
어느 교회에 김 집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남들보다 앞서야 한다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사업을 시작했고, 그 사업이 조금씩 커질 때마다 그는 더 큰 것을 붙잡으려 했습니다. 매출이 오르면 다음 목표를 세웠고, 목표를 이루면 또 다른 목표를 세웠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직분을 맡으면 더 높은 자리를 바라보았고, 인정받으면 더 큰 인정을 원했습니다. 겉으로는 열심 있는 신앙인처럼 보였지만, 그의 속마음은 늘 전쟁터 같았습니다. 무언가를 잃을까 봐 두려웠고, 남보다 뒤처질까 봐 조바심이 났습니다.
그러던 어느 해, 그가 붙잡고 있던 사업이 흔들렸습니다. 오랫동안 공들인 거래처가 등을 돌렸고, 믿었던 동업자가 떠났습니다. 김 집사는 밤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했지만, 사실 그 기도의 대부분은 "이것만은 지켜주세요"라는 애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정작 사업이 완전히 정리되고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된 순간부터 그는 오히려 숨을 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붙잡을 것이 없어지자, 비로소 붙잡고 있던 손의 힘이 얼마나 그의 목을 조르고 있었는지가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마음의 상태를 낯설어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자신이 한때 자랑으로 여겼던 모든 것인 혈통, 신분, 율법적 의로움을 모든 괴로움은 집착으로부터 비롯된다는 통찰과 놀랍도록 닮은 고백으로 풀어냅니다. 바울은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말했습니다(빌 3:8). 그가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를 얻은 것이 그 모든 것을 붙잡고 있던 손보다 훨씬 크고 귀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집착은 종종 우상숭배의 다른 이름으로 불립니다. 우상이란 반드시 나무나 돌로 만든 형상만이 아닙니다. 마음이 어떤 대상에 고정되어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여기는 순간, 그 대상은 이미 우상의 자리에 올라선 것입니다. 돈이든, 명예든, 사람이든, 심지어 사역의 성공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재물을 팔아 나누어주라고 하신 것도(마 19:21), 그의 재물이 악해서가 아니라 그의 마음이 그 재물에 붙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청년은 근심하며 떠났습니다. 붙잡은 손을 펴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마 6:34). 이 말씀은 단순히 낙천적으로 살라는 권면이 아닙니다. 내일을 붙잡으려는 마음, 결과를 통제하려는 마음이 오늘의 평안을 갉아먹는다는 것을 정확히 짚어주시는 말씀입니다. 수험생이 시험 결과에 집착할수록 공부하는 과정 자체가 괴로워지듯, 그리스도인이 삶의 결과에 집착할수록 오늘 하루를 살아내는 믿음의 발걸음이 무거워집니다.
누가복음의 어리석은 부자 비유도 같은 맥락입니다(눅 12:16~21). 그는 곳간을 더 크게 지으며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고 말했지만, 그날 밤 하나님은 그의 영혼을 도로 찾으셨습니다. 그가 쌓아둔 것은 그의 것이 아니라 그가 붙잡고 있던 것이었을 뿐입니다. 손에 쥔 것이 많을수록 오히려 그는 자신의 영혼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신앙인의 열심과 하나님 나라를 향한 거룩한 갈망까지 모두 내려놓으라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서 모든 것을 버렸다고 말한 직후,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4)고 고백합니다. 그는 내려놓았지만 멈추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힘차게 달려갔습니다.
여기에 신앙적 분별의 열쇠가 있습니다. 세상적 집착은 불안과 조바심과 분노를 낳지만,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갈망은 평안과 인내와 소망을 낳습니다. 집착은 결과를 자신이 통제하려 하지만, 믿음의 열심은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고 과정에 최선을 다합니다. 디모데후서에서 바울이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 4:7)라고 말할 때, 그것은 집착의 언어가 아니라 순종하는 자의 담대한 고백입니다.
김 집사는 훗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제가 그렇게 붙잡고 있을 때는 하나님이 주시려는 것을 받을 손이 없었습니다." 손에 무언가를 꽉 쥐고 있으면, 하나님이 더 좋은 것을 주시려 해도 받을 자리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단 위에 올려놓았을 때(창 22장), 그것은 아들을 잃으라는 명령이 아니라, 가장 소중한 것조차 하나님보다 앞세우지 않겠다는 믿음의 시험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손을 편 순간, 아브라함은 이삭도 다시 받았고 더 큰 약속도 받았습니다.
전도서 기자는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라고 탄식했지만, 그 탄식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해 아래에서 붙잡을 수 있는 것은 결국 다 지나간다는 것을 깨달을 때, 해 위에 계신 분을 바라보게 됩니다. 붙잡았던 손을 펴는 것은 상실이 아니라, 더 큰 것을 받기 위한 준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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