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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나라

영계와 묵시 - 왜 우리는 이렇게 창조되었는가

by HappyPeople IN JESUS 2025. 12. 24.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로마서 11:36)

인간은 아플 때 비로소 멈춰 섭니다. 몇 달 전 눈에 부스럼이 나 극심한 고통 속에 방 안에 누워 있던 썬다 싱의 모습은, 바쁘게 살아가다 문득 삶이 정지되는 우리의 모습과도 닮아 있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연약해진 자리에서 그가 붙든 것은 오직 기도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의 자리에서 하나님은 영계를 여시고, 창조의 깊은 목적을 조용히 보여 주셨습니다.

썬다 싱이 천사들에게 물었습니다. “
당신들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그 대답은 인간의 자랑과 명예를 정면으로 무너뜨립니다. “우리는 새 이름을 받았으나, 주님과 받은 자 외에는 아무도 모릅니다.” 이 땅에서 이름은 중요합니다. 직함, 학력, 업적, 명성은 사람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하늘에서는 다릅니다. 이름이 드러날수록 영광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옮겨질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사들과 성도들은 자신이 누구였는지, 무엇을 이루었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오직 한 가지, 하나님과 사랑의 교제 안에 있다는 사실만이 존재 이유가 됩니다. 이는 마치 무대 뒤에서 조명을 조절하는 스태프와 같습니다. 관객은 배우의 얼굴만 보지만, 스태프는 자신이 보이지 않기를 원합니다. 조명이 자신에게 쏠리는 순간, 공연은 망가지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의 질서는 이와 같습니다. 창조의 목적은 ‘
드러남’이 아니라 ‘찬미’입니다.

천국에서는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있습니까?” 성도의 대답은 단순하면서도 깊습니다. “바다가 물로 가득한 것처럼, 온 우주는 하나님으로 충만합니다.” 하나님은 특정한 장소에 국한된 분이 아닙니다. 마치 물속에 잠긴 사람이 위아래, 좌우 어디를 보아도 물뿐인 것처럼, 하늘에서는 어디서나 하나님의 임재를 느낍니다. 그러나 중요한 진리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형상 안에서만 보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하늘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각 사람의 영적 성숙, 곧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
수용량’에 따라 그리스도의 영광이 다르게 나타납니다. 어린 아이에게는 강한 햇빛이 눈부신 것처럼, 아직 준비되지 않은 영혼에게 하나님의 충만한 영광은 감당할 수 없는 부담이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각 영혼의 상태에 맞게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말씀을 억지로 많이 안다고 성숙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이 자라날 때, 계시는 깊어지는 것입니다.

썬다 싱은 하늘의 거리 개념에 대해 질문합니다. 대답은 놀랍습니다. “하늘에는 거리가 없습니다. 생각하는 즉시 그곳에 있습니다.” 물질 세계에서는 시간이 필요하고 이동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영의 세계에서는 사랑과 갈망이 곧 이동입니다. 누군가를 보고 싶어 하면 이미 그 앞에 서 있게 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공간 개념이 아니라 관계의 원리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멀고 가까움이 물리적 거리가 아니라 영적 친밀함으로 결정됩니다. 이 땅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교회에 앉아 있어도 마음은 천 리 밖에 있을 수 있고, 멀리 떨어져 있어도 기도로 깊이 연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은 많은 이들에게 걸림돌이 됩니다. “
때가 아니었는데 왜 저주하셨는가?” 하늘의 대답은 명확합니다. “그 목적은 달성되었습니다. 열두 배로.” 열매를 맺지 못한 나무는 나무로서의 목적은 실패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나무는 전 인류를 향한 경고와 교훈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더 큰 목적을 위해 작은 목적이 희생된 것입니다.

이는 사람의 삶에도 해당됩니다. 어떤 사람은 실패한 인생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실패를 통해 수많은 사람이 깨어난다면, 그 생애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외형적 성공이 아니라 창조 목적에 합당한 열매입니다. 겉으로는 종교적 열심과 성취가 넘쳐 보이지만, 회개와 사랑의 열매가 없다면 그것은 결국 속임에 불과합니다. 주님은 시기를 따지지 않으십니다. 선행과 열매의 때는 언제나 ‘
지금’인 것입니다.

썬다 싱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질문합니다. “
왜 처음부터 완전하게 만드시지 않으셨습니까?” 천사의 대답은 인간 존엄의 핵심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기계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별처럼 정해진 궤도만 도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행위자로 창조하셨습니다. 강요된 순종은 참된 순종이 아닙니다. 선택 없는 완전은 사실 불완전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고통과 갈등 속에서도 하나님을 선택함으로써, 비로소 사랑의 관계 안으로 들어오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땅의 고난은 낭비가 아닙니다. 고통 속에서만 영혼은 단련되고, 자유의지는 하나님을 향해 성숙해집니다. 결국 하늘에 이른 성도들은 이 땅의 고난을 후회하지 않고 오히려 감사하게 됩니다. “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마지막으로 성도는 말합니다. 하늘의 존재들조차 놀란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죄인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사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은 영원 전에는 숨겨진 비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말로 사랑을 증명하지 않으셨습니다. 몸으로, 피로, 죽음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이것이 창조 목적의 정점입니다. 만물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자기 비움인 것입니다. 지금도 온 피조물은 탄식하며 기다립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날 때, 곧 창조 목적이 완성될 그 날을 기다립니다.

썬다 싱은 말합니다. 영적 경험은 설명만으로 전달되지 않습니다.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오해를 낳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우연히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각자의 생애에는 하나님이 정하신 목적이 있습니다. 이 땅에서 그 목적을 충실히 감당한 자만이, 후회 없이 아버지의 집에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자리에서, 은혜를 구하며, 맡겨진 사명을 살아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곳에 들어가야 할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지금 이 삶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로마서 8:1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