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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 신앙

영광의 왕을 맞이하는 의식의 의미

by HappyPeople IN JESUS 2025. 8. 22.

시편 24:1~10

1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2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3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4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5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6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셀라)
7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8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9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10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셀라)

시편 24편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읽을 수 있습니다. 먼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찬양(1~2절), 이어서 거룩한 산에 오를 자의 조건을 묻는 성전 입장의식 노래(3~6절), 마지막으로 영광의 왕을 환영하는 찬송(7~10절)이 그것입니다. 이 노래는 단순한 시가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실제로 불렀던 의식의 찬송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노래하며 행진했고, 또 이 찬양 속에서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과 사명을 새롭게 확인했습니다.

우리는 종종 '
의식'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형식적이거나 비실용적인 것으로 여깁니다. 실제로도 많은 사람이 의식을 쓸모 없는 행사, 혹은 보여주기 위한 전통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의식을 무가치한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의식을 통해 보이지 않는 진리와 하나님 나라의 정체성을 선포합니다.

시편 24편은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라는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고백은 단순한 진리가 아니라 예배의 기초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모든 의식은 ‘세상 만물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궤를 메고 성전으로 올라가며, 단순히 나무 상자를 모시는 것이 아니라 만물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맞이한다는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의식은 단순한 절차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3절) 이 질문은 우리를 멈춰 세웁니다. 하나님을 향한 찬양은 단지 입술로만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삶의 진실함을 요구합니다.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청결하며, 헛된 우상에 마음을 두지 않고, 거짓 맹세하지 않는 자, 이것이 하나님 앞에 설 자의 조건입니다. 의식은 결코 껍데기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의식은 삶의 태도를 점검하는 자리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삶에서 그분의 거룩을 반영해야 한다는 경고이자 권면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예배당 문을 열며 이 질문을 들어야 합니다. “
나는 누구의 마음으로, 어떤 손으로 주님 앞에 서는가?” 의식은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중요한 도구입니다.

마지막으로 시편은 장엄한 외침으로 마무리됩니다.
"문들아 머리를 들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이 구절은 단순히 건물의 문을 열라는 말이 아니라, 공동체가 하나님을 모셔 들이며 온 마음으로 환영하는 의식이었습니다. 영광의 왕은 누구입니까? 전쟁에 능하신 여호와, 만군의 주이십니다.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모시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올 때, 그들은 단순히 전리품을 들여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모시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의식의 힘입니다. 사람은 의식을 통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눈앞에 더 생생히 느끼고, 공동체적으로 그분의 통치를 고백합니다.

우리는 종종
"의식은 실용적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산 정약용이 했던 말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그가 꽃을 기르는 것을 두고 “열매도 없는 꽃을 왜 키우느냐, 실용적이지 않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때 다산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맹자는 ‘대체를 기르면 대인이 되고, 소체를 기르면 소인이 된다’고 했다. 꼭 목구멍으로 삼켜야만 실용인 것은 아니다.

예배와 의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앞에 직접적인 이익이 없더라도, 그것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의 영광을 높이며, 우리의 존재 목적을 새롭게 합니다. 이것은 계산할 수 없는 유익이며, 영원한 의미를 가진 실용입니다.

의식은 본질이 아닙니다. 그러나 의식은 본질을 향하도록 돕는 도구입니다. 예배의 순서, 성찬의 떡과 잔, 세례의 물, 교회의 절기, 이 모든 의식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끌며,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현실을 선명히 드러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의식을 통해 의식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가 하는 것입니다. 의식 자체에 매이는 것도 문제지만, 의식을 가볍게 여기고 무가치하게 치부하는 것도 위험합니다. 우리는 예배의 자리에서, 말씀을 펴는 의식, 기도하는 의식, 찬송하는 의식을 통해 영광의 왕이신 주님을 모시고 환영하는 사람들입니다.

시편 24편은 단순한 찬송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을 선포하는 의식의 노래입니다. 우리는 이 찬양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께 속한 존재임을 고백하고, 거룩한 삶으로 주님 앞에 설 것을 다짐하며, 영광의 왕을 마음과 공동체 가운데 맞이합니다.

의식은 실용적이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영원한 가치를 드러내는 거룩한 도구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예배가 형식으로 끝나지 않고, 의식의 이유 되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자리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