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유 없이 마음이 무거울 때가 있습니다.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고, 큰일이 생긴 것도 아닌데 갑자기 눌린 듯 기쁨이 사라지고, 숨조차 답답해질 때가 있습니다. 성경을 펼쳐도 글자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고, 기도하려 해도 말이 막히는 경험 말입니다. 이런 상태를 “영의 짓누름”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시는 영의 부담은 다릅니다. 부담은 무겁지만, 그 안에 언제나 빛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기도해야겠다든지, 어떤 일을 순종해야겠다는 분명한 방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부담 속에는 이상하게도 평안과 소망이 함께합니다.
반면, 영의 짓누름은 다릅니다. 이유도 없고 방향도 없습니다. 단지 우리 마음을 눌러서 기쁨과 자유를 빼앗고, 결국 하나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묻고 분별해야 합니다. “이 무게는 나를 어디로 이끄는가?
회개와 순종으로 이끄는가, 아니면 막연한 정죄감과 무력감만 남기는가?” 이 질문 하나로도, 눌림과 부담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영의 짓누름이 우리 삶에 들어올 때 가장 먼저 무너지는 것은 입, 시선, 관계입니다. 입이 닫혀 기도와 찬양이 멈추고, 시선이 아래로 떨어져 문제와 감정만 바라보게 되고, 관계가 끊어져 혼자 갇혀 버립니다. 결국 짓누름은 하나님과 사람에게서 우리를 고립시키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억압을 이기는 방법은 생각보다 단순합니다. 거창한 신비나 특별한 능력이 아니라, 아주 작은 순종과 선포 속에서 힘이 풀립니다. 먼저 시선을 들어 하나님께 향합니다. 마음이 무거울 때 이렇게 짧게 고백해 보십시오. “주님, 지금 제 시선을 주께 올립니다.” 그리고 말씀을 입으로 선포합니다. 눌림은 침묵을 좋아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소리 내어 읽고 선포할 때 어둠이 흔들립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후 3:17)
마지막으로 작은 선행과 순종입니다. 짓누름은 우리를 멈추게 하지만, 성령님은 작아도 한 걸음을 내딛게 하십니다. 누군가에게 짧은 격려 메시지를 보내거나, ‘감사 제목’을 세 가지 적는 것만으로도 눌림이 흔들립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혼자 싸우지 않는 것입니다. 짓누름은 고립될수록 더 강해집니다. 그러나 신뢰할 수 있는 누군가에게 “지금 이유 없이 마음이 무거워. 잠시 나를 위해 기도해 줄래?”라고 나누는 순간, 눌림의 힘은 크게 약해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공동체 안에서 치유하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영의 눌림이라고 해서 무조건 영적인 문제로만 치부할 필요는 없습니다. 때로는 단순히 피곤, 수면 부족, 과도한 스트레스가 영의 통로를 막고 눌림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물 한 컵, 잠깐의 휴식, 가벼운 산책이 영적인 해방의 시작이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영과 혼과 몸, 전인(全人)을 함께 돌보기를 원하십니다.
영의 짓누름은 결국 우리로 하여금 사랑을 포기하게 만들고, 하나님과의 동행을 방해합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합니다. 자유는 감정이 좋아질 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방향을 선택할 때 시작됩니다. 입을 열어 말씀을 선포하고, 시선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며, 작은 순종을 내딛는 그 순간 안개가 걷히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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