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한계시록 17장 1~6절
1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로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가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2 땅의 임금들도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사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
3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4 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 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5 그의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6 또 내가 보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 내가 그 여자를 보고 놀랍게 여기고 크게 놀랍게 여기니
어느 겨울, 한 목회자가 지방의 작은 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사택 겸 사무실로 쓰이는 그 방 구석구석에는 낯선 물건들이 놓여 있었습니다. 쥐덫이었습니다. 그것도 그냥 쥐덫이 아니라, 끈끈이 한가운데 노랗고 향긋한 치즈 조각을 정성스레 붙여둔 것들이었습니다. 전날 밤 놓아둔 끈끈이 하나에는 벌써 커다란 쥐 한 마리가 붙잡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쥐의 모습이 이상했습니다. 자신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몸의 절반이 끈끈이에 들러붙은 채로 여전히 치즈를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쥐는 몰랐을 것입니다. 끈끈이에 발이 붙었다는 것이 이미 자신의 운명이 결정되었다는 뜻임을 말입니다. 살아서 그 방을 나갈 방법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순간 그 쥐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코앞에 놓인 치즈 한 조각을 마저 먹어치우는 것이었습니다.
톨스토이는 『참회록』에서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옛 불경에서 읽었다고 적었습니다. 사나운 사자에게 쫓기던 한 나그네가 다급히 우물 속으로 몸을 피했는데, 우물 바닥에는 커다란 용이 입을 쫙 벌린 채 그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그네는 겨우 우물 벽에 붙은 나뭇가지 하나를 붙잡고 허공에 매달렸습니다. 그런데 그 나뭇가지를, 흰쥐와 검은 쥐가 번갈아 가며 쉴 새 없이 갉아먹고 있었습니다. 시간문제였습니다. 나뭇가지는 곧 끊어질 것이고, 그는 용의 입속으로 떨어질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절체절명의 순간, 나그네는 나뭇가지에서 흘러내리는 꿀 몇 방울을 혀로 핥아먹느라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잠시 잊고 있었습니다. 톨스토이는 이것이 바로 인간의 삶이라고 말했습니다.
두 이야기는 결국 하나의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미 죽음이 예정된 자리에서, 눈앞의 달콤함에 취해 그 사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존재, 성경이 문둥병, 곧 한센병을 하나님의 저주로 묘사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한센병의 진짜 무서움은 통증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눈에 이물질이 박혀도 아프지 않으니 눈물이 나지 않고, 그래서 이물질이 빠져나가지 못한 채 시력을 잃어갑니다. 손가락 마디가 곪아 들어가도 고통이 없으니 치료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어느 날 문득 손가락 하나가 사라져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고통이 없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위험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을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 개의 그림인 치즈를 문 쥐, 꿀을 핥는 나그네, 통증을 잃은 환자는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본 환상, 곧 계시록 17장의 그 여인을 이해하는 열쇠가 됩니다.
일곱 대접을 든 천사 중 하나가 요한에게 다가와 말했습니다. "이리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가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그리고 성령이 요한을 데려간 곳은 다름 아닌 광야였습니다. 계시록에서 광야는 낯선 곳이 아닙니다. 12장에서 이미 등장했던 그곳은, '여자'로 상징된 교회가 1260일 동안 뱀의 낯을 피해 하나님의 보호 아래 양육받는 장소였습니다(계12:6, 14). 그러니까 성령이 요한을 광야로 데려갔다는 것은, 지금 요한이 볼 환상이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바로 이 교회가 서 있는 자리, 지금 이 순간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계시록을 읽을 때 자주 놓치는 것이 이 지점입니다. 계시록은 언젠가 스크린에 펼쳐질 미래 예언 영화의 대본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 전쟁터 한복판에 서 있는 병사에게 건네지는 야전 교범에 가깝습니다. 에베소서 6장의 전신갑주인 진리의 띠, 의의 흉배, 복음의 신,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을 떠올려 보면 이 사실이 더 분명해집니다. 바울이 그 갑주를 언급하기 직전에 무엇을 말했습니까? 아내에게 순종하라는 남편, 목숨 걸고 아내를 사랑하라는 남편, 부모에게 순종하는 자녀,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고 양육하는 부모, 상전에게 복종하는 종, 종을 형제처럼 대하는 상전 , 극히 평범한 가정과 일터의 일상이었습니다. 전신갑주는 우주적 대전쟁을 위한 무기가 아니라, 바로 그 일상의 관계 속에서 나를 죽이고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싸움을 위한 무기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음녀와의 전쟁에서 이기고 있다는 증거는 어디서 찾아야 할까요? 거창한 영적 체험이나 극적인 승리의 순간이 아닙니다. 퇴근 후 지친 몸으로 돌아온 남편이 아내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그 저녁,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잠시 내려놓고 자녀의 마음을 먼저 헤아리는 그 순간, 일터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고도 형제를 미워하지 않기로 선택하는 그 하루 속에서입니다. 사랑이 삶에 나타나는 것, 그것이 곧 음녀와 싸워 이기고 있다는 유일한 증거입니다.
요한이 광야에서 본 것은 붉은 짐승을 탄 한 여자였습니다. 그 짐승의 몸에는 참람한 이름들이 가득했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었습니다. 낯설지 않은 묘사입니다. 요한은 이미 13장에서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을 보았는데, 그 짐승 역시 열 뿔과 일곱 머리, 참람한 이름들을 지니고 있었습니다(계13:1). 그리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12장에는 하늘에서 목격된 한 큰 붉은 용이 있었습니다.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진 채로 말입니다(계12:3).
용, 짐승, 그리고 음녀, 세 개의 다른 모습으로 등장하지만 사실은 하나의 실체입니다. 용은 마귀 그 자체이며, 짐승은 그리스도를 흉내 내는 적그리스도의 세력이고, 음녀는 그 짐승을 타고 세상을 미혹하는 자입니다. 마치 한 가족의 초상화를 세 개의 다른 각도에서 그린 것과 같습니다. 이 셋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이 또 있습니다. 바로 색깔입니다. 용도 붉고, 짐승도 붉고, 음녀가 입은 옷도 자주 빛과 붉은빛입니다. 성경에서 이 색은 두 얼굴을 지닙니다. 이사야는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사1:18)라고 말하며 붉은색을 죄의 색으로 사용했습니다. 동시에 그것은 사치와 영광의 색이기도 했습니다. 사도행전 16장에서 바울이 빌립보에서 만난 루디아라는 여인은 자주 빛 옷감을 파는 부유한. 무역상이었습니다. 자주색과 붉은색 옷감은 아무나 두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왕과 귀족과 부자들만이 걸칠 수 있는 값비싼 사치품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요한이 그린 이 여인의 초상은 죄와 사치와 영광이 한데 뒤엉킨 그림입니다. 18장에서 멸망하는 큰 성 바벨론 역시 "세마포와 자주와 붉은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민"(계18:16)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이는 우연이 아닙니다. 음녀와 바벨론은 애초에 같은 옷을 입은 같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세력은 언제나 힘과 부와 화려함으로 사람의 눈을 사로잡습니다. 그것도 아주 매력적으로 말입니다.
이 여인의 손에는 금잔이 들려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그것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잔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했습니다. '가증한'이라는 단어의 뿌리를 따라가면 신명기 18장에 이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의 민족들이 행하는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라고 경고하면서, 자녀를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 복술자, 무당, 박수 같은 이들을 그 예로 들었습니다(신18:9~12). 히브리어로 '토에바'라 불리는 이 단어는 70인역 헬라어 성경에서 '브델리그마'로 번역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계시록 17장에서 쓰인 바로 그 단어입니다. 두 경우 모두 가리키는 것은 하나, 우상숭배입니다. '더러운'으로 번역된 또 다른 단어 '아카달토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엡5:5)라고 말하며 이 단어를 우상숭배와 동의어로 사용했습니다.
결국 금잔 속에 담긴 것은 하나였습니다. 우상숭배, 계시록의 언어로 표현하면 '음행'입니다. 여기서 어떤 목회자가 즐겨 던지던 질문 하나가 떠오릅니다.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부유하고 힘 있는 사람으로 바꿔주신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지요? 아니요, 그건 아닙니다. 그게 바로 음녀요 바벨론입니다." 세상은 부귀와 영화와 화려함이라는 미끼로 사람을 유혹하고, 그 미끼를 물고 좇아가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죄, 우상숭배에 빠집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과 베드로는 화려하게 꾸민 이 여인과 정반대되는 모습을 성도들에게 요구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여자들도 소박하고 정숙하게, 단정한 옷차림으로 자기를 단장하십시오. 머리를 지나치게 꾸미지 말며, 금붙이나 진주나 값비싼 옷으로 치장하지 말고, 하나님을 공경하는 여자에게 어울리게, 착한 행실로 치장하기를 바랍니다." (딤전2:9~10, 표준새번역)베드로 역시 같은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여러분은 머리를 치장하거나, 금붙이를 달거나 옷을 차려 입거나 하는 겉치장을 하지 말고, 썩지 않는 온유하고 정숙한 마음으로, 속사람을 단장하도록 하십시오. 이것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값진 것입니다." (벧전3:3~4, 표준새번역) 음녀는 겉사람을 화려하게 꾸미지만, 성도는 속사람을 온유와 사랑과 화평과 절제로 가꿉니다. 이것이 두 존재를 가르는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예레미야는 일찍이 이 금잔의 정체를 이렇게 요약한 바 있습니다. "바벨론은 여호와의 수중의 온 세계로 취케 하는 금잔이라 열방이 그 포도주를 마시고 인하여 미쳤도다"(렘51:7). 그 잔을 마신 세상은 미친 마음을 품고 미친 짓을 하다가 결국 파멸에 이릅니다. 전도서 기자가 이미 경고했듯, "인생의 마음에 악이 가득하여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다가 후에는 죽은 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전9:3)이 그 결말입니다.
이 여인의 이마에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여기서 '비밀'로 번역된 헬라어 '미스테리온'은 흥미로운 단어입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비밀, 곧 끝까지 감추어야 할 비밀이 아니라, 언젠가 드러나기 위해 잠시 감추어진 신비, 미스터리에 가깝습니다. 다시 말해 이 이름은 무언가를 상징하는 신비로운 표지판이었습니다.
이마에 새겨진 더러운 이름은, 13장에서 보았던 또 다른 이마의 표를 떠올리게 합니다. 짐승은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이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의 오른손과 이마에 표를 받게 했는데,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육백육십육, 666이었습니다(계13:16~18). 이마에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의 어미가 바로 이 음녀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어두운 그림 반대편에는 또 다른 이마들이 있습니다. 계시록 마지막 장에서 요한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의 종들이 그분의 얼굴을 보며 그 이름이 자신들의 이마에 있게 될 것이라고 기록했습니다(계22:3~4).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과 하나님의 이름을 받은 자들, 이 둘 사이에서 지금 우리는 매일 하나를 선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질문 앞에 잠시 멈춰서서, 지금 내 이마에는 누구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까? 금과 보석과 진주로 반짝이는 저 매혹적인 유혹 앞에서, 나는 흔들리지 않고 있습니까? 혹은 반대로, 나에게는 그런 금과 보석이 없다는 이유로 낙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끈끈이에 붙은 채 치즈를 먹던 그 쥐 이야기로 돌아가서, 그 쥐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치즈를 포기하고 즉시 몸부림쳐 탈출을 시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물 나뭇가지에 매달린 나그네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도, 꿀을 핥는 대신 온 힘을 다해 우물을 빠져나갈 방법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원래 그 쥐였고 그 나그네였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은혜가 임했습니다. 자신이 처한 위험을 있는 그대로 보게 하시는 은혜, 눈을 뜨게 하시는 은혜였습니다. 그 은혜를 입은 사람은 더 이상 치즈와 꿀에 눈이 팔려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늘의 보물, 곧 사랑이라는 열매를 향해 시선을 옮기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0~21). 여기서 하늘의 보물이 가리키는 것은 다름 아닌 교회, 곧 성도 자신입니다. 계시록 21장에서 새 예루살렘을 장식하는 홍보석과 벽옥과 수정이 바로 그 교회였습니다. 그러니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는 말씀은, 우리 자신의 성품과 인격을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것으로 가꾸어가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그 성숙의 잣대를 아주 단순하게 제시했습니다.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요일2:10~11). 자신은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큰소리치면서 여전히 누군가를 미워하고 험담하고 이간질한다면, 그는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하늘 곳간에는 아직 아무 보물도 쌓이지 않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한 신앙의 선배가 남긴 기도가 있습니다. 화려한 음녀의 유혹을 이겨낸 사람만이 드릴 수 있는 기도입니다. "주님, 저는 출세를 위해 당신에게 힘을 구했으나 주님은 내게 순종을 배우라고 나약함을 주셨습니다. 주님, 저는 위대한 일을 하고 싶어 당신에게 건강을 청했으나 주님은 보다 큰 당신의 선을 이루시기 위해 저에게 병고를 주셨습니다. 주님, 저는 행복하게 살기 위해 당신에게 부귀를 구했으나 주님은 저에게 지혜로운 자가 되도록 가난을 주셨습니다. 주님, 저는 남들이 우러러보는 존경받는 사람이 되고자 당신께 명예를 구했으나 당신은 나를 비참하게 만드시어 제가 당신만을 필요로 하게 만드셨습니다. 주님, 저는 홀로 있기가 외로워서 당신의 우정을 청했으나 당신은 나로 하여금 세상의 모든 형제들을 사랑하게 하셨습니다. 주님, 저는 당신에게 내 삶을 즐길 수 있는 모든 것을 원했으나 주님은 나로 하여금 다른 모든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내가 당신께 구한 것은 하나도 받지 못했으나 그러나 당신께서는 당신께서 나에게 주시고자 원하시는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다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금잔을 든 여인이 약속하는 것과, 이 기도가 감사하는 것은 정반대입니다. 여인은 힘과 건강과 부귀와 명예와 위안과 즐거움을 미끼로 내밉니다. 그러나 이 기도를 드린 사람은 그중 어느 것도 받지 못했다고 고백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이 정말 필요로 했던 모든 것을 다 받았다고 고백합니다. 광야에서 여전히 우리를 유혹하는 저 음녀의 금잔을 마주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기도를 진심으로 드릴 수 있는 믿음, 바로 그것 하나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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