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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말씀 묵상

요한계시록 - 하나님이냐 우상이냐, 두 여인의 초대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9. 15.

요한계시록 17장 1~5절

1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로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가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2   땅의 임금들도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사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
3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4   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 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5   그의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김 집사는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사업이 삼 년째 내리막이었습니다. 은행 대출 이자는 밀렸고, 거래처는 하나둘 등을 돌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래전 알고 지내던 후배가 그를 찾아왔습니다. "형님, 요즘 어려우시죠. 제가 아는 분이 있는데, 그분 손을 한 번 잡으면 신기하게 일이 풀린다고 하더라고요." 후배가 소개한 사람은 스스로를 '영적 스승'이라 부르는 여자였습니다. 큰 교회 담임목사를 지냈다는 그녀의 사무실에는 금빛 장식이 가득했고, 벽에는 자신이 기도해준 사람들의 성공 간증이 액자로 걸려 있었습니다.

그녀는 김 집사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잘되기를 원하십니다. 이 반지를 끼고 이 기도문을 매일 외우세요. 헌금을 드리는 만큼 하늘 문이 열립니다." 김 집사는 그 말에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당장 눈앞의 절박함 앞에서, 그 화려한 확신은 구명줄처럼 보였습니다. 성경은 이런 장면을 이미 오래전에 그려놓았습니다.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본 환상 속에 등장하는 여인이 바로 그 원형입니다.

요한계시록 17장, 한 천사가 요한에게 말합니다.
"이리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1절). 요한은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나아가 한 여인을 봅니다. 그녀는 붉은 짐승을 타고 있었고,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었으며, 금과 보석과 진주로 치장하고 손에는 금잔을 들고 있었습니다(3-4절). 그 잔 안에는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했습니다. 이마에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멀리서 보면 이 여인은 눈부십니다. 가까이서 보면 그녀의 잔 속에는 더러운 것이 가득합니다. 이것이 계시록이 그리는 바벨론, 곧 음녀의 정체입니다.

요한이 이 환상을 받기 전, 계시록은 이미 열여섯 장에 걸쳐 세상에 임한 재앙을 그려왔습니다. 인의 재앙, 나팔의 재앙, 대접의 재앙, 이 재앙들의 목적은 단순한 형벌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왜 이런 고통이 오는가'를 묻게 하여 회개케 하려는 하나님의 마지막 부르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런 가운데도 하나님은 얼마간의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들을 돌이키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바로 교회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깁니다. 16장에서 일곱째 대접이 쏟아지고 "
큰 우박과 큰 지진"으로 세상 역사가 마침표를 찍었는데(16:17~21), 왜 17장부터 다시 바벨론 이야기가 시작됩니까? 이는 계시록의 독특한 서술 방식 때문입니다. 이 책은 시간 순서대로 사건을 나열하는 연대기가 아니라, 하나의 구속사를 여러 번 다른 각도에서 반복해서 비추는 책입니다. 마치 다이아몬드를 여러 각도로 돌려가며 그 빛을 보여주는 것과 같습니다.

이 반복의 패턴은 낯설지 않습니다. 일곱 인 재앙에서 여섯째 인이 떼어진 후, 요한은 다급한 질문을 듣습니다.
"누가 능히 서리요?"(6:17) 그 질문에 답하듯 7장 전체가 삽입됩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각 지파에서 만 이천 명씩, 도합 십사만 사천 명을 인치십니다. 세상이 무너지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의 백성은 보호받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나팔 재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섯째 나팔 이후 10장에서 작은 책이 등장합니다. 그 책은 다니엘서 12장에서 예고된 것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부터 재림까지, '한 때 두 때 반 때', 곧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동안 펼쳐질 복음의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이어 성전 척량 사건이 나옵니다. 천사는 요한에게 성전 안은 척량하되 바깥마당은 그냥 두라 명합니다(11:2). 이는 성도가 겉으로는 세상에 짓밟히는 것처럼 보여도, 그 속사람은 하나님께 보호받고 있다는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뒤이어 등장하는 두 증인의 이야기도 같은 메시지를 반복합니다. 그들은 복음을 전할 때는 원수도 어쩌지 못할 권세를 가졌지만, 결국 길거리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겉으로 지는 것 같은 삶이 실은 이기는 삶이라는 역설입니다.

17장부터 19장 10절까지도 이와 똑같은 구조를 가집니다. 다만 이번에는 그 반복되는 이야기가 일곱째 재앙 뒤에 놓여 있을 뿐입니다. 17장 1절에서 이 이야기를 보여주는 이가 다름 아닌 "
일곱 대접을 가진 천사 중 하나"라는 사실이 그 증거입니다. 17장은 정치·종교의 눈으로, 18장은 경제·물질의 눈으로 바벨론의 몰락을 비추고, 19장은 그 가운데 구원받은 성도들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비춥니다.

김 집사의 이야기에서 그가 만난 '영적 스승'이 그에게 요구한 것은 단순했습니다. 헌금과 순종, 그 대가로 약속된 것은 사업의 형통이었습니다. 이 구조는 낯설지 않습니다. 구약의 예언자 이사야는 타락한 예루살렘을 향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 네 은은 찌끼가 되었고 너의 포도주에는 물이 섞였도다"(사1:21~22). 하나님이 아닌 은과 포도주, 곧 세상의 힘과 풍요를 추구하는 자들을 성경은 '창기'라 불렀습니다.

바울은 이를 더 분명히 정리합니다.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엡5:5)라고 말입니다. 음행과 탐욕과 우상 숭배는 성경에서 사실상 같은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사랑하는 마음, 그것이 곧 영적 간음입니다. 이 음녀 이미지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구약의 왕비 이세벨을 만나게 됩니다. 그녀는 아합에게 시집오면서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함께 들여왔고, 성경은 그녀를 "이스라엘로 행음하게 한 여자"라 기록합니다(계2:20). 열왕기하 9장은 그녀의 무기를 "음행과 술수"라 부르는데, 이 '술수'라는 히브리어 단어가 헬라어 구약(70인역)에서 '파르마케이아'로 번역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똑같은 단어가 계시록 18장에도 등장합니다. "너의 복술[파르마케이아]을 인하여 만국이 미혹되었도다"(18:23). 이세벨과 바벨론 음녀는 문학적으로 같은 뿌리를 공유하는 인물입니다.

왜 음행과 마술, 복술이 항상 함께 등장할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사람들이 기적을 찾는 이유는 그 기적이 자기 삶에 적용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결국 기적을 향한 갈망은 기복 신앙에서 나옵니다. 사도행전의 마술사 시몬이 좋은 예입니다. 그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사도들이 안수할 때 임하는 성령의 권능을 돈으로 사려 했습니다. 베드로는 그에게 이렇게 선언합니다.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행8:20). 신앙을 이익의 도구로 삼으려는 순간, 그 신앙은 이미 우상 숭배로 변질됩니다.

김 집사의 이야기에는 흔한 결말이 있습니다. 그가 만난 '영적 스승'은 몇 해 뒤 자신이 이끌던 조직 내부의 배신으로 무너졌습니다. 함께 손을 잡았던 측근들이 서로를 고발했고, 재산 다툼 속에서 한때 '한 가족'이라 불리던 이들이 서로를 원수로 돌렸습니다. 이것 역시 계시록이 예언한 그림입니다.
"네가 본바 이 열 뿔과 짐승이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17:16). 놀라운 것은, 음녀를 뜯어먹는 존재가 다름 아닌 그녀가 타고 있던 짐승이라는 사실입니다. 한편이었던 자들이 서로를 삼킵니다. 이세벨의 최후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스르엘 토지에서 개들이 이세벨의 고기를 먹을지라"(왕하9:36).

하나님이 아닌 것을 좇는 연합은 처음에는 굳건해 보이지만, 공동의 이익이 사라지는 순간 서로를 물어뜯는 관계로 돌변합니다. 바울이 디도서에서 회심 전 인간의 모습을 묘사하며
"피차 미워한 자"(딛3:3)라 표현한 것도 같은 진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관계는 결국 자멸합니다.

계시록은 이 화려하지만 파멸하는 음녀와 정확히 대조되는 또 다른 여인을 그립니다. 어린양의 신부입니다. 음녀가 심판대에서 살이 뜯기는 동안, 신부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혼인 잔치에 참여합니다. 음녀는 자기와 한편이던 짐승에게 삼켜지지만, 신부는 어린양에게 끝까지 보호받아 점도 흠도 없는 존재로 완성됩니다.

계시록 14장 4절은 이 신부들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 그렇다면 이 어린양은 신부를 어디로 인도하시는가?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나시기 전 남기신 단 하나의 계명이 그 답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음녀를 좇는 자들이 '피차 미워하는 자'라면, 어린양을 좇는 자들은 '서로 사랑하는 자'입니다.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 나의 손해를 기꺼이 감수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랑이었습니다. 이런 사랑을 하는 사람은 더 이상 세상의 은과 포도주를 갈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자기를 증명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는 성경 지식이 풍부하고 열심도 대단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문제는 그 지식과 열심이 무엇을 위해 쌓이고 있는가입니다. 어떤 이는 자신의 성경 지식을 남을 판단하는 무기로 사용합니다. "저 사람은 복음을 몰라, 그러니까 가까이하지 마." 이런 말을 들었다면, 그것이야말로 물리쳐야 할 음녀의 속삭임입니다.

비유하자면, 성경 공부와 봉사와 헌금과 구제는 모두 '사랑'이라는 옷을 짓기 위한 원단과 실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원단과 실만 창고에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완제품인 옷 한 벌 짓지 못한 채 그 쌓인 재료를 바라보며 만족합니다. 재료만 쌓아두고 제품을 만들지 못하는 상인은 결국 파산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식과 헌신이 사랑으로 완성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곧 파산할 창고일 뿐입니다.

기독교의 배타성은 이런 무기와는 다릅니다. "
구원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는 유일성의 선언은 동시에 넓은 포용을 품고 있습니다. 아직 주께 돌아오지 않은 이들에게도 언제든 돌아올 문이 열려 있다는 소망, 그리고 연약한 이들을 기다려주는 인내, 이것이 진짜 기독교의 배타성입니다. 오랫동안 한국 교회에 기복 신앙과 신비주의를 심어놓은 한 원로 목회자를 위해 가장 많이 기도한다는 고백도 이 배타성에서 나옵니다. 미워함이 아니라, 그가 바른 길로 돌이키기를 구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한 교회의 청년부 수련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밤이 깊도록 어느 방에서는 청년들이 복음 성가를 부르며 기도했고, 다른 방에서는 다른 청년들이 둘러앉아 화투를 치며 놀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 밤새 기도한 청년들 중 몇몇이 밤새 논 친구들을 보며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목사님이 놀아도 된다고 하셨지만, 저렇게까지 노는 건 좀 세속적이지 않나?' 그러나 진짜 물어야 할 질문은 다른 데 있습니다. 밤새 찬양하고도 다음 날 남을 정죄하는 마음을 품었다면, 그 밤의 찬양은 목만 쉰 헛수고에 지나지 않습니다.

반대로 밤새 화투를 치면서도 이웃을 속이지 않고, 크게 잃고도 상대를 미워하지 않았다면, 그것이 오히려 더 성숙한 신앙의 열매입니다. 영성은 특정한 종교 행위의 양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이웃을 사랑하는 훈련입니다. 형이상학적으로 세상을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물질세계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구현해내는 것이 진짜 영성인 것입니다.

김 집사는 결국 그 '영적 스승'의 초대를 뿌리쳤습니다. 사업은 여전히 어려웠지만, 그는 매주 교회에서 만나는 몇몇 성도들과 함께 형편이 어려운 이웃을 돕는 작은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눈에 띄는 형통은 찾아오지 않았지만, 그는 그 모임 안에서 처음으로 조건 없는 사랑을 경험했다고 고백했습니다.

계시록 17장이 그리는 두 여인인 화려하지만 결국 뜯겨 먹히는 음녀와, 수수해 보이지만 끝내 흠 없는 신부로 완성되는 어린양의 아내는 지금도 모든 성도 앞에 놓인 선택입니다. 세상은 화려한 옷과 금잔을 든 여인을 좇아가라 손짓하지만, 그 잔 속에는 가증한 것들이 가득합니다. 반면 어린양이 인도하는 길은 화려하지 않지만, 그 끝에는 서로 사랑하며 흠 없이 서 있는 신부들의 잔치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선택하십시오. 하나님이냐, 우상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