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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말씀 묵상

요한계시록 - 깨어진 돌 속에서, 거룩을 다시 묻다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8. 10.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 되시도다.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요한계시록 15:3~4)

어느 신학생이 춘천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강가에 잠시 차를 세운 적이 있습니다. 영화 '대부'의 한 장면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피아의 후계자가 된 마이클 꼴레오네가 로마 교황청의 부패에 절망하여 람베르토 대주교를 찾아가는 장면이었습니다. 대주교는 아무 말 없이 뜰의 분수 속에서 작은 자갈 하나를 꺼내더니, 그 자리에서 돌을 깨뜨립니다. 수백 년을 물속에 잠겨 있던 돌이었습니다. 그런데 쪼개진 단면은 바싹 말라 있었습니다. 대주교가 말합니다. "
이 돌은 수백 년 동안 이 분수 속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겉만 젖었을 뿐, 속은 한 번도 젖은 적이 없습니다."

그는 강가에 쪼그려 앉아 그럴듯한 자갈 하나를 골라 힘껏 내리쳤습니다. 정말이었습니다. 겉은 젖어 반질반질했는데, 갈라진 속은 부스러기가 일어날 정도로 메말라 있었습니다. 그날 그는 오랫동안 그 돌을 손에 쥐고 앉아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의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신학교에서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배우고, 주일마다 강단에 서고, 사람들에게 거룩한 삶을 설교하면서도, 정작 그의 속은 그 돌처럼 말라 있는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물에 오래 담겨 있었다고 해서 저절로 젖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나눌 이야기는 바로 이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거룩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떻게 겉만 아니라 속까지 젖을 수 있는가?

요한계시록 15장은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한 장면을 보여줍니다. 유리 바다 가에 선 성도들이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부릅니다.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계15:4) 이상한 일입니다. 지상에서의 삶이 아무리 힘들었어도, 하늘에 이른 성도들이 가장 먼저 목청껏 외치는 찬양의 내용이 '하나님은 거룩하시다'는 것입니다.

재난에서 건짐 받은 감사도, 눈물을 씻어주신 은혜도 아니고, 먼저 이 한 마디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찬양을 미리 배워두어야 합니다. 낯선 노래를 천국 문 앞에서 처음 배우고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
거룩'이라는 단어를 이미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잘 모릅니다.

어느 교회 수련회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인도자가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
거룩하다는 게 뭘까요?" 한 아이가 손을 들고 대답했습니다. "음… 되게 조용하고, 재미없고, 웃으면 안 될 것 같은 거요." 우리는 웃을 일이 아닙니다. 어른들도 대개 비슷하게 생각합니다. 거룩 = 죄를 안 짓는 상태, 도덕적으로 흠 없는 상태, 근엄하고 엄숙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 정의를 가지고 성경을 펼치면 금방 막힙니다.
'거룩한 안식일', '거룩한 그릇', '거룩한 땅', '거룩한 십일조', 안식일이 죄를 안 짓습니까? 그릇이 도덕적입니까? 말이 안 됩니다. 성경을 원어로 추적해보면 답이 나옵니다. 히브리어로 거룩은 '카다쉬'입니다. 이 단어의 어근은 원래 '자르다', '구별하다'라는 뜻입니다. 반대말은 ''로, '일반적인 것, 속된 것, 흔한 것'을 가리킵니다.

즉 거룩이란 본래 구별의 개념입니다. 도덕성은 그 구별 안에 포함된 결과이지, 정의 그 자체가 아닙니다. '
거룩한 그릇'은 다른 그릇과 성분이 똑같지만, 하나님의 제사를 위해 따로 구별되어 바쳐진 그릇이라는 뜻입니다. '거룩한 안식일'은 다른 요일과 시간의 흐름이 똑같지만, 하나님께 바쳐지도록 구별된 하루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
거룩하신 하나님'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그저 도덕적으로 완벽하시다는 뜻을 넘어섭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피조 세계 전체와 완전히 구별되신, 다른 차원의 존재라는 선언입니다. 그 어떤 더러움과도 섞일 수 없는, 존재 자체가 순전한 분이라는 뜻입니다.

이사야는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목격한 순간 이렇게 외쳤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사6:5). 욥은 하나님을 만난 후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42:6)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그물이 찢어지도록 물고기가 잡힌 기적 앞에서 오히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5:8) 라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은혜를 경험했는데 도망가고 싶어 하는 반응, 이것이 바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선 죄인의 정직한 반응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을 인자하고 다정한 친구처럼만 상상하지만, 성경이 보여주는 첫 반응은 두려움과 떨림입니다. 왜냐하면 거룩은 구별이며, 죄와 완전히 섞일 수 없는 분리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딜레마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기에 언약을 반드시 지키셔야 합니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렘30:22)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죄인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할 수 없습니다. 죄와 거룩은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죄인을 거룩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거룩하게 만드는 방법이 놀랍습니다. 죄인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집어넣어 그리스도와 함께 죽게 하신 것입니다. 거룩하지 못한 옛 사람을 십자가에서 처리하시고, 사흘 만에 거룩하신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 부활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던 옛 사람은 사라지고,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새사람이 태어났습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구원은 우리가 착해져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만들어낸 필연적 결과입니다. 우리가 거룩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기에 이미 거룩한 자로 선언된 것입니다.

코리 텐 붐이 라벤스브뤼크 강제수용소에서 겪은 이야기를 아실 겁니다. 그녀와 언니 베시는 배정받은 막사가 벼룩으로 들끓는 것을 알고 절망했습니다. 그런데 베시는 오히려 벼룩에게도 감사하자고 기도했습니다. 코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벼룩까지 감사할 일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훗날 밝혀진 사실은 놀라웠습니다. 그 막사에 벼룩이 너무 많아서 간수들이 순찰조차 꺼렸던 것입니다. 덕분에 그녀들은 아무런 방해 없이 매일 밤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다른 수감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가장 더럽고 하찮게 여겨졌던 것이, 하나님이 구별해두신 거룩한 시간과 공간을 지키는 방패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이 있습니다. 거룩은 상황이 깨끗해야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코리 텐 붐이 있던 자리는 세상에서 가장 더럽고 참혹한 곳, 죽음의 수용소였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하나님은 구별된 시간, 구별된 예배, 구별된 증거의 자리를 만드셨습니다. 거룩은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께 바쳐진 목적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란 세상과 물리적으로 다른 공간에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똑같은 직장, 똑같은 시장, 똑같은 거리에 서 있으면서도 하나님께 구별되어 바쳐진 존재, 그것이 성도입니다.

여기서 성경의 히브리서 기자는 분명히 선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10:10) 이미 끝났다는 것입니다. 과거형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동시에 명령합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1:15) 이미 거룩한데 왜 또 거룩하라고 명령하실까요?

이것은 마치 이런 상황과 같습니다. 어느 회사가 신입사원을 채용하며 이렇게 말한다고 상상해보십시오. "
당신은 이미 우리 회사의 정식 직원입니다. 이제 그 직원다운 모습을 배우고 익혀가세요." 신분은 이미 주어졌지만, 그 신분에 걸맞은 삶은 살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자로 선언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신분에 맞게 살아가는 것은 평생의 훈련입니다. 억지로 거룩을 만들어내라는 명령이 아니라, "너는 이미 거룩한 자이니, 그 옷에 맞는 걸음을 걸으라"는 초대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15절의 '
모든 행실'이라는 단어는 특별한 순간이 아니라 일상의 반복되는 삶 전체를 가리킵니다. 주일 예배당에서만이 아니라, 월요일 회의실에서도, 화요일 저녁 식탁에서도, 거룩은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는 불편한 장면이 나옵니다. 16세기 유럽의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을 게토라는 구역에 몰아넣고, 식별용 빨간 모자를 씌우고, 부동산 소유조차 금지했습니다. 그렇게 유대인들을 고리대금업으로 내몰아놓고는, 정작 그들이 지나가면 수염에 침을 뱉고 '
'라고 불렀습니다. 유대인 대금업자 샤일록이 원금의 두 배를 갚겠다는 그리스도인 안토니오의 제안마저 거절하고 끝까지 심장을 요구했던 것은, 그 오랜 멸시와 모욕에 대한 처절한 앙갚음이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눈에 비친 그리스도인이란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거룩을 입에 달고 살면서, 정작 그 거룩으로 다른 사람을 짓밟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신앙 좋다는 사람이 직장 동료들 사이에서 '피하고 싶은 사람'으로 불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
네가 예수 믿고 천국 간다면 난 차라리 너 없는 지옥에 가겠다"는 말을 들어본 적은 없습니까?

이것은 거룩을 오해한 결과입니다. 참된 거룩은 자기 의로움을 증명하려고 남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를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코리 텐 붐이 벼룩이 들끓는 막사에서조차 복음을 흘려보냈던 것처럼, 거룩한 사람이 지나간 자리에는 정죄의 냄새가 아니라 은혜의 향기가 남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거룩을 삶으로 살아낼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17:17) 진리가 우리를 거룩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진리'라는 단어를 조금 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구약의 히브리어 '아만'은 '참되다, 확실하다, 신뢰할 만하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기도 끝에 외치는 '아멘'이 바로 이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신뢰합니다, 확신합니다"라는 고백인 셈입니다.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참되심을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형이상학적 참, 모든 거짓과 반대되는 참되심입니다. 둘째는 윤리적 참,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존재가 정확히 일치하신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논리적 참,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거룩과 직결되는 것은 두 번째, 윤리적 참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 대로 존재하시고, 존재하신 대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요1:14). 그러니 결국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진리는 성경을 통해,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방법은 화려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듣고, 읽고, 공부하고, 묵상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지루해 보이는 반복 속에서만 우리는 조금씩 겉만 아니라 속까지 젖어갑니다. 헬라어 '순종'(휘파쿠오)이 '듣다'(아쿠오)에서 나온 단어라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순종은 들음에서 시작됩니다. 듣지 않은 사람은 순종할 수 없습니다.

그 신학생은 종종 그날 춘천에서 깨뜨렸던 자갈을 떠올립니다. 물속에 오래 있었다고 저절로 젖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녔다고, 직분을 맡았다고, 성경 구절을 많이 안다고 저절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이 사실도 압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자로 선언된 사람들입니다. 마르고 갈라진 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으로 속까지 적셔진 새로운 존재로 다시 지음 받았습니다. 남은 것은 그 신분을 믿고, 날마다 말씀 앞에 자신을 담그는 것뿐입니다.

유리 바닷가에서 성도들이 부를 그 노래, "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는 찬양은 하늘에서 처음 배우는 노래가 아닙니다. 오늘, 이 세상에서 겉과 속이 함께 젖어가는 삶을 통해 미리 연습하는 노래입니다.

당신은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하늘의 시민이며, 이미 거룩한 자로 구별된 존재입니다. 오늘 이 자리를 나서면서, 그 참되신 하나님의 말씀에 다시 한번 자신을 담가보십시오. 세상과 다르게 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