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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바다 앞에서 부르는 노래 - 주를 두려워하고 영화롭게 하는 자들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7. 26.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요한계시록 15:1~4)

전쟁이 끝난 어느 겨울, 흥남부두에서 마지막 배를 탔던 피난민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배 위에서, 방금 떠나온 부두가 폭격으로 무너지는 것을 뒤돌아보며 울었다고 합니다. 살아남았다는 안도와, 두고 온 것들에 대한 슬픔이 뒤섞인 울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그날을 회고하는 어른들의 이야기 속에는 이상하게도 슬픔보다 감사가 더 컸습니다. "
그날 그 배를 놓쳤으면 우리 가족은 없었다"는 그 한마디에, 죽음의 자리였던 부두가 이제는 은혜를 노래하는 이유가 되어 있었습니다.

요한계시록 15장의 성도들도 그런 자리에 서 있습니다.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불러"(계 15:2~3) 여기서 노래하는 이들은 이제 막 무언가를 통과해 나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손에는 거문고가 들려 있고, 입에는 옛적 모세가 불렀던 그 노래가 담겨 있습니다. 이 노래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먼저 출애굽기 14장의 바닷가로 가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밤새 걸었습니다. 앞에는 홍해, 뒤에는 바로의 군대, 도망칠 곳이 없는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새벽이 오자, 모세가 손을 내밀었을 때 바다가 다시 흘렀습니다.
"물이 다시 흘러 병거들과 기병들을 덮되 그들의 뒤를 쫓아 바다에 들어간 바로의 군대를 다 덮고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더라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였고 물이 좌우에 벽이 되었었더라"(출 14:28-29) 같은 바다, 같은 새벽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바다는 애굽 군대에게는 무덤이 되었고, 이스라엘에게는 길이 되었습니다. 백성들은 그 바닷가에 널려 있는 시신들을 보며, 자신들이 지금 서 있는 이 마른 땅이 얼마나 큰 은혜였는지를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노래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것이 모세의 노래이고, 계시록 15장에서 다시 불리는 그 노래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바로 그 바닷가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당신 앞에 놓인 홍해가 있습니까? 자녀 문제일 수도 있고, 갈수록 나아지지 않는 살림일 수도 있고, 낫지 않는 병일 수도 있습니다. "
난 이제 끝났구나" 싶은 그 자리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이것입니다. 그 바다는 우리를 삼키려고 놓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앞장서서 건너게 하시려고 허락하신 자리라는 것입니다.

여기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으로 그냥 눌러앉아 살았다면, 애초에 홍해라는 장애물을 만날 이유가 없었습니다. 홍해 앞에 선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들이 애굽에서 나온 자들, 곧 구원받은 자들이라는 증거였습니다. 그러니 지금 당신의 삶에 도무지 건널 수 없어 보이는 바다가 놓여 있다면, 역설적으로 그것은 당신이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식일 수 있습니다. 그 바다를 건너고 나면, 오늘은 장애물로 보이는 그 자리가 내일은 찬양의 이유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바다를 건넌 이들의 노래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계 15:4) 두려움과 영광, 이 두 단어가 오늘 우리가 곱씹어야 할 말씀의 핵심입니다. 먼저 두려움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사람이 누군가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사실 그 사람의 힘과 권위를 인정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둘 중 하나입니다. 상대에게 정말 아무 힘이 없거나, 아니면 내가 그 상대를 제대로 알지 못하거나 입니다.

어릴 적 기억을 떠올려 보십시오. 부모님이 "
이 닦아라, 늦잠 자지 마라, 거짓말하지 마라" 하고 잔소리하실 때는 귀찮고 싫었지만, 돌아보면 그 잔소리가 우리를 지켰습니다. 아이들에게 씻고 이 닦는 일을 순순히 맡겨두면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안 씻을 것입니다. 상위의 권위가 나를 붙들어주지 않으면, 사람은 스스로를 다스리지 못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고, 죄의 속성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정작 그 최고의 권위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스스로의 최고 권위자가 되어, 마음 내키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하노니"(고후 5:11)

여기서 말하는 두려움은 무섭다는 의미의 공포가 아닙니다. 상대가 너무나 크고 존귀하고 위엄이 있어서, 그 앞에 서면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그런 경외를 말합니다. 헬라어로는 '
포베오'라고 하는데, 이는 하나님을 정말로 아는 사람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반응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하는 사람은 오히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대부분의 이유를 곰곰이 따져보면, 남보다 나아 보이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부러움을 사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남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마음은 결국 사람을 두려워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람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느라, 정작 하나님의 시선은 잊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강단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어느 목회자는 성도들이 헌금으로 자신의 사례비를 채워준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그들의 눈치를 보게 됩니다. 이혼한 이들이 많은 교회에서는 이혼에 관해 설교하기 어렵고, 부정한 방법으로 재물을 모아 큰 헌금을 하는 이가 있는 교회에서는 정직에 관해 설교하기 어려워집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순간, 강단의 말씀은 힘을 잃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설교를 들으며 "
오늘 목사님이 나를 겨냥해서 말씀하셨구나" 싶어 마음이 찔리셨다면, 오히려 잘 들으신 것입니다. 설교자는 당신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기 위해 설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찔림에서 멈추지 말고, 회개하며 하나님께로 발길을 돌리시길 바랍니다.

두 번째 단어는 영광입니다. "
영화롭게 하다"는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영광을 돌린다'는 말을 오해합니다. 국제 경기에서 우승한 선수가 인터뷰 마이크 앞에서 "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까요? 자녀가 명문대에 합격했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일까요?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은 그 자체로 이미 영광이시고, 존귀하시고, 거룩하시고, 사랑이십니다. 우리가 무엇을 이룬다 한들, 그 영광에 무엇을 보탤 수 있겠습니까?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어도, 세상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더 크게 만들어드리지는 못합니다.

그렇다면 진짜 영광을 돌리는 삶이란 무엇일까요.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광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요 17:22)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함 받아 구원을 얻은 것, 그 자체가 이미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광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도 하나님께 영광을 받으셨다는 사실이 나옵니다. 본래 죄와 무관하신 의로운 하나님이신 그분이, 어떻게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셨다"고 표현될 수 있을까요?

"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의 죄 자체가 되어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의롭다 하지 않으시면 영원히 정죄받을 자리까지 스스로 낮아지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아들을 죽음에서 일으키시고 의롭다 하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받으신 영광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우리도 함께 그 영광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영광을 받은 자의 삶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답은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 곧 순종입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7~8)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 것은 예수님이 화려한 기적을 행하실 때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완전히 순종하신 그 자리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구원은 어느 한순간 받고 끝나는 사건이 아니라, 완성의 그날까지 우리 삶으로 살아내야 하는 여정입니다.

로마서 5장은 이 구원을 세 개의 시제로 설명합니다. "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은 과거이고, "화평을 누리자"는 현재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는 미래입니다. 이 세 시제가 합쳐진 것이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목표지점은 '구원'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구원받은 자로서 매일을 살아내며 도달하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사복음서 모두에 실려 있는 유일한 기적 사건이 있습니다. 바로 오병이어입니다. 이 사건이 왜 이렇게 중요하게 다루어질까요? 그 안에 기독교의 본질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들이 이 기적을 "
많이 드리면 하나님이 몇 배로 갚아주신다"는 이야기로 오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자신이 이 기적 이후에 자신을 따라오는 무리를 향해 탄식하십니다. 그들이 배부른 까닭에 자신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기적의 진짜 의미를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요 6:51, 56)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마셔야 살아나는 우리의 구원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이 기적이 일어난 방식입니다. 한 아이가 내놓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이 먼저 축사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제자들이 그것을 들고 나가 이만 명이 넘는 무리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기적은 두 단계로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불려주시는 일과, 제자들이 그것을 들고 나가 나누는 일. 예수님은 혼자 다 하실 수 있었지만, 굳이 제자들을 그 일에 동참시키셨습니다.
그 이유가 요한복음 6장 57절에 담겨 있습니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여기서 "아버지로 인하여 산다"는 말은, 예수님의 삶의 목표와 가치관과 모든 선택이 온전히 아버지 하나님에 의해, 아버지 하나님 때문에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먹고 구원받은 우리도 이제는 그리스도가 시키시는 대로, 그분을 위해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요 14:12)
이 "더 큰일"은 화려한 기적이나 신비한 능력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 순종하심으로 사람들을 살리신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냄으로써 우리를 통해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는 일을 말합니다. 우리는 행복과 자랑을 위해 이 땅에 남겨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배우고 닮아가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부유해진 농부의 몰락
이 진리를 생각할 때마다 저는 한 소설을 떠올립니다. 펄 벅의 『대지(The Good Earth)』입니다. 주인공 왕룽은 몹시 가난하지만 성실한 농부였습니다. 못생긴 아내 올란과 결혼하지만, 그녀가 워낙 부지런하고 착해서 부모를 모시며 소박하게나마 만족스러운 삶을 삽니다.
그런데 흉년이 들어 남쪽으로 피난을 갔다가, 혁명의 혼란 속에서 아내 올란이 어느 부잣집에서 보물을 훔쳐 옵니다. 거지처럼 살던 왕룽의 가족은 하루아침에 부자가 됩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왕룽은 땅을 사들이며 대지주가 되지요. 그런데 부와 명예를 손에 쥔 왕룽이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이었을까요. 기생집 출입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위해 평생 헌신한 아내를 뒤로하고 젊은 첩을 들입니다. 결국 그 돈 때문에 귀한 아내를 잃고, 자식들도 방탕한 삶으로 흘러갑니다.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역시 부유한 청년들에게 잘 보여 명예와 부를 함께 거머쥐려는 젊은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제 둘째 아이가 이 두 책을 읽고 나서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Money makes man crazy." 저는 그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인생의 마음에 악이 가득하여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다가 후에는 죽은 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 (전 9:3)
경건의 훈련 없이 세상의 힘을 먼저 손에 쥐게 되면, 사람은 그 힘에 잠식당해 미쳐버립니다. 그래서 저는 새벽기도를 나서기 전 늘 아이들의 방에 들어가 아이들을 안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우리 아이들 절대 부자 되지 않게 해주세요." 오히려 가난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피부로 느끼며, 작은 것에 감사하고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으로 자라기를 구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목적은 나의 자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혀만 바뀐 여행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의 한 항공사에서 오래 근무한 승무원이 들려준 일화입니다. 어느 날 한국에서 미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어학연수를 떠나는 대학생들이 한 무리 탑승했습니다. 승무원이 그래도 대학생이니 기본 영어는 통하겠거니 하고 한 남학생에게 물었습니다. "What would you like to drink?" 학생이 멀뚱히 쳐다보자, 승무원은 다시 물었습니다. "Sprite? Or coke?" 그러자 학생은 "Yes"라고 답했습니다. 그냥 콜라를 건네주니 잘 마셨다고 합니다.
몇 달 후, 어학연수를 마친 그 학생들이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다시 탑승했습니다. 낯이 익다며 그 학생이 먼저 "What's up!" 하고 인사를 건넸습니다. 승무원은 몇 달간 영어를 배웠으니 이번엔 다르겠지 생각하며 다시 물었습니다. "Sprite? Or coke?" 그런데 학생은 "Yap"이라고 답했습니다. 몇 달의 어학연수 동안 바뀐 것이라고는 "Yes"를 "Yap"이라고 혀를 굴리는 발음뿐, 본질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저는 신앙생활을 오래 한 그리스도인들을 볼 때 이따금 그와 같은 씁쓸함을 느낍니다. 수십 년을 예수 믿었다면서도, 아는 것은 많아 보이지만 삶은 여전히 그대로인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발음만 바뀌었을 뿐, 본질은 바뀌지 않은 것입니다.
다시, 유리 바닷가에서
이제 처음의 그 유리 바닷가로 돌아가 봅시다. 바다를 건넌 성도들이 부르는 노래에는 두려움과 영광이 함께 담겨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위엄 앞에 절로 고개 숙이는 경외, 그리고 그 순종의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감격.
여러분 앞에 놓인 홍해가 무엇이든, 그것은 여러분을 삼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러분을 건너게 하시려고 허락된 자리입니다. 그리고 그 바다를 건넌 뒤에는, 오늘 두려워 보이는 그 자리가 내일 찬양의 이유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신분을 잊지 마시고, 지금 이 순간부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모든 선택과 행동을 하시기 바랍니다.
필요하시면 이 에세이에서 요절을 뽑아드리거나, 특정 단락(홍해 이미지, 오병이어 부분 등)을 더 늘리거나 줄여서 조정해드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