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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말씀 묵상

목마른 사슴의 노래 - 의로우신 하나님 의의 길로 행하는 나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8. 2.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요한계시록 15:3~4)

1917년, 팔레스타인의 시나이 사막, 영국군 소속의 길버트 소장이 이끄는 부대는 브엘세바에서 시리아를 향해 행군하고 있었습니다. 물병은 이미 바닥난 지 오래였고, 태양은 사정없이 병사들의 정수리를 내리쬐었습니다. 눈은 충혈되어 침침해지고, 혀는 부어올랐으며, 입술은 검붉게 갈라져 마침내 터졌습니다. 대열에서 이탈한 사람은 다시 일어서지 못한 채 그대로 쓰러져 갔습니다.

그런데도 부대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시리아에는 우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해가 지기 전에 그곳에 도착하지 못하면 수천 명이 목숨을 잃을 상황이었습니다. 마침내 퇴각하는 터키군의 진영에 다다랐을 때, 병사들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차갑고 맑은 물로 가득 찬 커다란 돌 항아리들이었습니다. 그 광경은 병사들을 거의 미치게 만들었습니다.

물을 마시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부상자들부터 순서대로 물을 마셨는데, 그 모든 병사가 물을 마시는 데만 무려 네 시간이 걸렸다고 합니다. 길버트 소장은 훗날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
우리는 그 행군을 통해 성경의 한 진리를 몸으로 배웠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의와 뜻을 이토록 전폭적으로 갈망한다면, 우리에게 얼마나 풍성한 성령의 열매가 맺힐 것인가."

이 이야기에서 시편의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42:1). 사슴은 식도의 구조가 얇은 셀로판지 같아서, 오랫동안 물을 마시지 못하면 그 식도가 서로 달라붙어 죽고 만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슴에게 물을 찾는 일은 취미가 아니라 생존입니다. 우리에게 '의'를 향한 갈망은 그 정도의 것이어야 합니다. 없어도 그만인 취향이 아니라, 없으면 죽는 생명줄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갈망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도대체 '
하나님의 의'란 무엇이며, 그것이 왜 우리 찬양의 핵심이어야 합니까? 요한계시록 15장에서 유리 바닷가에 선 성도들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계15:3).

여기서 반복되는 단어가 바로 '의'입니다. 히브리인들에게 '의'('짜다카')란 추상적인 도덕률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한 존재가 다른 존재와 맺은 관계 속에서, 그 관계가 요구하는 바를 성실하게 수행해 내는 것이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책임 있게 기르는 것, 친구가 친구를 신실하게 대하는 것이 '의'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는 무엇이겠습니까? 창조주로서 피조물에 대한 책임을 끝까지 성실히 감당하시는 것, 곧 하나님이 끝까지 하나님다우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인간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
내가 너를 사랑하고 지키고 복 줄 것이니, 너는 내 말에 순종하라." 그 언약의 표지가 선악과였습니다. 선악과는 저주의 함정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책임을 다하시기 위해 마련하신 복된 조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인류의 대표 아담은 그 조건을 걷어차 버렸습니다. 그 순간 인간은 하나님의 복을 잃었을 뿐 아니라, 이제 '의'의 문제에 더해 '죄'의 문제까지 짊어지게 되었습니다. 로마서는 이를 이렇게 선언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여기서 '
죄를 범하였다'는 동사는 헬라어 부정과거 시제로, 과거 어느 한 순간에 단번에 일어난 사건을 가리킵니다. 곧 우리는 아담 안에서 이미, 태어나기도 전에 죄인이었다는 것입니다. 반면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는 현재 시제로 쓰여, 그 결과가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도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멈추었다면 인류의 이야기는 절망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이 지으신 백성을 포기하실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스스로 하나님이시기를 포기하시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창세전,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사이에 오갔을 그 대화를 상상해 보십시오. 성경이 명시적으로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성경 전체가 증언하는 그 뜻을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성부께서 성자와 성령께 말씀하십니다.

"
우리가 누리는 이 영원한 기쁨과 충만함을 함께 누릴 백성을 만들자. 다만 그들을 기계처럼 만들지 말고, 우리와 인격적으로 교제할 친구로 만들자. 그러려면 그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어야 한다. 그런데 그들은 그 자유의지로 나를 반역할 것이다. 그들이 타락하면, 거룩한 우리는 죄인과 함께할 수 없다. 그때 네가 내려가 그들의 죄를 대신 지거라. 완전한 인간으로 살며 내가 명한 모든 것을 지켜내고, 그 순종과 십자가의 은혜를 창세전에 택한 내 백성에게 값없이 주고 오너라. 그러면 내가 성령을 보내어 그 은혜가 그들 안에서 믿어지게 하마. 그렇게 그들은 한때 나를 반역하는 데 썼던 그 자유의지로, 이제 자원하여 나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내가 원하는 친구다."

이것이 바로 유리 바닷가의 성도들이 찬양하는 '
하나님의 의로우심'입니다. 인간의 죄 문제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형벌을 대신 짊어지심으로 해결되었고, 인간이 이루어야 했던 ''의 문제는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순종의 생애를 사심으로 해결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의는 우리에게 값없이 전가되었습니다(고후5:21). 이것이 바울 신학의 핵심,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여기서 많은 성도들이 오해하는 지점이 있습니다. "
예수님이 다 이루셨으니, 나는 이제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것 아닌가?" 로마서 5장 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여기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이미 완료된 과거 시제입니다. 우리는 이미 의롭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의롭게 된 사람에게는 요구가 뒤따릅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 곧 순종하며 사는 삶입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복 있는 자의 네 번째 특징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마5:6). 이 말씀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두 가지를 함께 붙들어야 합니다. 산상수훈의 그 조건들은 예수님이 이미 완성하여 우리에게 전가하셨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의롭게 된 우리는 이제 그 내용을 우리의 삶으로 살아내야 합니다. '
주리고 목마르다'는 헬라어 원어에서 현재진행형으로 쓰였습니다. 이미 의롭게 된 자들이 앞으로도 계속 의에 주리고 목말라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작 무엇에 목말라하고 있습니까? 이사야는 이렇게 탄식합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사55:2).

우리는 돈에 목마르고, 명예에 목마르고, 자기 자랑에 목말라합니다. 예수님은 이를 정확히 짚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바울은 이 갈망이 어떤 것인지 자신의 삶으로 보여줍니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고린도에서, 그리고 삼층천에서 주님을 직접 만난 사람이었습니다. 인간의 기준으로 보면 율법을 흠 없이 지켜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요 또 이미 목표점에 이른 것도 아닙니다…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만을 바라보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빌3:12~14).

그리고 그는 자신이 한때 자랑스러워했던 모든 것인 혈통, 학식, 종교적 성취를 이렇게 부릅니다.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3:8). 여기서 '배설물'로 번역된 헬라어 '스퀴발론'은 완곡한 번역이고, 원래는 그냥 ''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이 그토록 붙잡으려 애쓰는 그 모든 것을, 바울은 똥이라고 불렀습니다.

19세기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1869년, 뉴욕주 카디프라는 작은 마을에서 한 농부가 우물을 파다가 놀라운 것을 발견했습니다. 땅속에서 10피트가 넘는 거대한 석상이 나온 것입니다.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고, 기독교계 일부 인사들이 이를 창세기에 나오는 거인 '
네피림'의 화석이라고 단정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거인상을 보기 위해 전국에서 몰려들었고, 급기야 그 상에 입을 맞추면 병이 낫고 부자가 된다는 소문까지 돌기 시작했습니다. 땅 주인은 관람료를 받아 큰돈을 벌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서커스 사업가 P.T. 바넘이라는 사람이 자기도 한몫 잡으려고 똑같이 생긴 거인상을 하나 더 만들어, 언론을 통해 "
저것은 가짜고 내 것이 진짜다"라고 주장하며 논쟁을 부추겼습니다. 결국 법정 다툼까지 벌어졌고, 예일대 교수들까지 동원된 조사위원회가 두 거인상을 정밀히 조사했습니다. 결론은 허무했습니다. 둘 다 가짜였습니다.

원래 땅 주인은, 마을 목사와 구약의 네피림이 실존했는지를 두고 다투다가 홧김에 뒷마당에 거인상을 만들어 묻어둔 것뿐이었다고 자백했습니다. 그런데 신문사와 일부 기독교계가 검증도 없이 이를 대서특필했고, 그 결과 아무 근거 없는 소문을 좇아 거액을 들고 전국에서 몰려온 사람이 수십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모이고, 화려한 간증이 들리고, 규모가 커지면 우리는 검증 없이 "
저것이 진짜겠거니" 하고 좇아갑니다. 예수 믿으면 병이 낫고 부자가 된다는 가르침에 사람이 몰리면, 그것이 진짜 복음인 줄 착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복음의 목적지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물질의 풍요를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 그분의 의를 닮아가는 삶, 곧 거룩을 향한 갈증을 약속하셨습니다.

모세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을 직접 뵙고 대화했고, 하나님의 능력을 자신의 삶으로 체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십계명을 받은 후에조차 이렇게 기도합니다.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출33:18).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그 갈망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커집니다.

신학자 랜스키는 이 역설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의에 대한 굶주림과 목마름은 채워지는 그 순간에 오히려 더 커진다고 말입니다. 그것이 의롭게 된 자의 삶의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만일 우리 안에 그 목마름이 없다면, 여전히 나태와 안일 속에 머물러 있다면, 우리는 아직 그 나라에 들어온 사람이 아닐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로마서 7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2~24). 이미 의롭게 되었는데도 옛 사람의 잔재가 여전히 우리를 붙들고 있다는 고백입니다. 그 고통 속에서 "하나님, 저를 도와주세요, 이 옛 사람을 잘라내 주세요" 부르짖는 그 외침이야말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진짜 기도입니다.

시나이 사막에서 물을 향해 행군했던 그 병사들처럼, 오늘 우리도 어느 방향을 향해 걷고 있는지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우리가 목말라하는 것이 카디프의 거짓 거인상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의인지 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그토록 갈망해야 할 물은, 우리 힘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창세전에 성부와 성자 사이에 오간 그 약속을 따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미 우리를 위해 그 우물을 파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다만 목마른 사슴처럼, 그 물을 향해 달려가면 됩니다. 그리고 그 갈망이 있는 곳에 진짜 신앙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