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한계시록 17장 9~17절
"지혜 있는 뜻이 여기 있으니 그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요. 또 일곱 왕이라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다른 하나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르면 반드시 잠시 동안 머무르리라. 전에 있었다가 지금 없어진 짐승은 여덟째 왕이니 일곱 중에 속한 자라 그가 멸망으로 들어가리라. 네가 보던 열 뿔은 열 왕이니 아직 나라를 얻지 못하였으나 다만 짐승과 더불어 임금처럼 한동안 권세를 받으리라. 그들이 한 뜻을 가지고 자기의 능력과 권세를 짐승에게 주더라. 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 또 천사가 내게 말하되 네가 본 바 음녀가 앉아 있는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니라. 네가 본 바 이 열 뿔과 짐승은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의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 이는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그들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그들의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시되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심이라."
일요일 오전, 어느 교회 예배당 뒷줄에 중학생 민수와 할머니가 나란히 앉아 있습니다. 목사가 요한계시록 17장을 읽어 내려갑니다. 머리가 일곱, 뿔이 열 달린 짐승과 그 위에 올라탄 여인, 민수는 속으로 괴물 영화 같다고 생각하고, 시장에서 채소 장사를 하는 할머니는 무슨 말인지 몰라도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러나 이 본문은 괴물 영화가 아닙니다. 월요일 아침 교실과 시장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하늘의 눈으로 그려 놓은 그림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먼저 이 짐승의 정체를 밝힙니다. 일곱 머리는 일곱 왕이고, 그중 다섯은 이미 망했고, 하나는 지금 있고, 다른 하나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이 짐승을 '여덟째 왕'이라고도 부릅니다. 머리가 일곱이어도 몸통은 하나라는 뜻입니다. 애굽,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로마,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던 세력은 쓰러졌다 싶으면 이름과 얼굴만 바꿔 다시 일어났습니다. 망치로 때리면 옆 구멍에서 또 올라오는 두더지 잡기 게임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 게임에는 끝이 있습니다. 지나간 세력도, 지금 우리를 괴롭히는 세력도, 마지막에 발악할 세력도 모두 멸망의 불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이 짐승을 지금 당장 치우지 않으실까요? 짐승의 허리는 이미 십자가에서 꺾였습니다. 다만 줄에 묶인 사나운 개가 줄 길이만큼만 달리고 짖을 수 있듯, 하나님은 말세 동안 그 힘을 잠시 허락하셨습니다. 그 소란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거룩해지고 자라 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줄은 언제나 주인께서 쥐고 계십니다.
17장 14절은 이 모든 싸움을 한 줄로 요약합니다. 짐승과 열 왕이 어린양과 싸우지만, 어린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이기십니다. 이 장면은 16장의 아마겟돈 전쟁을 떠올리게 합니다. 개구리 같은 더러운 영 셋이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와 세상 왕들을 전쟁터로 몰아가는 장면입니다. 왕들은 제 뜻대로 움직인다고 믿지만 실은 거짓 영에 조종당하는 꼭두각시입니다. 그런데 '만 왕의 왕, 만 주의 주'는 본래 구약에서 하나님만 가리키던 이름입니다. 어린양 예수가 곧 하나님이시라는 선언입니다. 세상 권력자들이 아무리 기고만장해도 결국 그분의 발등상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 사자나 독수리가 아니라 하필 '어린양'이 싸움의 상대일까요? 이 이름에는 십자가 이야기가 통째로 담겨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 어린양은 제사에 쓰는 짐승이었습니다. 죄지은 사람 대신 흠 없는 양이 죽었습니다. 교실 유리창을 깬 아이 대신 선생님이 변상하고 교장실에서 허리를 숙이는 장면을 떠올려 보십시오. 예수는 하나님이시면서도 그 선생님보다 훨씬 더 낮은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자신을 비워 원수를 위해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점도 흠도 없이 사시다가 제물로 드려지셨고, 다시 살아나셨고, 우리 자리를 마련하러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세상은 바로 이 내용을 거짓된 철학과 사상과 교리로 공격합니다. 그래서 전쟁의 상대가 어린양입니다.
이 어린양 곁에는 늘 함께 선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그들을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이라 부릅니다. 성도입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치르는 영적 전쟁은 무엇일까요? 밤마다 꿈에 귀신이 나오는 일도, 공포 영화 속 퇴마 장면도 아닙니다. 어린양이 사신 방식으로 어린양과 함께 사는 것, 그것이 어린양의 전쟁입니다.
민수와 할머니의 하루로 들여다보면, 민수네 반에서는 성적이 곧 힘입니다. 등수가 낮은 아이는 놀림감이 되고, 센 아이 곁에 붙어야 안전합니다. 세상은 "남을 밟고 올라서야 내가 산다"고 가르칩니다. 어린양은 정반대로 사셨습니다. 원수를 위해 목숨까지 내놓으셨습니다. 민수가 시험 전날 외톨이 짝에게 자기 필기 노트를 선뜻 빌려주는 일, 그 작은 손해를 기꺼이 택하는 것이 전쟁입니다.
할머니의 채소 가게에는 저울이 있습니다. 눈금을 살짝만 속이면 하루에 몇천 원이 더 남습니다. 아무도 모릅니다. 세상은 "나만 좋으면 된다, 들키지만 않으면 괜찮다"고 속삭입니다. 어린양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흠 없이 사셨습니다. 이득을 눈앞에 두고도 저울을 정직하게 달고 덤을 한 줌 얹어 주는 할머니의 손이 전쟁터의 손입니다.
시험 전날 밤 민수는 기도합니다. "하나님, 100점 맞게 해 주세요." 세상은 하나님마저 내 소원을 이뤄 주는 도구로 쓰라고 부추깁니다. 어린양은 아버지의 뜻 앞에 자신을 꺾으셨습니다. 결과가 기대에 못 미쳐도 "하나님이 제게 겸손과 인내를 가르쳐 주셨네요, 감사합니다" 하고 고백할 수 있다면, 그 기도는 이미 승리한 기도입니다.
한때 『다빈치 코드』나 『예수는 없다』 같은 책이 불티나게 팔렸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 부활도 승천도 없었다는 이야기에 세상이 열광했습니다. 예수와 아무 상관 없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고소해했을까요? 스스로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 교만에게는 "나는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죄인이며, 나를 위해 죽으신 하나님이 필요합니다"라는 고백이 가장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그 고백을 끝까지 붙드는 사람이 전쟁 중인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이 짐승은 어디에 있을까요? 17장 15절은 음녀가 앉은 '많은 물'을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라고 풀어 줍니다. 곧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전체입니다. 시편 기자는 원수들을 '깊은 물'이라 불렀고, 이사야는 앗수르를 넘쳐흐르는 큰 강물에 빗댔습니다. 물이 곧 짐승이라는 말입니다. 물고기는 평생 물속에서 살지만 물을 본 적이 없습니다. 너무 가까이 있어서 물인 줄도 모릅니다.
짐승도 그렇습니다. 먼 나라, 먼 시대에만 있지 않습니다. 교실의 분위기, 손안의 스마트폰, 광고 문구, 시장의 셈법, 뉴스의 논리 속에 이미 풀려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싸우러 어디론가 떠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겹겹이 둘러싸여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 공격은 대개 달콤합니다. 응원하던 팀이 이겼다고 환호하며 진 쪽의 눈물은 잊어버리는 일처럼, 죄인 줄도 모르고 재미로 넘기는 일이 많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로마서 12장 2절에서 거듭 당부합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고, 그리고 골로새서 3장 2절은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그렇다고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이 직장도 가족도 학교도 버리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 모두가 하나님이 주신 자리이고, 하나님은 그 자리에서 자녀답게 사는 연습을 시키십니다. 할머니는 새벽같이 가게 문을 열고 민수는 책상 앞에 성실히 앉아야 합니다. 돈을 많이 벌어도 좋습니다. 다만 그것을 자랑거리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랑한다는 것은 내 마음이 그 일을 통해 빚어지는 나의 거룩이 아니라 일 자체에 가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12장 3절은 자랑하는 혀를 하나님이 끊으시겠다고 경고합니다.
예수께서 광야에서 사탄에게 받으신 시험도 결국 이 자랑이었습니다. "네가 메시아라면 돌을 빵으로 만들어 봐라.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천사들이 받드는 모습을 보이면 세상이 알아줄 텐데." 힘으로 세상에 자신을 증명해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럴 능력이 충분하셨지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자랑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구하러 오신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대신 오해와 비난과 배반을 감수하고 홀로 외로움을 견디며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그것이 어린양의 길입니다.
성도에게 맡겨진 일도 같습니다. 성도는 이 땅에서 왕 같은 제사장으로 '왕 노릇' 하는 사람들입니다. 왕 노릇이란 자랑하며 군림하는 일이 아니라, 아직 예수를 모르는 하나님의 백성이 돌아오도록 앞서 길을 내는 일입니다. 눈이 펑펑 내린 아침, 아무도 걷지 않은 길에 첫 발자국을 내는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람이 가장 춥고 가장 힘듭니다. 하지만 그 발자국을 따라 뒷사람들이 편히 걷습니다. 그 길에서 오해받고 비웃음을 사더라도, 죽음 너머를 이미 아는 사람은 비웃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며 삶과 입으로 복음을 전합니다.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그 좁은 길을 가는 사람, 성경은 그를 그리스도인이라 부릅니다.
안타깝게도 오늘 어떤 강단에서는 사탄이 예수께 던졌던 그 시험이 거꾸로 성도에게 던져집니다. "예수 잘 믿고 십일조 잘 내면 몇 배로 돌려받는다. 병도 낫고 사업도 되고 자식은 좋은 대학에 간다. 그러니 세상에 보란 듯이 간증이 있는 삶을 살라." 좋은 말처럼 들리지만, 결국 "네가 얼마나 대단한지 세상에 자랑해 봐라, 그러면 인정받는다"는 광야의 속삭임과 같습니다. 용과 음녀와 짐승은 바로 이 힘의 원리로 세상을 미혹하고 하나님의 백성까지 유혹합니다. 그 속삭임을 이겨내는 일이 어린양의 전쟁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이 이야기의 끝을 숨기지 않습니다. 힘의 원리를 따라 자기와 자기 편의 자랑을 위해 시간을 방탕하게 쓰던 자들은 결국 멸망의 불 속으로 던져집니다. 반면 어린양과 함께 서서 어린양처럼 살아낸 사람들은 이깁니다. 월요일 아침 교실로 가는 민수와 시장으로 나가는 할머니의 평범한 발걸음은 사실 그 전쟁의 한복판을 걷는 걸음입니다. 붉은 옷과 금과 진주로 치장하고 세상을 홀리는 세력을 어떻게 분별하며 걸어갈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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