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요한계시록 말씀 묵상

요한계시록 - 하나님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10. 21.

요한계시록 17장 17~18절

"이는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그들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그들의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시되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심이라. 또 네가 본 그 여자는 땅의 왕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 하더라."


신병 훈련소 입소식 날, 한 어머니가 연병장 울타리 너머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머리를 짧게 깎은 아들이 교관의 호통에 맞춰 구보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집에서는 라면 하나도 끓여 달라고 하던 아이였습니다. 저 교관을 붙잡고 우리 아들 좀 살살 시키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때 옆에 서 있던 아버지가 조용히 말했습니다. "
저 사람이 우리 아들을 미워해서 저러는 게 아니야. 저걸 거쳐야 군인이 되는 거야."

성경의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에는 이 장면과 닮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17장에는 금과 진주로 치장하고 금잔을 든 여인, 곧 음녀 바벨론이 등장합니다. 그 화려함으로 세상을 취하게 하고, 짐승과 손잡고 하나님의 백성을 공격하는 세력입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은 자연히 묻게 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왜 저런 세력을 그냥 두시지?

17절이 그 답을 줍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말씀을 이루실 때까지, 그들에게 당신의 뜻을 행하려는 마음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대적의 공격조차 하나님의 손바닥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어머니 눈에는 교관이 무서운 사람으로 보였지만 그 훈련을 짠 사람은 아버지였습니다. 성도의 삶에서 마귀의 공격과 환난은 하나님의 허락 아래 성도를 성숙시키는 훈련 과정으로 쓰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의 삶을 '어린양의 전쟁'이라 부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시려는 것일까요? 성경은 한 사람의 인생으로 그 답을 보여 줍니다. 요셉입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한 열일곱 소년이었습니다. 형들이 땡볕에서 양을 칠 때 그는 채색옷을 입고 다니며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께 일러바쳤습니다. 게다가 형들의 곡식 단이 자기 단에게 절하는 꿈을 꾸고는 그 이야기를 신이 나서 떠벌렸습니다. 형들이 그를 구덩이에 던지고 종으로 팔아넘긴 것은 끔찍한 일이지만, 솔직히 형들의 속이 이해되는 구석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상한 말을 합니다. 종으로 팔려 간 요셉에게 "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보디발의 아내에게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혔을 때도 똑같이 씁니다. 여호와가 함께하시고 그의 범사를 형통케 하셨다는 것입니다. 노예살이와 감옥살이를 두고 '형통'이라니, 우리의 상식으로는 맞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는 형통은 시험에 붙고, 사업이 잘되고, 병이 낫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형통은 다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며 한 사람을 끝까지 빚어 가시는 것입니다. 철없던 채색옷 소년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는 일이 형통이었습니다.

시편 105편은 그 과정이 얼마나 아팠는지 이렇게 적었습니다. 그의 몸이 쇠사슬에 매였고, 그의 혼이 쇠에 꿰뚫리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그 시편은 이유도 함께 밝힙니다. "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 그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다." 요계시록 17장의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실 때까지"와 같은 말입니다. 요셉의 감옥과 성도의 환난은 같은 하나님의 훈련 방식입니다. 세월이 흘러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기근 속에서 자기를 판 형들이 곡식을 구하러 찾아왔습니다. 이때 복수할 수 있었던 요셉은 오히려 형들을 품고 용서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 이야기를 '꿈을 품고 버티면 언젠가 성공한다'는 이야기로 읽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진짜 결말은 총리 자리가 아닙니다. 자기를 판 형들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어떤 일을 시키기 전에 요셉 자신을 먼저 만드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려면 구원을 세 시제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과거형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 순간 죄와 사망에서 이미 건져졌습니다. 다음은 현재형입니다. 건져진 사람은 지금 하나님의 자녀답게 자라 가야 합니다. 마지막은 미래형입니다. 언젠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그 구원이 완성됩니다.

많은 사람이 구원을 과거형에서 멈춥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우리를 건지시고 승천해서 하늘에만 계시면 될 일이었다면, 왜 지금도 성령으로 우리 안에 살고 계시겠습니까? 로마서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화목하게 되었고, 그의 살아 계심으로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죽으심은 구원의 시작이고, 지금 살아 계신 예수께서는 우리 안에서 구원을 계속 이루고 계십니다.

이 이야기는 출애굽의 밤에도 나옵니다. 어린양의 피로 죽음을 넘긴 이스라엘 백성은 유월절 음식을 먹으며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으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이사 가는 날 짐을 싸 놓고 서서 급히 밥을 먹는 모습과 같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가야 할 곳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곳은 가나안이고, 가나안으로 가는 길은 광야를 지납니다. 광야에서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되어야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어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한다"고 요약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환난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고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불 시험을 당하더라도 낯선 일을 만난 것처럼 놀라지 말라고 했습니다. 오히려 로마서 5장은 환난이 인내를, 인내가 연단을, 연단이 소망을 낳는다고 말합니다. 사랑에 관한 말씀을 머리로만 알던 사람이 그 말씀을 삶에서 확인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원수가 필요합니다. 미운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사랑하는 법을 알겠습니까? 환난은 우리가 아는 교리를 삶으로 옮기는 자리입니다.

환난은 또한 우리를 깨우는 알람 같은 역할을 합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들이 법정에서 가장 먼저 후회하는 것은 '시간 있을 때 부모님께 효도할걸'이라고 합니다. 일이 술술 풀릴 때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잊고 삽니다. 우리는 음녀의 금잔에 취하기 쉬운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이 그 달콤함에 취해 누워 있는 것을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이런 시간을 지나고 나면 사람에게 증거가 남습니다. 지독한 일을 당하고도 미워하지 않는 사람, 무너질 상황에서도 평안한 사람을 보면 이웃들이 묻습니다. "
저 사람은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요?" 그 질문 속에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봅니다. 성경은 이것을 성도 된 증거라고 부릅니다.

예레미야는 이 길이 얼마나 힘든지 솔직하게 털어놓은 사람입니다. 그는 "
주께서 나를 속이셨습니다"라고 울부짖었습니다. 예수 믿으면 편해질 줄 알았는데 속았다는 말입니다. 자기가 태어난 날을 저주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만두겠다고 마음먹을 때마다 말씀이 가슴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견딜 수 없었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왜 이런 종들을 그냥 두셨을까요?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하실 일보다 예레미야 자신에게 더 관심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훈련소 연병장에서 수료식 날 어머니는 다시 울타리 앞에 섰습니다. 입소식 때와는 전혀 다른 눈물이었습니다. 아들은 그을린 얼굴로 반듯하게 서 있었고, 어머니에게 거수경례를 했습니다. 어머니는 그제야 알았습니다. 교관은 적이 아니었고, 아버지의 계획은 처음부터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하는 말도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십자가에서 내어 주시면서까지 우리를 자녀로 만들고자 하신 분입니다. 그렇게 고집스럽게 우리를 빚어 가시는 아버지가 실패하실 리 없습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를 힘들게 하는 일이 있다면 놀라지 말고, 그 안에서 아버지의 손을 찾아보십시오. 일찍 항복하고 그분이 이끄시는 길을 걸어가십시오.

세상이 가는 길은 결국 멸망으로 끝납니다. 다니엘서가 2장 4절부터 7장까지 당시의 국제 공용어였던 아람어로 기록된 것도, 하나님이 세상 모든 나라의 흥망을 주관하시며 그들에게도 끝이 있음을 알리시려는 나팔 소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 끝을 향해 가는 사람들과 함께 걷지 마십시오. 말씀이 응할 때까지, 하나님이 우리를 완성하실 때까지, 우리는 이 길을 끝까지 걸어가야 합니다. 예수를 바르게 믿고, 함께 천국에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