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한계시록 17장 6~13절
6 또 내가 보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 내가 그 여자를 보고 놀랍게 여기고 크게 놀랍게 여기니
7 천사가 이르되 왜 놀랍게 여기느냐 내가 여자와 그가 탄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의 비밀을 네게 이르리라
8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땅에 사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놀랍게 여기리라
9 지혜 있는 뜻이 여기 있으니 그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요
10 또 일곱 왕이라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다른 하나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르면 반드시 잠시 동안 머무르리라
11 전에 있었다가 지금 없어진 짐승은 여덟째 왕이니 일곱 중에 속한 자라 그가 멸망으로 들어가리라
12 네가 보던 열 뿔은 열 왕이니 아직 나라를 얻지 못하였으나 다만 짐승과 더불어 임금처럼 한동안 권세를 받으리라
13 그들이 한 뜻을 가지고 자기의 능력과 권세를 짐승에게 주더라
밧모섬 바위 위에서 늙은 사도 요한은 숨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천사가 방금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너에게 음녀의 받을 심판을 보이리라." 그가 기대한 것은 아마 무너지는 성, 쓰러지는 여인, 불타는 도성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눈앞에 나타난 장면은 정반대였습니다. 여인은 무릎을 꿇기는커녕 잔을 높이 들고 있었습니다. 잔 속에 가득한 것은 성도들의 피, 예수의 증인들의 피였고, 여인은 거기에 취해 있었습니다.
요한은 이 장면을 "크게 기이히 여겼다." 원어로는 '따우마 메가', 큰 놀라움입니다. 재판정 방청석에 앉아 유죄 판결을 기다리던 사람이, 피고석에서 샴페인을 터뜨리는 피고를 본 심정이라면 비슷할까요? '이것이 정말 심판이 맞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쓰러지고 세상이 승리의 노래를 부르고 있지 않습니까?'
이 질문은 요한 한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같은 의문 앞에 섭니다. 정직하게 사는 사람은 손해를 보고, 요령껏 사는 사람은 앞서 갑니다. 교회에 열심인 가정에는 병이 찾아오고, 세상 한복판에서 마음껏 사는 이웃은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땅은 점점 나아져 결국 낙원이 되리라고 믿는 후천년설의 낙관론은 6절 앞에서 힘을 잃습니다. 성경이 그리는 성도의 길은 처음부터 지는 것처럼 보이는 길이었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그랬고, 그분의 삶이 곧 하늘나라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6절은 성도를 '예수의 증인', 곧 예수 때문에 죽임을 당한 순교자('마르튀론 예수')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음녀가 높이 든 승리의 잔은 어떻게 된 것일까요? 조선시대 사약을 떠올려 보면 쉽습니다. 사약은 대개 정중하게 사발에 담겨 내려졌습니다. 그릇의 모양만 보고는 그것이 상인지 형벌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음녀의 금잔도 그렇습니다. 그 잔은 우상숭배라는 가증한 독이 든 독배입니다. 그녀는 그 잔에 취해 있고, 취한 자는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요한은 아직 이 비밀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놀랐습니다. 그리고 그 비밀을 이미 전해 받은 오늘의 성도들은 사도 요한이 하늘에서 부러워할 만한 자리에 서 있는 셈입니다.
요한의 놀람에 천사가 답합니다. "왜 기이히 여기느냐. 내가 그 여자와 그가 탄 짐승의 비밀을 이르리라." 짐승은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졌습니다. 천사는 일곱 머리가 '일곱 산'이며 또한 '일곱 왕'이라고 풀어 줍니다. 로마는 일곱 언덕 위에 세워진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해석자들은 일곱 머리를 로마라고 단정합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로마는 분명 교회를 짓밟은 제국이었습니다. 다만 그것은 한 면일 뿐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산'은 세력과 통치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새 타작 기계'로 삼아 산들을 쳐서 부스러기로 만들겠다고 하셨고(사41:15), 바벨론을 향해서는 "온 세계를 멸한 멸망의 산아, 나는 네 대적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렘51:25). 하나님이 무너뜨리시는 악의 권력은 늘 산으로 불립니다.
여기에 숫자 일곱이 더해집니다. 성경에서 일곱은 완전수입니다. 일곱 산은 어느 한 시대, 한 제국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모습을 바꿔 가며 줄기차게 나타나는 악한 권력 전체를 가리킵니다. 애굽이 있었고, 앗수르와 바벨론이 있었고, 로마가 있었고, 그 뒤로도 이름을 바꾼 제국과 이념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열 뿔도 같은 이야기입니다. 다니엘 7장에서 열 뿔은 열 왕, 곧 엄청난 힘과 권세를 가진 세력입니다. 마귀의 세력은 결코 만만하지 않습니다. 산이 일곱이고 뿔이 열이라는 말은, 성도들이 상대하는 대적이 작지 않다는 정직한 경고입니다.
문제는 10절입니다.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다른 이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 구절을 만난 해석자들은 곧바로 달력을 펼쳐 놓고 숫자를 맞추기 시작했습니다. 로마 황제를 순서대로 세어 보면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네로가 다섯이니 여섯째는 베스파시아누스, 일곱째는 예루살렘 성전을 무너뜨린 티투스라는 계산입니다. 그러자 다른 학자가 손을 듭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기독교를 핍박하지 않았으니 빼고, 네로의 환생이라 불린 도미티아누스를 넣자는 것입니다. 또 다른 이는 율리우스 카이사르부터 세어야 한다고 합니다. 네로가 죽은 뒤 몇 달씩 황제 노릇을 한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는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에는 아무도 시원하게 답하지 못합니다. 기준이 사람마다 다르니 결론도 사람마다 다릅니다. 이것은 마치 정답이 하나라고 믿고 맞추다가, 맞추는 사람의 수만큼 정답이 늘어나는 퍼즐과 같습니다.
'다섯 왕국'으로 푸는 해석도 있습니다. 애굽,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가 다섯이고, 요한 당시의 로마가 하나, 로마 이후에 올 세력이 아직 이르지 않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로마는 사라졌고 계시록이 기록된 지 이천 년이 지났습니다. 이천 년 뒤의 성도는 이 구절에서 무엇을 건져야 할까요? 이럴 때 필요한 것은 달력이 아니라 질문입니다. 지금 천사는 무엇에 대한 답을 하고 있습니까? 천사의 설명은 요한의 의문에서 출발합니다. 요한이 놀란 것은 "왜 음녀가 승리자처럼 보이는가"였습니다. 그렇다면 10절은 날짜 맞히기 퍼즐이 아니라 그 의문에 대한 위로여야 합니다. 짐승은 강해 보이지만, 그 일곱 중 다섯은 이미 쓰러졌고 하나만이 남아 있으며 마지막에 발악하다 멸망합니다. 이것이 10절의 요점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한 날이 1944년 6월 6일입니다. 신약학자 오스카 쿨만은 이 사건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설명하는 비유로 즐겨 썼습니다. 상륙의 날(D-Day)에 전세는 결정되었습니다. 그런데 독일이 실제로 항복한 승전의 날(V-E Day)은 이듬해 5월 8일, 거의 열한 달 뒤였습니다. 그 사이에도 전투는 계속되었고 전사자는 오히려 많았습니다. 상륙한 병사가 쓰러지는 모습만 본 사람에게는 이 전쟁이 이긴 전쟁이라고 믿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세는 이미 기울어 있었습니다. 남은 것은 패한 쪽의 마지막 저항뿐이었습니다.
계시록 17장의 '다섯은 망하였고'가 이것입니다. 히브리서 2장 14절은 그리스도께서 사망으로 사망의 세력을 잡은 마귀를 "없이 하셨다"고 말합니다. '카탈게오', 쓸모없게 만들다, 무장해제 시키다라는 뜻입니다. 마귀의 무기는 단 하나, 사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망은 죄가 있는 곳에서만 힘을 씁니다. 죄 없으신 예수는 사망이 가두어 둘 수 없는 분이었고, 그분은 무덤을 깨고 나오셨습니다. 그것도 혼자 나오신 것이 아닙니다. 맏아들이 동생들을 품에 안고 나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감히 이렇게 묻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15:55)
그렇다면 왜 전쟁은 여전히 계속되는 것처럼 보일까요? 일곱 중 하나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지금도 예전의 습관과 성품에 끌려 다니고, 유혹에 넘어지며, 심지어 구원의 확신까지 흔들리는 날을 지납니다. 그것이 '하나는 있고'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이 마지막 세력이 최후의 발악을 하다 심판을 자초할 것입니다. 이것이 '다른 이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입니다.
여기서 8절과 10절이 충돌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8절은 짐승이 "시방 없다"고 하고, 10절은 "하나는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두 구절은 서로 다른 면을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사탄은 성도의 신분과 운명을 뒤집을 수 없다는 점에서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성도를 연단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이 쓰시도록 허락된 범위 안에서는 '있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셨기에 그의 힘은 "임금처럼 권세를 일시 동안" 받은 것입니다(계17:12). 17절은 이것을 아예 못 박습니다. 하나님이 그들 마음에 자기 뜻을 이루고 한마음이 되게 하셨고,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기까지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미 허리가 꺾인 마귀에게 힘을 잠시 쥐여 주십니까? 이유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살전4:3). 그러면 이제 구체적으로 보면, 하나님은 이 '하나'를 남겨 두시고 그것으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첫째 이유는 물에 빠져 본 사람만 아는 것입니다. 수영을 배운 적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물가에 서서 늘 자신만만하게 말합니다. "빠지면 내가 헤엄쳐 나오면 되지." 그런 사람에게 구조대원의 존재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어느 날 실제로 깊은 물에 빠졌습니다. 팔다리를 휘저을수록 몸은 가라앉고, 소리를 질러도 물이 입으로 들어옵니다. 그때 누군가 팔을 붙잡아 끌어올립니다. 평생 그 사람의 얼굴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는 그날 처음으로 구조의 의미를 알았습니다.
로마서 7장의 바울은 바로 그 물속에 있습니다. 선을 원하나 행하지 못하고, 원치 않는 악을 행하는 자신을 봅니다. 죄가 몸속에 내장처럼 붙어 있어 떼어 낼 수 없습니다. 그는 절규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바로 이어 그는 감사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데 곧이어 놀라운 고백이 따라온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감사한 뒤에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구원받았는데도 여전히 물가에서 휘청대는 자신을 봅니다.
새해마다 결심을 세우고 사흘 만에 무너지는 사람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이번에는 정말 끊겠다고 이를 악물었다가 어느 날 다시 같은 자리에 서 있습니다. 이때 사람은 두 가지 길 앞에 섭니다. 자신을 더 다그치거나, 자기에게는 아무 힘이 없음을 인정하고 구조자의 손을 붙잡거나, 바울은 후자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8장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죄를 떨치는 일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하나님이 직접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십자가가 왜 필요했는지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남겨 두신 '하나'는 성도로 하여금 구조자를 알게 하는 물입니다. 초대 교회의 사람들이 "오 거룩한 죄여"라고 고백했다고 전해지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죄를 지어도 좋다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 자신이 이어서 말합니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롬6:1~2). 구조받은 사람이 다시 물속으로 뛰어들겠습니까? 건져 주신 은혜를 알면 알수록, 그 은혜 앞에서 자신을 쳐 가며 하나님의 뜻을 향해 걸어가게 됩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이렇게 보면 성도를 시험하는 마귀는 사실 하나님의 손에 쓰이는 처지입니다. 우주가 성도를 위해 존재하듯 마귀도 성도를 위해 잠시 권세를 부리고 있는 셈입니다.
둘째 이유는 바람이 없는 숲입니다. 1990년대 초 미국 애리조나 사막에 '바이오스피어2'라는 거대한 유리 온실이 만들어졌습니다. 지구의 생태계를 작게 재현하려는 실험이었습니다. 그곳의 나무들은 빠르게 자랐습니다. 날씨는 일정했고 물과 양분은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다 자란 나무들이 스스로 서 있지 못하고 쓰러졌다고 합니다. 알려진 이야기에 따르면 원인은 바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람에 흔들려 본 적이 없는 나무는 자기 몸을 지탱할 단단한 목질을 만들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바람 한복판에 서 있던 교회였습니다. 주님은 이 교회에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고 하시고, 곧 이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마귀의 허리를 이미 꺾으신 분이, 마귀가 교회를 시험하게 두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약속에 답이 있습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이기는 자를 만들고 싶으신 것입니다. 바람이 없는 온실에서는 이기는 자가 자라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도 같은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고 이것을 이른다"고 하시면서 곧바로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라고 덧붙이셨습니다. 평안을 약속하시는 자리에서 환난의 필연을 말씀하십니다. 차라리 "세상에서 너희가 형통하리라"고 하셨으면 듣기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상황이 좋을 때 얻는 평안은 누구나 가질 수 있습니다. 통장 잔고와 건강검진 결과와 자녀의 성적에 따라 오르내리는 평안은 날씨에 따라 출렁이는 기분에 가깝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평안은 날씨와 상관없이 서 있는 나무의 평안입니다. 그 평안을 훈련하시려고 하나님은 바람 한 줄기를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셋째 이유는 아이의 손목을 붙잡는 아버지입니다. 어린아이가 신이 나서 횡단보도로 뛰어듭니다. 아버지는 순간 아이의 손목을 낚아채 끌어당깁니다. 너무 세게 잡아서 아이는 아파서 웁니다. 어른의 눈에는 이렇게 보입니다. 저 손목의 아픔은 학대가 아니라 사랑의 힘입니다. 아이는 그 순간 아버지를 원망하겠지만, 나중에 자라서 그 손을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남의 아이가 길로 뛰어들어도 팔을 붙잡지 않습니다. 팔을 붙잡는 일은 귀찮고 괴로우며, 아이의 울음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가장 못 견디는 것이 자식의 눈물인데도 매를 드는 사람이야말로 진짜 부모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후손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막대기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삼하7:14). 호세아서에서는 더 절절합니다. 하나님은 길을 떠나는 아내 같은 이스라엘 앞에 가시로 길을 막고 담을 쌓으십니다. 그녀가 쫓아가는 연인들에게 닿지 못하게 하시고, 그제야 그녀가 말하게 하십니다.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때의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호2:6~7) 마귀가 유혹하고 성도가 엉뚱한 길로 가려 할 때, 하나님은 이렇게 개입하십니다. 가시가 길을 막고 담이 쌓이면 그 순간은 아픕니다. 그러나 그 아픔 속에서 성도는 알게 됩니다. '아, 이분이 정말 나를 죽도록 사랑하시는 내 아버지구나.' 하나님이 마귀가 잠시 성도를 미혹하게 두시는 것은 이 앎을 위해서입니다.
일본의 작가 미우라 아야코는 폐결핵, 직장암, 관절염으로 평생 병상에 누워 지냈습니다.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병들지 않고 어찌 기도할 수 있으며, 병들지 않고 어찌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병들지 않고 어찌 다른 이의 아픔을 알며, 병들지 않고 어찌 긍휼의 마음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오, 나는 병들지 않고는 인간일 수도 없습니다." 그는 지긋지긋한 병을 감사의 조건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환난 속에서도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는 말은 이런 고백에서 나옵니다.
예수를 믿으면 삶이 쉬워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손대는 것마다 금으로 변했다는 그리스 신화의 미다스 왕처럼, 신앙이 깊어지면 하는 일마다 잘되리라는 기대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보여 주는 하나님은 때로 정반대의 손을 허락하십니다. 만지는 것마다 줄어들고 어긋나는 '마이너스의 손'입니다. 어떤 집사님은 십수 년 쌓은 가게를 한순간에 잃었습니다. 새벽기도에 나가면서도 속으로는 '이럴 거면 왜 믿느냐'는 말이 올라왔습니다. 한동안 그는 하나님을 원망했고, 한동안은 자신을 원망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이런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장사가 잘될 때 자기가 붙잡고 있던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것이 사라진 자리에서 그는 처음으로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고백을 하는 성도들이 교회 안에 적지 않습니다. 신앙이 더 힘든 이유는 사탄은 미혹하고 하나님은 징계하시는, 양쪽에서 압박을 받는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구조가 가리키는 목표는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성도의 거룩입니다. 만사형통과 소원성취만으로 거룩이 영글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무너지고 실패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을 배우고 삶을 배우고 천국의 소망을 더 깊이 새길 수 있다면, 그것은 손해가 아니라 복입니다.
지금 눈앞의 대적이 너무 커 보여 낙심하는 성도가 있다면 이 본문이 말하는 사실은 이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다섯은 망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성도의 양육을 위해 남겨 두신 겨우 하나의 힘으로 훈련에 참여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들은 결국 심판을 받아 멸망하고, 영원한 승리의 면류관은 성도의 몫입니다. 잔을 높이 든 음녀의 모습은 요한이 보았던 것처럼 한동안 승리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잔은 독배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소망을 놓지 말고 힘을 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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