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한계시록 17장 9절, 14~18절
"지혜 있는 뜻이 여기 있으니 그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요. 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 또 천사가 내게 말하되 네가 본 바 음녀가 앉아 있는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니라. 네가 본 바 이 열 뿔과 짐승은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의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 이는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그들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그들의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시되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심이라. 또 네가 본 그 여자는 땅의 왕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 하더라."
은행 창구에서 오랫동안 일한 사람들에 대해 흔히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위조지폐를 가려내는 법을 가르칠 때, 가짜를 잔뜩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진짜 돈만 몇 달씩 만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진짜의 감촉과 무게와 종이 결이 손에 익으면, 가짜는 눈으로 확인하기도 전에 손끝에서 먼저 "이상한데" 하는 느낌이 옵니다. 가짜를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진짜를 깊이 아는 사람이 가짜를 알아봅니다. 이 이야기를 기억해 두고 요한계시록 17장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우리는 어린양의 전쟁을 배웠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귀의 세력, 곧 용과 짐승과 음녀가 어린양 예수와 싸우는 전쟁입니다. 놀라운 것은 예수께서 싸우시는 방식입니다. 사자나 독수리처럼 힘으로 짓누르시는 것이 아니라, 힘없고 약해 보이고 늘 지는 것처럼 보이는 어린양의 모습으로 싸우셨습니다. 져 주고, 용서하고, 참고, 사랑하고, 오해를 뒤집어쓰고, 외롭게 걸어간 그 삶이 사실은 가장 큰 승리였습니다. 그분 곁에 선 사람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은 진실한 자들도 같은 모습으로 싸워야 합니다.
문제는 적이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적은 어느 특정한 나라나 시대, 인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철학과 사상, 문화와 유행, 시대정신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세상 깊숙이 스며 있습니다. 게다가 음녀는 붉은 옷에 금과 진주와 보석을 두르고 나타납니다. 매력적입니다. 그러니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어느새 그 잔을 받아 마시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위조품 가득한 세상에서 진짜와 가짜를 어떻게 가려낼 수 있을까요? 요한계시록 17장 9절이 답을 줍니다. "지혜 있는 뜻이 여기 있으니." 여기에 지혜를 가진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지혜'는 헬라어로 '소피아', 히브리어로 '호크마'입니다. 잠언 3장 15절은 이 지혜를 이렇게 말합니다.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네가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도 비교할 수 없도다." 음녀가 사람들을 홀리려고 들고 나온 것이 금과 보석과 진주였습니다. 성경은 "그 진주보다, 세상이 주는 힘과 매력보다 지혜를 구하라"고 말하는 셈입니다.
그러면 지혜란 무엇입니까? 잠언 8장은 지혜가 땅이 생기기 전, 하나님이 하늘을 지으시기 전부터 창조자 곁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 곁에서 날마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었다는 이 존재가 바로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지혜는 똑똑함이나 처세술이 아니라 예수라는 분 자신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5장은 "술 취하지 말라"고 권하며 그 앞에서 "지혜 있는 자같이 행하라"고 합니다. 왜 사람이 술에 취합니까? 지혜가 없어서입니다. 음녀가 건네는 진노의 포도주에 취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려면, 예수가 누구이시며 어떤 삶을 사셨고 왜 이 땅에 오셔야 했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은행원이 진짜 지폐를 손에 익히듯, 그리스도인은 진짜이신 예수를 깊이 알아야 가짜를 알아봅니다.
그 예수를 어디서 만납니까? 부활하신 예수께서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에게 하신 일이 힌트입니다. 그분은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해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풀어 주셨습니다. 구약의 성경이 곧 자기를 증거한다고도 하셨습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분, 어린양 예수에 관한 책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흔히 성경을 '하나님을 잘 이용해서 잘 먹고 잘사는 비법서'쯤으로 오해합니다. 성경은 오히려 정반대의 삶, 곧 나를 죽여서 남을 살리시는 어린양의 성품과 삶의 원리를 가르치는 책입니다. 이 삶을 배우고 연습하고 훈련하는 것이 신앙생활이며, 성경은 이것을 '거룩'이라 부릅니다. 퇴근 시간 지하철역에서 모든 사람이 한 방향 출구로 쏟아져 가는데 한 무리가 조용히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세상이 가는 방향에서 떨어져 나와 어린양이 가신 길로 구별되어 가는 것, 그것이 거룩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삶의 매뉴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목사의 아내는 매뉴얼 읽기를 질색해서, 휴대전화로 걸고 끊는 일밖에 못 했습니다. 벨소리를 바꾸는 법도 몰랐고, 집에서 혼자 영화 한 편 보려 해도 기계를 연결하지 못해 쩔쩔맸습니다. 기계도 매뉴얼을 모르면 가진 기능의 절반도 못 씁니다. 하물며 사람은 어떻겠습니까? 인간이 어떤 존재이며, 지금 어떤 전쟁터에 서 있고, 어떻게 살아야 진짜 행복한지를 알려 주는 매뉴얼을 읽지 않으면, 하나님이 마련하신 기쁜 삶의 기능을 하나도 쓰지 못한 채 살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매뉴얼을 잔소리로 여깁니다. 이스라엘이 그랬습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던 에브라임과 유다는 이사야 28장 10절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흉내 냈습니다. "차브 라차브, 차브 라차브, 카브 라카브, 제에르 샴…" 이 말은 특별한 뜻이 있는 낱말이 아닙니다. 아이에게 걸음마를 가르칠 때 쓰던 소리요, 술 취한 사람의 주정 같은 소리였습니다. 우리말로 하면 "얼렐레 까꿍"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른이 어린아이에게 하는 유치한 잔소리쯤으로 깔본 것입니다.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하나님은 호세아를 통해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곳에는 저주와 거짓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이 가득합니다. 두 나라는 결국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같은 호세아서 6장 1~3절에 길이 하나 열려 있습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멸망을 피하는 길은 말씀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힘써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아 가면 무엇이 달라집니까?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위해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지식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구한다." 하나님의 충만이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것, 곧 거룩, 사랑, 온유, 절제, 인내, 용서를 말합니다. 성경은 그것을 한마디로 '사랑'이라 부릅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1장 5절은 말씀의 목적이 사랑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방대한 '잔소리'를 남기신 까닭은, 그 말씀을 통해 우리 안에서 참된 사랑이 자라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증거가 바울 자신입니다. 그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옥에 가두고 죽이는 일에 찬성표를 던지던 사람이었습니다. 스스로도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였다고 고백합니다. 독설을 퍼붓고, 남을 박해하고, 오만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바울이 후에는 이렇게 변했습니다. "욕을 먹으면 축복하고, 핍박을 받으면 참고, 비방을 당하면 도리어 달래 권한다." 무엇이 이 사람을 바꾸었습니까? 다메섹 길에서 만난 예수였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통해 예수를 제대로 만난 사람은 이기적인 마음을 조금씩 내려놓고 사랑하는 사람으로 빚어져 갑니다.
그렇다면 어린양의 전쟁은 어디서 치러집니까? 해외 선교지나 산속 기도원이 아닙니다. 아침에 눈뜨는 순간부터 잠들 때까지의 일상이 전쟁터입니다. 짜증 나는 가족을 한 번 더 참아 주는 일, 억울해도 따지지 않고 먼저 져 주는 일이 모두 전투입니다. 구원이 이미 끝났다고 여겨 자기 거룩을 돌보는 일에 소홀해지는 경향이 있다면,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에베소서 1장은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신 것이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들 삼으신 것은 이미 이루어진 일이지만, 아들 된 자는 지금도 그 모습으로 자라 가는 중입니다.
예수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신 것은 몸이 자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하려 하심입니다. 그 자람의 길 위에서 음녀는 금잔과 진주를 들고 방해합니다. 그것이 어린양의 전쟁입니다. 넘어지는 날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빌립보서 1장 6절은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확신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착한 일'은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신 그 '좋은 일', 곧 새 창조를 뜻합니다. 이미 시작된 새 창조는 반드시 완성됩니다.
사람들은 사랑을 너무 쉽게 생각합니다. 청춘 남녀가 만나 가슴이 불타는 감정을 사랑이라 부르지만, 그것은 열정이고 열정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사랑은 그 열기가 식은 뒤에야 시작된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어느 노부부를 생각해 보십시오. 할머니는 오십 년 넘게 할아버지의 서툰 성격을 받아 주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시장 가는 길에 말없이 앞서 걸어가도 투덜대지 않았고, 몇 해 전 큰 오해로 속상한 날에도 저녁상을 거르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상한 날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래도 참아 주고 품어 주고 용서하며 살았습니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나를 죽여 상대를 살리는 일이니 때로는 애가 끊어지게 아픕니다.
그렇게 애가 끊어져도 상대를 위해 참고 져 주고 용서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천국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그 나라의 시민으로 자라 가는 중입니다. 이 사랑은 하루아침에 솟아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평생 이어지는 싸움이라 부릅니다.
그렇다면 이 싸움을 이기려면 무엇이 필요합니까? 지혜입니다. 지혜는 어디에 있습니까? 성경에 있습니다. 은행원이 진짜 지폐를 매일 만지며 가짜를 가려내는 눈을 얻듯, 그리스도인은 매일 말씀을 펴서 진짜이신 어린양 예수를 알아 갑니다. 그 앎이 쌓일수록 음녀의 금잔은 시들해 보이고, 어느덧 사랑이라는 열매가 자라납니다. 이제부터라도 말씀 앞에 진지하게 앉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진짜를 아는 사람은 가짜에 흔들리지 않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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