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한계시록 18장 1-4절
"그 뒤에 나는 다른 천사가 큰 권세를 가지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땅은 그의 영광으로 환해졌습니다. 그는 힘찬 소리로 외쳤습니다. "무너졌다. 무너졌다. 큰 도시 바빌론이 무너졌다. 바빌론은 귀신들의 거처가 되고, 온갖 더러운 영의 소굴이 되고, 더럽고 가증한 온갖 새들의 집이 되었구나!" 이는, 모든 민족이 그 도시의 음행에서 빚어진 분노의 포도주를 마시고, 세상의 왕들이 그 도시와 더불어 음행하고, 세상의 상인들이 그 도시의 사치 바람에 치부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하늘에서 또 다른 음성이 울려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내 백성아, 그 도시에서 떠나거라. 너희는 그 도시의 죄에 가담하지 말고, 그 도시가 당하는 재난을 당하지 않도록 하여라."
어느 지방 도시 한복판에 한때 이름을 날리던 호텔이 있었습니다. 대리석이 깔린 로비에는 커다란 샹들리에가 걸렸고, 결혼식과 회갑연이 줄을 이었습니다. 도시 사람들은 그 앞을 지날 때마다 괜히 옷매무새를 고쳤습니다. 그러나 호텔은 어느 해 부도가 났고, 문은 굳게 닫혔습니다. 십 년이 지난 지금 유리창은 깨지고 로비 바닥에는 비둘기 똥이 쌓였습니다. 밤이면 길고양이들이 드나듭니다. 그 앞을 지나는 아이들은 말합니다. "저기 귀신 나온대."
사도 요한이 환상 속에서 본 바빌론의 마지막 모습이 꼭 그랬습니다. 하늘에서 큰 권세를 가진 천사가 내려오자 온 땅이 환해졌고, 천사는 힘차게 외쳤습니다. "무너졌다, 무너졌다. 큰 도시 바빌론이 무너졌다!" 한때 온 세상이 우러러보던 도시는 귀신들의 거처가 되고, 더러운 영과 가증한 새들의 소굴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 장면이 낯익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계시록 14장에서도 똑같은 외침이 들렸습니다. 17장에서 음녀 바빌론의 멸망을 보여 주신 하나님은 18장에서 같은 내용을 다른 장면으로 다시 보여 주십니다. 요한계시록은 입체 영화관처럼 같은 사건을 각도를 바꿔 가며 거듭 비춰 주는 책입니다. 하나님이 같은 말씀을 되풀이하시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빌론의 권세 아래서 핍박받던 성도들을 위로하시려는 것입니다. "저 화려한 세력은 반드시 무너진다. 그러니 지치지 말아라."
구약에도 이런 말씀이 가득합니다. 이사야는 바빌론이 소돔과 고모라처럼 되어 들짐승과 타조만 깃들 것이라고 했습니다. 에돔과 니느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스바냐는 니느웨가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하던 성이었다고 기록합니다.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 이스라엘을 짓밟으며 권세를 뽐내던 도시는 결국 들짐승이 엎드리는 폐허가 되었습니다.
귀신의 처소, 더러운 영, 가증한 새는 모두 천국의 상징인 생명, 기쁨, 빛과 정반대입니다. 붉은 옷에 금과 진주로 치장한 바빌론은 겉으로는 활기차 보이지만 그 실체는 죽음과 어둠입니다. 그리고 이 겉과 속의 차이를 알아보는 눈은 오직 하나님의 백성에게만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또 다른 음성이 들립니다. "내 백성아, 그 도시에서 떠나거라."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바빌론에서 나오라는 말씀을 듣는 교회 안에 바빌론의 방식이 들어와 앉아 있습니다. 계시록 18장 3절은 땅의 상인들이 "사치의 세력으로 치부했다"고 말합니다. 돈과 힘이 곧 능력이라고 믿는 세상의 원리를 말합니다.
어느 작은 교회에 큰 회사를 경영하는 사장님이 등록했습니다. 소문이 돌자 교회가 들썩입니다. 목회자는 속으로 헌금과 건축을 계산하고, 성도들은 "이제 교회가 살겠구나" 하고 기대합니다. 같은 주일에 폐지를 주우며 살아가는 할머니도 예배당 맨 뒷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그러나 할머니에게 눈길을 주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두 사람이 똑같이 예수를 믿는다면 누가 교회에 더 득이 되는 사람일까요? 사람들은 쉽게 "사장님"이라고 대답합니다. 그 대답이 바로 사치의 세력이 교회 안에서 힘을 쓰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을 일이라고 하실까요? 사람들이 예수께 물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일을 하겠습니까?" 예수께서는 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이를 믿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의 일은 내가 예수를 잘 믿게 되는 것이고, 나를 통해 다른 사람도 예수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일에는 부자도 쓰이지만 가난한 사람도 똑같이 귀하게 쓰입니다. 부자가 행복해 보이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기뻐할 조건을 이미 갖췄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다릅니다. 기뻐할 조건이 하나도 없는데도 예수 때문에 환하게 웃습니다. 이웃의 누군가는 폐지 수레를 끄는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묻습니다. "저 할머니와 나의 차이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 하나뿐인데, 도대체 그 예수가 어떤 분이길래?" 그 순간 할머니는 자기의 가난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일부러 가난해지라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이 가난도, 병도, 사업의 실패도 우리가 예수를 더 깊이 알아 가는 도구로 쓰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큰일을 해낸 사람들은 어떨까요? 다윗이 대표적입니다. 그는 소년 시절 물맷돌로 골리앗을 쓰러뜨렸고, 자기를 죽이려던 사울 왕을 죽일 기회가 있었는데도 놓아 주었습니다. 마침내 왕이 된 다윗은 하나님께 집을 지어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언제 너에게 내 집을 지어 달라고 했느냐? 양을 치던 너를 데려다 왕으로 세우고 원수를 물리쳐 준 것은 바로 나다." 은혜를 베푸는 쪽은 언제나 하나님이고, 사람은 그 은혜를 받는 쪽입니다.
여기에 어린아이의 자전거 타기를 겹쳐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아빠가 뒤에서 안장을 꼭 잡아 주면 아이는 신나게 페달을 밟습니다. 아이는 자기가 잘 타는 줄 압니다. 그러다 아빠가 손을 놓는 순간 쓰러집니다. 그제야 지금까지 자기를 지탱해 준 힘이 아빠의 손이었다는 것을 압니다. 다윗도 그랬습니다. 승리와 영광의 순간마다 하나님이 뒤에서 잡아 주셨는데, 다윗은 자기가 잘하는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손을 놓으셨다고 할 만한 순간에 다윗은 충성스러운 부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했고, 그 사실을 감추려고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죽게 했습니다. 그러고도 죄인 줄 몰랐습니다. 선지자 나단이 찾아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부자가 가난한 사람의 하나뿐인 암양을 빼앗았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다윗은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그런 놈은 죽어 마땅하다!" 나단이 조용히 말했습니다. "당신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 순간 다윗은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지금까지의 승리는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붙잡아 주신 은혜였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 깨달음이 시편 51편에 담겨 있습니다. 그는 "내 마음을 고쳐 주십시오"라고 하지 않고 "내 속에 깨끗한 마음을 창조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고칠 만한 것이 내 안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상한 마음"이라고도 고백했습니다. 내 힘과 정성으로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 "나는 주님 없이는 한순간도 선할 수 없는 죄인입니다" 하고 항복하는 마음, 그것을 성경은 믿음이라고 합니다.
다윗의 고백은 시편 40편으로 이어집니다. 그는 웅덩이와 수렁에서 건져 주신 하나님께 새 노래를 부르며 이렇게 말합니다. "제물을 원하지 않으시기에 내가 말했습니다. 내가 왔습니다. 두루마리에 나를 두고 기록한 대로." 이 말씀은 훗날 히브리서에 다시 나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말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라고 풀어 줍니다. 다윗은 자기의 실패를 통해 자기를 구해 줄 구원자가 오셔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의 끝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죄 사함을 받고 허물을 덮음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사도 바울은 이 노래를 로마서에서 그대로 가져와 다윗의 삶의 결론으로 소개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다윗을 용감한 영웅이나 성공한 왕으로 소개하지 않습니다. 우리 힘으로 이룬 것은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이 은혜였음을 삶으로 보여 주는, 은혜 입은 모든 성도의 얼굴로 소개합니다.
예수께서 산에서 말씀하신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는 말씀도 이와 같습니다. 마음이 가난해야 복을 받는다는 조건이 아닙니다. 이미 복을 받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증상이자 증거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사람의 삶에도 실패와 갈등과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을 허락하십니다. 그 좌절 속에서 사람은 깨닫습니다. "구원자가 없었다면 나는 큰일 날 뻔했구나." 그렇게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으로 빚어지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입니다.
반대로 교회 안으로 들어온 사치의 세력은 이 일을 뒤로 밀어냅니다. 돈과 명예와 외모로 하나님 앞에 설 자격을 얻으려 하고, 더 큰 열심으로 하나님을 감동시키려 합니다. 그 세력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 대신 엉뚱한 일을 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도 부르십니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오너라."
가끔 이런 생각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사람이 이렇게 살아도 되나?" "이런 죄를 짓고도 내가 구원받은 사람이 맞나?" 그때 절망의 구덩이로 떨어질 필요는 없습니다. 다윗처럼 기도하면 됩니다. "하나님, 제 안에서는 선한 것이 나올 수 없습니다. 선한 마음을 창조해 주십시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이런 고백에 이릅니다. "이런 나 때문에 예수님이 오셨구나. 정말 감사합니다." 그 감사가 사람을 조금씩 바꿉니다. 자전거에서 넘어진 아이가 아빠의 손을 더 꼭 붙잡듯이, 실패한 사람은 하나님의 손을 더 꼭 붙잡게 됩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 부끄럽고 추악한 죄조차 유익이 됩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이고, 하나님의 일입니다. 겉은 화려해도 속은 죽음뿐인 도시는 언젠가 폐허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빈손으로 하나님께 항복한 사람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를 붙들고 계신 분이 무너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말씀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요한계시록 - 하나님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 (0) | 2026.10.21 |
|---|---|
| 요한계시록 - 진짜를 알아보는 눈, 어린양의 전쟁, 그 두 번째 이야기 (0) | 2026.10.12 |
| 요한계시록 - 어린양의 전쟁, 물고기는 물을 보지 못한다 (2) | 2026.10.11 |
| 요한계시록 - 다섯은 망하고 하나는 남겨진 이유 (0) | 2026.10.05 |
| 요한계시록 - 금잔을 든 여인, 음녀가 가진 금잔 (0) | 2026.09.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