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솔하게 아무에게나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하지 말며, 네 자신을 지켜 정결하게 하라.”(디모데전서 5:22)
잊을 만하면 다시 들려오는 소식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시작한 일이, 오히려 한 생명을 잃게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최근 귀신을 쫓는다는 축사 과정에서 한 청년이 사망한 사건도 그런 소식 중 하나입니다. 의도는 선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결과는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건 앞에서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안타깝다.” 그러나 안타까움으로 끝내기에는, 이 문제는 너무 무겁고 너무 반복되어 왔습니다.
은사는 ‘권한’이 아니라 ‘책임’입니다. 성경은 귀신을 쫓는 일을 하나의 은사로 말합니다. ‘영들을 분별하는 은사’(고전 12:10). 여기서 ‘영들’은 단수(영)가 아니라 복수입니다. 성령의 역사도 있고, 천사의 역사도 있으며, 악한 영의 역사도 있습니다. 이들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이 분별인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은사를 자동 기능처럼 생각합니다. 마치 버튼만 누르면 작동하는 기계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은사는 칼과 같습니다. 요리사의 손에 들리면 생명을 살리는 도구가 되지만, 훈련되지 않은 사람의 손에 들리면 흉기가 됩니다. 예언도 그렇고, 신유도 그렇고, 축사도 그렇습니다. 받았다고 끝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때부터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병든 몸보다 더 복잡한 것은 병든 영혼입니다. 한 예를 생각해 보면,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분노와 미움을 품고 살다가, 결국 위암 판정을 받았다고 합시다. 그가 기도받고 병이 나았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끝났을까요? 아닙니다. 그 사람 안에 남아 있는 쓴뿌리와 왜곡된 인격이 그대로라면, 병은 다른 모습으로 다시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유 사역은 단순히 “병 고치는 기술”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삶의 태도, 관계, 하나님을 대하는 자세까지 함께 다루는 일입니다.
축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귀신은 단순히 소리 지르고 발작하는 현상만이 아닙니다. 오랜 상처, 왜곡된 자아, 깊은 두려움과 결합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런 존재를 다루는 일이, 어찌 책 몇 권 읽고, 집회 몇 번 참석했다고 감당될 수 있겠습니까.
훌륭한 장인은 혼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목수도, 도공도, 외과의사도 모두 스승 밑에서 배웁니다. 칼을 잡는 법, 힘을 주는 위치, 언제 멈춰야 하는지, 이 모든 것은 경험을 통해서만 전수되는 것입니다. 영의 세계도 다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위험합니다.ㅊ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디모데는 이미 은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 은사가 불붙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안수는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삶과 신학과 태도의 전수였던 것입니다.
안수는 ‘영적 유대’를 맺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안수는 가볍게 여길 일이 아닙니다. 성경은 안수를 신중히 하라고 말합니다(딤전 5:22). 안수는 단순히 능력을 ‘켜는 스위치’가 아닙니다. 그 사람의 영적 성향, 사역의 방향, 세계관이 함께 전해질 수 있습니다. 마치 유전자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잘못된 스승에게 받은 안수는, 나중에 그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 큰 고통을 치르게 합니다. 영적 유대는 쉽게 맺어지지만, 끊는 데는 더 큰 은혜와 더 깊은 회개가 필요하게 됩니다.
축사는 ‘힘의 싸움’이 아니라 ‘권세의 문제’입니다. 문제가 된 사건에서 가장 비극적인 장면은 이것입니다. 사람들이 힘으로 환자를 제압했고, 소리를 막기 위해 입을 틀어막았고, 결국 숨이 막혀 죽었습니다. 이것은 귀신에게 빌미를 준 사건입니다. 귀신은 힘이 아니라, 우리의 실수를 이용합니다.
축사는 인간의 물리력이 개입되는 순간 이미 위험해집니다. 물론 자해를 막기 위한 최소한의 제지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목을 누르고, 배를 누르고, 입을 막는 행위는 기도가 아니라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축사는 오직 하나님이 주신 권세로 행해야 합니다. 힘이 아니라, 명령인 것입니다. 소리가 아니라, 진리인 것입니다.
요즘 병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병원 감염입니다. 고치러 갔다가, 다른 병을 얻고 죽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소독이 귀찮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들고, 비용이 들고, 장비가 빨리 닳기 때문입니다. 영적 사역도 그렇습니다. 자기 점검은 귀찮습니다. 회개는 힘듭니다. 경계는 피곤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을 생략하는 순간, 사역자는 오히려 전염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귀신을 쫓는 사역은 용기가 아니라 겸손이 필요합니다. 열심이 아니라 훈련이 필요합니다. 담대함이 아니라 두려움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 말입니다. 한 순간의 실수는 사역자에게는 경험이 될 수 있지만, 환자에게는 마지막 기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혼자 하지 말아야 합니다. 스승을 찾아야 합니다. 은사를 자랑하지 말고, 다루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은사는 불입니다. 불은 따뜻함을 주지만,
다루지 못하면 집을 태웁니다. 하나님은 능력을 주시되, 그 능력을 다스릴 지혜와 질서 안에서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살리기 위해 시작한 일이 죽음이 되지 않도록, 우리는 더 배우고, 더 조심하고, 더 낮아져야 합니다. 그것이 생명을 다루는 사역자의 길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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