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령과 기름부음

은사의 올바른 이해와 훈련의 필요성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3. 26.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전 12:7,31)

어느 날 아프리카 광산에서 일하던 한 광부가 땅속에서 묵직한 돌덩이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표면은 거칠고 흙투성이였지만, 그는 직감적으로 알았습니다. 이것은 보통 돌이 아닙니다. 며칠 후 전문가의 감정을 거쳐 밝혀졌습니다. 그것은 수억 원짜리 다이아몬드 원석이었습니다. 광부는 기뻐하며 그것을 집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는 그 돌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냥 선반 위에 올려두자니 그저 못생긴 돌멩이처럼 보일 뿐이었습니다. 그 안에 잠든 아름다움을 깨우려면, 숙련된 보석 세공사의 손이 필요했습니다. 은사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 흔히 쓰이는 말이 있습니다. "저분은 은사자야." 신유의 능력이 있거나, 예언을 말하거나, 방언을 하는 사람을 가리켜 우리는 이 한 단어로 뭉뚱그립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표현 속에는 묘한 무관심이 숨어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은사를 가진 사람들을 결코 "은사자"라는 한 단어로 뭉뚱그리지 않습니다. 병을 고치는 사람은 "병 고치는 은사를 받은 자"로, 예언을 말하는 사람은 "예언하는 자"로, 방언을 하는 사람은 "방언 말하는 자"로 각각 다르게 불렀습니다. 각 기능에 고유한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언어 습관의 차이가 아닙니다. 각 은사가 그만큼 고유하고 소중한 사역이라는 신학적 선언입니다.

오케스트라를 생각해 보십시오. 바이올리니스트와 첼리스트와 오보에 연주자를 모두 "악기 연주자"라고만 부른다면, 그것은 각 악기의 고유한 역할과 아름다움을 지우는 일입니다. 지휘자가 단원들의 이름과 악기를 정확히 알고 호명할 때, 비로소 그 연주는 풍성한 화음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은사를 행하는 사람을 그 기능에 따라 정확히 부르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미 그 은사를 사소하게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카리스마, 곧 은사는 문자 그대로 "은혜로 받은 것"입니다. 이 이름 속에는 중요한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은사는 우리의 능력이나 신앙의 깊이나 도덕적 자질로 획득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유로운 뜻에 따라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많은 사람이 이상한 논리적 비약을 합니다. "은혜로 받은 것이니, 내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훈련도 필요 없고, 준비도 필요 없다. 그냥 쓰면 된다." 과연 그럴까요?
우리의 구원을 생각해 보십시오. 구원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구원은 누군가의 눈물 어린 중보기도를 통해, 전도자의 수고로운 발걸음을 통해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그렇다고 그 구원이 인간의 행위로 얻어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수단과 근거는 다릅니다. 중보기도와 전도는 구원의 수단이지 근거가 아닙니다.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간절히 사모하고 구할 수 있습니다. 바울도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전 12:31)고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그 사모함이 은사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사모함은 수단이지 근거가 아닙니다.

다이아몬드는 인간이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지각 깊은 곳에서 수억 년의 압력 속에 형성됩니다. 그것은 순전히 자연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그 원석이 우리가 아는 찬란한 보석이 되기까지는, 숙련된 세공사의 손이 필요합니다. 각도를 계산하고, 빛의 굴절을 이해하며, 수천 번의 섬세한 커팅을 통해 비로소 그 안에 잠든 빛이 세상 밖으로 터져 나옵니다. 같은 원석이라도 세공사의 기술에 따라 그 값은 수십 배, 수백 배 차이가 납니다.

은사가 바로 이 원석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만, 그것을 교회와 세상 앞에 온전히 드러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훈련이 필요합니다. 방언을 받았다면 그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공동체에 덕이 되는지를 배워야 합니다.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면 예언을 어떻게 분별하고 전달해야 상처가 아닌 치유가 되는지를 훈련해야 합니다. 신유의 능력이 있다면 그것이 언제, 어떻게,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사용되어야 하는지를 익혀야 합니다.

실제 사례를 보면, 어떤 사람이 예언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처음 몇 번은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경이로워했고, 그 자신도 흥분했습니다. 그런데 훈련이 없었습니다. 때와 장소를 분별하지 못했습니다. 공적인 예배 자리에서 갑자기 일어나 개인을 향해 예언을 선포했고, 그것이 맞지 않았을 때 교회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능력은 있었지만 지혜가 없었던 것입니다.

처음 운전면허를 딴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차는 있고 기름도 있습니다. 그러나 도로의 규칙을 모르고, 교차로 진입법을 모르고, 밤길 운전의 감각이 없다면, 그 차는 축복이 아니라 위험이 됩니다. 은사도 그렇습니다. 훈련 없이 사용하는 은사는 교회에 덕을 세우기는커녕 상처와 분란을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이 상처들이 쌓이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교회 공동체는 은사 전체를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저것 봐라, 저게 은사야?" 결국 진짜 은사까지 부정당하는 비극이 생깁니다. 훈련받지 못한 한 사람의 미숙함이 공동체 전체를 은사 혐오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가장 안타까운 현실은 이것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은사를 받지만, 머지않아 그 은사를 소멸시키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시는 목적은 분명합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 교회를 세우고, 사람을 살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은사를 받은 사람이 훈련이 없어서 계속 문제를 일으키고, 교회에 상처를 주고, 공동체를 분열시킨다면, 하나님은 그 은사를 거두실 수 밖에 없습니다. 마치 어린아이에게 날카로운 칼을 주었는데 계속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한다면 그 칼을 도로 가져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어떤 이들은 반론을 제기합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 하셨잖아요"(롬 11:29).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눈으로 보고 있지 않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구원이라는 가장 큰 은사를 받고도 중도에 이단으로 빠져나가는지를, 얼마나 많은 사람이 복음의 선물을 받고도 결국 딴 길로 가는지를, 하나님의 뜻은 분명하지만, 인간의 응답은 여전히 자유롭고 그 자유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이제 우리 교회는 은사에 대한 시각을 근본부터 다시 세워야 합니다. 은사는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말한 대로 은사의 궁극적인 정점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입니다(롬 6:23). 영생이 소중하듯, 모든 은사는 소중합니다. 어떤 행정 조직도, 어떤 제도도 이 은사의 가치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두 가지 일을 해야 합니다. 첫째, 은사를 행하는 사람들을 그 기능에 따라 정확하게 불러야 합니다. "은사자"라는 모호한 이름 뒤에 그들을 숨기지 말고, 예언 사역자는 예언 사역자로, 치유 사역자는 치유 사역자로 그 가치를 인정하며 불러야 합니다.

둘째,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반드시 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교회가 그 길을 열어주어야 합니다. 원석은 땅에서 나옵니다. 하지만 보석은 세공사의 손에서 탄생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원석을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그 원석을 정성껏 다듬어 그분의 영광을 환히 반사하는 보석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 일이 바로 훈련이요, 그 훈련이 바로 은사를 은사답게 하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