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디모데후서 2:15)
어느 해 겨울, 한 신학생이 처음으로 병원 심방에 나섰습니다. 그는 기도의 응답을 여러 차례 경험한 청년이었고, 자신에게 신유의 은사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병실 문 앞에서 잠시 심호흡을 하고 들어간 그는 암 투병 중인 중년 남성의 침대 곁에 앉았습니다. 그리고는 그가 아는 유일한 방법으로 손을 얹고 기도했습니다. 환자는 고맙다며 눈물을 흘렸고, 그 청년도 울었습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의 가슴 한 편에는 뭔가 모를 허전함이 남았습니다. 기도는 했는데, 과연 나는 그 사람을 제대로 도운 것일까!
그 허전함이 바로 훈련의 시작점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능력을 받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능력은 출발점이지 종착점이 아닙니다. 병사가 총을 지급받는다고 해서 곧장 전쟁터에 투입되는 것이 아니듯, 은사를 받은 사람은 그 은사를 제대로 다루는 법을 반드시 배워야 합니다. 능력 자체에 부족함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받아 쓰는 사람이 아직 미숙하기 때문입니다. 훈련이 선행되든 소임을 받은 이후에 뒤따르든, 순서야 어떠하든 훈련이라는 과정은 생략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 훈련하는 것일까요?
첫째, 은사의 성격을 발견하기 위해서입니다. 신유의 은사를 받았다고 해서 모두 같은 신유를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의 병든 지체를 돌보는 일에 쓰이는 사람과, 더 넓은 영역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증언하도록 부름받은 사람은 그 기술의 깊이와 범위가 다릅니다.
앞서 그 청년이 병실에서 경험한 것처럼, 손을 얹는 것이 언제나 정답은 아닙니다. 때로는 명령해야 하고, 때로는 멀리서 중보해야 하며, 때로는 특별한 수단이 필요한 경우도 있습니다. 치유가 즉각 일어날 것인지, 며칠에 걸쳐 이루어질 것인지를 분별하는 것도 별도의 기술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은사의 성격 안에 포함되어 있으며, 그 성격은 오직 시간과 경험을 통해 조금씩 드러납니다.
둘째, 은사를 사용하는 방법을 익히기 위해서입니다. 사역 현장에서 초보 사역자를 가장 당황하게 만드는 것은 예측하지 못한 증상들입니다. 환자의 몸이 갑자기 떨리거나, 함께 있던 동행자가 울음을 터뜨리거나, 사역자 자신이 갑자기 극심한 피로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성경 어디에도 이런 상황에 대한 매뉴얼은 없습니다.
그 청년은 나중에야 자신이 그날 병실에서 느꼈던 막막함이, 바로 이 영역에서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경험 많은 지도자의 안내를 받으면 실수를 거쳐야만 배울 수 있는 것들을 미리 익힐 수 있습니다. 방법이 많을수록 성공의 가능성도 높아집니다.
셋째, 사역을 통해 얻게 될 유익을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저마다의 사역자를 통해 자신의 특정한 속성을 드러내십니다. 어떤 이는 "인내하시는 하나님"을 드러내도록 부름을 받아, 그에게 오는 사람들은 대체로 인내의 문제로 신음하는 이들입니다.
어떤 집회에서는 오직 믿음만 강조되고, 어떤 집회에서는 회개만 외쳐집니다. 이것은 그 사역자의 편협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사람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시는 속성의 반영입니다. 따라서 사역자는 자신이 어떤 유익을 전달하도록 부름받았는지를 먼저 파악해야 하며, 그 이해 없이는 은사가 엉뚱한 방향으로 낭비될 수 있습니다.
넷째, 주된 은사와 연관된 은사를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은사도 홀로 완전하게 작동하지 않습니다. 신유의 은사는 영분별의 은사가 더해질 때 훨씬 빛을 발하고, 지식의 말씀과 지혜의 말씀은 거의 필수적인 동반자입니다. 문제는 많은 사역자들이 보조적으로 주어진 은사를 주된 은사로 착각하는 데서 생깁니다. 신유를 위해 보조적으로 주어진 예언의 기능을 자신의 주된 은사로 오해하고 함부로 예언을 남발하다가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주된 것과 보조적인 것을 구별하는 분별력, 그것 역시 훈련 없이는 얻어지지 않습니다.
다섯째, 주의 백성을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사역자의 자리는 심판관이나 동정자가 아니라 중재자입니다. 문제를 가지고 오는 사람 뒤에는 반드시 그 문제의 배경이 있습니다. 죄와 허물, 상처, 그리고 그 상처로 인해 고통받는 또 다른 사람들인 가해자와 피해자를 동시에 품고 서로를 화해시키는 자리, 고백과 용서가 만나는 자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 사역자의 부르심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섬세하고 어려운 일인지는 실제로 그 자리에 서본 사람만이 압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바르게 서기 위해서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신학생은 이후로 오랜 세월 동안 자신보다 앞서 사역하는 선배 곁에서 배웠습니다. 수없이 실수했고, 수없이 되물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수술 후 회복 중인 한 여성을 위해 기도하다가 처음으로 "지금은 손을 얹는 것이 아니라 멀리서 중보할 때"라는 내적 확신을 경험했습니다. 그 확신이 어디서 온 것인지 그는 알았습니다. 오랜 훈련이 쌓인 자리에서 온 것이었습니다.
은사는 하나님이 주십니다. 그러나 그 은사가 사람에게 닿아 생명을 살리는 일은, 훈련이라는 긴 통로를 거쳐서야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그 통로가 때로 고통스럽고 더디게 느껴지는 것은, 하나님이 그 과정을 통해 우리 자신도 함께 빚으시기 때문입니다.
'성령과 기름부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은사훈련 - 은사를 온전케 하는 길(2) (0) | 2026.03.28 |
|---|---|
| 은사훈련 - 은사의 올바른 이해와 훈련의 필요성 (0) | 2026.03.26 |
| 하늘 문은 축복의 창고인가 (2) | 2026.03.13 |
| 마음 청소를 통한 주님과의 친밀함 (1) | 2026.03.13 |
| 영적 직임을 발견하고 헌신하기 (1) | 2026.03.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