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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과 기름부음

성령의 은사 - 주된 은사와 보조적 은사의 유기적 협력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3. 29.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고린도전서 12:7~11)

오케스트라 공연을 본 적이 있습니까? 무대 위에 수십 명의 연주자가 자리를 잡습니다. 어떤 이는
바이올린을, 어떤 이는 첼로를, 어떤 이는 오보에를, 어떤 이는 팀파니를 듭니다. 지휘자의 손이 올라가는 순간 각각의 악기들은 저마다의 소리를 냅니다. 그런데 그 소리들이 단순히 뒤섞이는 것이 아닙니다. 현악기의 선율이 목관악기의 색채를 받쳐주고, 금관악기의 울림이 타악기의 리듬 위에 얹힙니다. 악기들은 서로를 필요로 하며, 그 유기적인 협력 속에서 비로소 하나의 교향곡이 완성됩니다. 성령의 은사도 이와 같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는 아홉 가지 신령한 은사가 열거됩니다.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치는 은사, 기적을 행하는 은사, 예언, 영 분별, 방언, 방언 통역이 그것입니다. 오랫동안 이 아홉 가지를 동렬에 놓고 바라보는 시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은사들을 자세히 살피면 그 가운데 뚜렷한 역할의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신유(병 고치는 은사), 예언, 영 분별, 기적을 행하는 은사, 이 네 가지는 말하자면 '주된 은사'입니다. 이것들은 직접적으로 영적 결과를 만들어냅니
다. 병든 자가 일어나고, 숨겨진 것이 드러나고, 귀신이 쫓겨나고,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뀝니다. 이에 비해 나머지 다섯 가지인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방언, 방언 통역은 '보조적인 은사'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들은 단독으로는 좀처럼 눈에 띄는 결과를 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된 은사와 결합될 때 그 진가를 발휘합니다
. 화학에서 촉매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않지만 그것이 없으면 반응 자체가 일어나지 는 것과 흡사합니다.

한 외과의사가 있습니다. 그는 손놀림이 정교하고 수술 실력이 탁월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배가 아프다는 환자가 찾아왔는데, 어떤 검사도 없이 무조건 복부를 절개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무리 솜씨 좋은 의사라도 원인을 모른 채 칼을 댈 수는 없습니다. 병의 뿌리를 알아야 제대로 된 치료가 가능합니다.

신유 사역에서 '
지식의 말씀'의 은사가 하는 역할이 정확히 이것입니다. 우리의 육안으로는 한 사람의 질병 뒤에 어떤 영적 배경이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어떤 병은 죄의 결과로 온 것이고, 어떤 병은 저주의 사슬로 인한 것이며, 어떤 병은 악한 영의 공격으로 인한 것이고, 또 어떤 병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허락된 것입니다.

주님께서 간질 걸린 아이를 고치실 때, 사람들은 그 원인을 묻고 설명하려 했습니다. 주님은 그 병의 영적 본질을 꿰뚫어 보셨고, 그에 따라 적절한 방식으로 다루셨습니다. 지식의 말씀이 없는 치유자는 마치 내비게이션 없이 낯선 도시를 달리는 운전자와 같습니다.

어찌어찌 목적지에 도달할 수도 있겠지만, 그 길은 멀고 위험합니다. 지식의 말씀이 주어질 때 치유자는 병의 뿌리를 보게 되고, 무엇을 끊어야 하는지, 어디에 기름을 부어야 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전인적 치유인 영과 혼과 몸을 아우르는 온전한 회복은 이 지식의 조명 없이는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이는 예언 사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성도의 삶을 향해 말씀을 선포하려 할 때, 그 사람이 지금 어떤 영적 상태에 처해 있는지, 그 삶의 이면에 어떤 상처와 죄와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모른 채 일반적인 위로의 말만 던진다면, 그것은 예언이 아니라 격려 연설에 불과합니다.

이스라엘의 선지자 나단은 어려운 임무를 받았습니다. 다윗 왕이 범한 죄, 즉 간음과 살인의 죄를 당사자 앞에서 다루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말처럼 쉬운 일입니까? 왕 앞에서
"당신이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직격탄을 날린다면? 아마도 나단은 그날로 목숨을 잃었을 것입니다.

나단은 다르게 접근했습니다. 그는 가난한 자의 양 한 마리를 빼앗은 부자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다윗의 의분이 타올랐습니다.
"그런 자는 죽어야 마땅하다!" 그 순간 나단이 말했습니다. "당신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다윗은 무너졌고, 회개했습니다.

이것이 지혜의 말씀이 하는 일입니다. 상대방이 가장 관심 있어 하는 이야기, 가장 잘 듣는 언어로 대화를 시작합니다. 경계를 풀고, 마음의 문을 열게 합니다. 그렇게 친숙함이 만들어진 다음에야 비로소 듣기 거북한 진실이 스며들 수 있습니다. 지혜의 말씀은 주된 내용으로 가는 길을 먼저 닦는 일, 변죽을 울려 긴장을 풀어주는 일을 합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언자가 어떤 사람의 죄와 허물을 다루어야 할 때, 처음부터 그것을 정면으로 거론하면 그 사람은 등을 돌립니다. 그러나 지혜의 말씀이 주어지면, 그 사람이 귀를 열게 만드는 이야기의 실마리가 먼저 주어집니다. 그 실마리를 따라 대화가 이어지고, 그 흐름 속에서 예언은 자연스럽게 흘러들어갑니다. 지혜의 말씀이 없는 예언자는 아무리 좋은 말씀을 받았어도 그것을 전달할 통로를 찾지 못해 허공에 외치게 됩니다.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오랫동안 휠체어에 앉아 있던 사람이 앞에 나와 있습니다. 치유 사역자는 그를 향해 선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고쳐주셨습니다. 이제 일어나십시오." 이 말을 내뱉는 순간, 사역자의 안에서 무언가가 작동해야 합니다. 이것이 상식과 얼마나 동떨어진 선포인지를 스스로 알면서도, 그보다 더 크고 확실한 무언가가 그 말을 밀어올려야 합니다.

믿음의 은사가 바로 그 힘입니다. 이 은사는 초자연적인 것을 믿고 받아들이는 특별한 능력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사역자 자신에게만 머물지 않습니다. 그 영향은 환자에게도 전달됩니다. 오랫동안 굳어 있던 다리로 바닥을 딛으려는 마음, 목발을 내던지고 한 발을 내딛으려는 용기, 이것은 불가능의 언어가 가능의 언어로 번역될 때 일어납니다. 믿음의 은사는 그 번역을 가능하게 합니다.

예언에서도 이 은사는 특별한 역할을 합니다. 장차 이루어질 일에 대해 상식을 초월하는 선포를 해야 할 때, 예언자는 믿음의 은사를 통해 담대하게 입을 열게 됩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무모해 보이는 도전을 향해 나아가도록 촉구하는 예언, 불가능을 향해 돌진하게 만드는 선포, 이것은 믿음의 은사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방언에 대한 오해 가운데 하나는, 수년간 같은 방언을 반복하는 것이 곧 방언의 은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가 말하는 '
여러 가지 방언을 말하는 은사'는 그것과는 다른 차원입니다. 이 은사는 예언과 치유와 축사를 행할 때 그 사역을 힘있게 뒷받침하는 도구로서 기능합니다.

방언이 단순히 자신의 영적 유익을 위한 것에 머문다면 그것은 권세로서의 방언입니다. 그러나 주된 은사를 행할 때 다양한 방언이 영적 주체의 변환을 일으키는 수단으로 사용될 때, 그것은 은사로서의 방언이 됩니다.

영 분별의 은사도 보조적 은사로서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에서 어떤 영이 활동하고 있는지를 분별하지 못한 채 축사를 시도한다면, 그것은 지뢰밭을 지도 없이 걷는 것과 같습니다. 이 은사가 주어졌다는 것은, 이미 귀신을 다룰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었음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합니다. 영을 볼 수 있어야 영을 다룰 수 있습니다.

무대 위의 오보에 연주자는 자신의 악기 하나만으로도 아름다운 선율을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교향곡을 완성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아무리 뛰어난 지휘자가 있어도 타악기 없이는 박자가 흔들리고, 현악기 없이는 멜로디가 살지 않습니다.

은사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한 가지 은사만 가지고 온전한 영적 사역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신유의 은사를 받았어도 지식의 말씀이 없으면 병의 뿌리를 모르고, 믿음의 은사가 없으면 군중 앞에서 선포할 용기가 없으며, 영 분별의 은사가 없으면 악한 영의 공격인지 아닌지조차 분간하지 못합니다.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어떤 은사는 강하게, 어떤 은사는 약하게 허락하시는 것은, 우리를 겸손하게 하시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은사는 도구입니다. 그리고 도구는 쓸 줄 알아야 합니다. 받았다고 해서 자의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성숙한 사역자에게서 배우고, 공동체 안에서 검증받으며, 질서 있게 사용해야 합니다.

달란트를 땅에 묻은 종은 '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 불렸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달란트인 줄도 모르고 엉뚱한 곳에 쏟은 사람 역시 주인의 기대를 저버리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 목적을 기억하는 사람만이, 받은 것을 제대로 쓸 수 있습니다. 보조적인 은사를 통해 주된 은사가 빛나고, 주된 은사를 통해 보조적인 은사가 살아날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가장 아름다운 교향곡을 연주하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