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이사야 53:5)
어떤 어머니가 두 아이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두 아이가 동시에 열이 나고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는 둘 중 한 아이에게만 달려가 이마를 짚어 주고 약을 먹이고 밤새 간호했습니다. 다른 아이는 같은 방에 누워 신음하고 있었지만, 어머니는 그쪽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 첫째 아이는 일어났지만 둘째는 여전히 이불 속에서 떨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완전한 어머니의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구원을 이런 식으로 이해해 왔습니다. 영혼은 구원받았으니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런데 몸의 질병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니 우리 스스로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성경이 보여 주는 그림은 다릅니다. 예수님은 두 아이 모두의 이마 위에 손을 얹으시는 분이십니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질병은 보편적인 경험입니다. 어느 문화, 어느 시대, 어느 계층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병들고 쇠약해지며 결국 죽습니다. 현대 의학이 눈부시게 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병원은 오늘도 넘쳐납니다.
성경은 이 현실의 뿌리를 분명하게 가리킵니다. 질병은 죄로 인해 이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아담의 범죄 이전에는 죽음도 없었고 질병도 없었습니다. 죄가 들어오면서 인간의 존재 전체가 무너졌습니다. 영혼은 죄악의 침범을 받았고, 몸은 질병의 침입을 당했습니다. 죄와 죽음 사이에 질병이 자리 잡았습니다. 질병은 죄의 결과이며 동시에 죽음의 선구자입니다.
우리는 종종 죄와 질병을 전혀 별개의 영역으로 나눕니다. 죄는 하나님 앞에서의 도덕적 실패이고, 질병은 그저 신체적인 현상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선은 달랐습니다. 그분이 보시기에 혼 안의 죄와 몸 안의 질병은 모두 동일한 원수의 일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분이 오신 목적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요일 3:8). 그래서 그분은 귀신을 만날 때마다 즉시 쫓아내셨고, 질병을 만날 때마다 즉시 고치셨습니다. 이 두 행위는 동일한 전쟁의 두 전선이었습니다.
이사야 53장은 구약에서 복음의 핵심을 가장 선명하게 노래한 장입니다. 신약의 저자들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설명할 때마다 이 장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이 장에는 우리가 흔히 지나치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평화'는 혼의 회복이요, '나음'은 몸의 치료입니다. 이 두 가지가 나란히, 동일한 그리스도의 고난으로부터 흘러나옵니다. 더욱 주목할 것은 이 장에서 '담당하다'는 단어가 두 가지 대상에 동일하게 사용된다는 점입니다.
12절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라고 말하고, 4절은 "그는 실로 우리의 질병을 지고"라고 말합니다. 짐을 진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원래 짊어지던 자로부터 그 무게를 넘겨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짊어지셨기에 우리는 더 이상 죄의 무게 아래 홀로 서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분이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셨습니다. 이것이 이사야의 예언이 가리키는 완전한 구원입니다.
다윗은 이것을 노래로 표현했습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시 103:1, 3) 이 찬양은 두 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성도들은 첫 줄만 부르고 입을 다뭅니다. 절반의 구원을 받았기에 절반의 찬양밖에 드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복음서를 펼치면 놀라운 장면들이 펼쳐집니다. 예수님의 사역에서 병 고치심은 단순한 부수적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사역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 줄기였습니다. 특히 인상적인 장면이 있습니다.
중풍병자가 네 친구들에게 들려 예수님 앞으로 왔습니다. 지붕을 뜯어 달아 내려 보낸 그 간절함은 이미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를 고치시기 전에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가지고 집에 가라."
예수님은 그 사람이 용서받은 채로 여전히 들것에 누워 집으로 실려 가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았습니다. 죄 사함과 몸의 회복, 이 두 가지가 함께 그에게 주어졌습니다. 영혼만 구원받고 몸은 여전히 질병 아래 있는 것을 그분은 '완전한 구원'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죄 사함을 믿는 것이 더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병 고치심을 통해 당신의 죄 사하는 권세를 증명하셨습니다(마 9:5). 그러나 오늘날 성도들은 정반대의 어려움 속에 있습니다. 죄 사함은 믿지만 병 고치심은 의심합니다. 당시 사람들이 완전하신 구주를 반쪽으로 만들었듯이, 오늘날 우리도 다른 방향에서 그분을 반쪽으로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아픈 두 아이를 둔 어머니의 이야기에서 완전한 어머니라면 두 아이 모두에게 달려갈 것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한 아버지이십니다. 그분의 구원은 혼을 위한 것이기도 하고, 몸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물론 여기서 오해가 없어야 합니다. 이것은 성도가 절대로 아프지 않아야 한다거나, 병든 자는 믿음이 부족한 것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죄를 지신 것과 질병을 지신 것의 범위와 방식은 서로 다릅니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때로 질병은 우리를 빚는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의 몸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과 능력을 처음부터 우리의 신앙 언어에서 지워버리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의 온전한 그림을 훼손하는 일이라는 점입니다.
시편 기자의 찬양은 두 줄이었습니다. 죄 사함과 병 고치심, 우리는 이 두 줄을 모두 붙들고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그분이 우리에게 열어 두신 길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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