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언하는 사람의 영은 예언하는 사람에게 통제를 받습니다."(고린도전서 14:32)
어느 날 갑자기 방언이 터진 성도가 있었습니다. 새벽기도를 마치고 나오는 그의 얼굴은 환했습니다. 몇 달을 간구하던 것이 마침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자 그는 조금씩 이상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책상 앞에 앉아 성경을 펼치면 혀가 저절로 말려 들어갔습니다. 대화 중에도 혀끝이 간질거렸습니다. 그는 억누르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혹시 소멸되면 어쩌지?'
그래서 그는 틈만 나면 방언으로 기도했습니다. 회중기도 시간에도, 소그룹 모임 중에도, 심지어 찬양 중에도 방언이 흘러나왔습니다. 옆 사람들이 당혹스러운 눈빛을 보냈지만 그는 멈출 수 없었습니다. 아니, 멈추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그에게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수많은 교회에서 반복되는 풍경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주어지는데, 그것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한 교육은 없습니다. 교회는 성경공부와 제자훈련, 큐티 같은 이성적·교리적 훈련에는 힘을 쏟으면서도, 막상 은사에 관한 전문적 훈련에는 손을 놓고 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 영역을 깊이 있게 다룰 수 있는 전문가가 없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목회자 자신들도 이 부분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교회는 자신의 무지를 반성하기는커녕 은사를 경멸하거나 무시하는 어리석음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무지의 문제가 아닙니다. 성령을 심각하게 제한하는 일이며, 하나님 앞에 적대적 위치에 서는 일입니다.
은사를 처음 경험하는 사람이 맞닥뜨리는 가장 큰 난제는 '절제'와 '열심' 사이의 균형입니다. 이 둘은 모두 성경이 요구하는 덕목입니다. 절제는 성령의 열매(갈 5:23)이고, 열심은 성령이 우리에게 주문하는 태도(롬 12:11)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가 은사의 현장에서 충돌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열심히 하자니 절제가 무너지고, 절제하자니 열심이 식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를 먼저 붙들어야 합니다. 성령의 모든 역사는 우리의 의지로 통제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 32절은 명확히 말합니다. "예언하는 사람의 영은 예언하는 사람에게 통제를 받습니다." 이것은 영적 현상이 아무리 강렬해도 그것이 사람의 의지를 완전히 압도하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꼭두각시로 쓰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인격과 의지를 통해, 그것과 함께 일하십니다.
그렇다면 왜 많은 이들이 절제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두려움 때문입니다. '억제하면 소멸될까 봐.' 그 두려움이 절제를 막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입니다. 절제는 성령의 역사를 끄는 스위치가 아닙니다. 오히려 절제는 성령의 역사를 더 아름답고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기술입니다.
마라톤 선수를 생각해 보십시오. 처음 달리기를 시작한 사람이 출발선에서 전력질주를 합니다. 주변의 열기에 휩쓸려 페이스를 잃고 오버페이스합니다. 처음 몇 킬로미터는 눈부시게 달립니다. 그러나 결승선은 보지 못합니다. 탈진하거나, 쓰러지거나, 드물게는 목숨을 잃기까지 합니다. 은사를 처음 받은 사람이 절제 없이 달리면 꼭 이 모습이 됩니다. 영적 탈진은 육체적 탈진보다 회복이 더 느립니다.
성경은 이 영적 에너지를 '생수의 강'(요 7:38, 렘 2:13)이라고 부르고, '생명의 샘'(시 36:9, 렘 17:13)이라고도 표현합니다. 샘물은 퍼올릴수록 솟아나지만, 그 속도보다 빠르게 퍼내면 바닥이 드러납니다. 영적 능력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용하면 반드시 채워야 합니다. 무절제한 사용은 사역 자체를 단명으로 이끕니다.
목회자가 너무 많은 설교를 쏟아내다 탈진하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목격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일은 거룩한 일이지만, 그 거룩함이 무절제의 면죄부가 되지는 않습니다. 은사도 같습니다. 아무리 귀한 은사라도 자기 분수를 망각한 채 사용하면, 결국 그 은사는 사역자 자신을 먼저 소진시키고 맙니다.
절제하지 못하면 또 하나의 위험이 찾아옵니다.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직후의 이야기를 보십시오. 그 놀라운 승리 뒤에 그들은 조그만 아이 성을 공격하기로 했습니다. 하나님께 묻지 않았습니다. 여세를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니, 이 작은 성쯤이야.' 그러나 그들은 패했습니다. 고무된 마음, 충만한 기세, 앞선 승리의 기억,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을 여쭤볼 여유를 빼앗아 갔습니다. 절제가 없었기 때문에 분별도 없었던 것입니다.
성령께서 강력하게 임재하신다고 해서, 지금 이 상황이 곧 하나님의 뜻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임재와 허락은 다릅니다. 역사하심과 명령하심은 다릅니다. 이것을 구분하는 능력이 바로 절제 속에서 자랍니다.
그렇다면 절제는 어떻게 얻어지는 것일까요? 자동으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베드로후서 1장 6절은 "지식에 절제를" 더하라고 말합니다. 절제는 더하는 것입니다. 의식적으로 통제하려는 노력 속에서만 생겨나는 열매입니다. 회중기도 시간에 방언이 올라올 때, 그것을 의지로 눌러보는 경험, 예언이 수시로 흘러나올 때, 그것을 적절한 때까지 품고 기다려보는 훈련, 그런 반복된 노력 속에서 절제의 기술이 몸에 익숙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기술이 자라면, 비로소 '언제 절제하고 언제 절제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분별하는 지혜도 따라옵니다. 이 지혜는 이론이 아니라 실제 사역의 현장에서 체득되는 것입니다.
처음 방언이 터졌던 그 성도에게 만약 누군가 이렇게 말해주었다면 어땠을까요? "절제해도 소멸되지 않습니다. 성령은 당신이 통제할 수 있도록 은사를 주셨습니다. 방언은 당신의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다스리세요." 그는 아마 더 오래, 더 깊이, 더 아름답게 사역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은사는 받는 날이 아니라, 다스리는 법을 배운 날부터 진짜 시작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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