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태복음 1:21)
사람은 사랑하는 대상이 생기면, 그 사람과 관련된 모든 것이 달라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 사람이 앉았던 자리, 그 사람이 자주 걷던 길, 그 사람이 남긴 작은 메모 하나까지도 아무 의미 없는 것이 아니라 소중한 흔적으로 다가옵니다. 사랑은 대상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눈 자체를 바꾸어 놓기 때문입니다.
참된 성도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그런 분이십니다. 주님을 사랑하게 되면, 주님과 관련된 모든 것이 귀해집니다. 그분의 발이 밟으셨던 땅, 그분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말씀, 그분의 침묵과 눈물, 그분의 고난과 십자가까지도 성도의 마음에는 모두 거룩한 향기를 품고 다가옵니다.
다윗이 말한 고백이 바로 그것입니다. “왕의 모든 옷은 몰약과 침향과 육계의 향기가 있으며.”(시 45:8) 이 말은 단순히 왕의 옷이 향기롭다는 시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왕이 입은 옷이 향기로운 이유는 왕 자신이 향기롭기 때문입니다. 왕이 사랑스럽기에, 왕과 닿아 있는 모든 것이 향기를 띱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거룩하시기에 그분과 연결된 모든 것이 성도의 영혼에는 향기로 다가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많은 이름들 가운데, 왜 유독 “예수”라는 이름이 성도의 귀에 가장 아름답게 들릴까요?
성경에는 주님을 가리키는 이름과 호칭이 참으로 많습니다. 왕, 선지자, 제사장, 임마누엘, 기묘자, 전능하신 하나님, 평강의 왕, 실로, 어린양, 교회의 신랑, 교회의 머리…. 이 모든 이름은 각각 주님의 위엄과 사역과 영광을 드러내는 보석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라는 이름은 다릅니다. 이 이름에는 주님의 사역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분명합니다.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 이 이름에는 인간의 실패가 전제되어 있고, 인간의 무능함이 깔려 있으며, 인간의 죄가 숨김없이 드러나 있습니다. 동시에 이 이름 안에는 하나님의 결단과 긍휼과 사랑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죄인을 향해 내려오신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어떤 이름은 존경을 불러일으키지만, 예수라는 이름은 눈물을 불러옵니다. 어떤 이름은 경외하게 하지만, 예수라는 이름은 무릎 꿇게 합니다. 어떤 이름은 멀리서 바라보게 하지만, 예수라는 이름은 가까이 부르게 합니다.
한 성도가 깊은 고난 가운데 있을 때, 그는 복잡한 신학 용어를 붙들지 못합니다. 교리의 문장을 되뇌지도 못합니다. 그저 입술에서 나오는 것은 단 한마디입니다. “예수님…” 병상에서, 눈물 속에서, 죄책감과 두려움 속에서, 성도들이 가장 자주 부르는 이름은 언제나 같습니다. 예수.
이 이름은 설명보다 먼저 나오고, 이해보다 먼저 흘러나옵니다. 그래서 예수라는 이름에는 음악이 있습니다. 천국의 거문고를 울리는 이름이요, 성도의 심장을 떨리게 하는 이름입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를 떠올려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찬송이 이 이름으로 시작하고, 이 이름으로 끝나는지 모릅니다.
찬송은 결국 한 가지 고백으로 수렴됩니다. “예수밖에 없습니다.” 이름은 짧습니다. 두 글자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 두 글자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온 생애가 필요하고, 아니 영원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한 방울의 물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헤아릴 수 없는 바다가 담겨 있습니다. 두 글자 안에, 창조와 타락과 언약과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과 재림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이름을 가장 자주 부릅니다. 경외 속에서, 그러나 친밀하게. 떨림 속에서, 그러나 담대하게. “예수님, 주님의 아름다운 이름을 사랑합니다. 주의 이름은 제 귀에 음악 소리와도 같습니다.”
이 고백은 시인의 감상이 아니라, 구원받은 영혼의 필연적인 반응입니다. 죄에서 건짐을 받은 자는, 그 이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을 부를 때, 성도는 다시 한 번 자신이 누구였고, 무엇으로 살게 되었는지를 기억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성도는 그 이름을 묵상합니다. 설명하려 하기보다, 붙듭니다. 분석하려 하기보다, 부릅니다. 왜냐하면 이 이름은 이해의 대상이기 전에, 구원의 실재이기 때문입니다.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 이름 안에, 우리의 생명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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