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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이사야

이사야 -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때, 사람의 계명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8. 19.

이사야 29장 1~24절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에서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명철이 가려지리라 그 날에 못 듣는 자가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소경의 눈이 보게 될 것이며"(이사야 29:13~14,18)


한 중년 남자가 정기 건강검진에서 이상 소견을 발견했습니다. 의사는 정밀검사를 권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
우리 아버지도 평생 이런 증상 있으셨는데 괜찮으셨어요. 우리 집안 주치의 선생님은 별거 아니라고 하셨거든요." 결국 그는 정밀검사를 미뤘습니다. 문제는 그 '집안 주치의'가 실제로는 내과 전문의가 아니라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동네 한의사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전문가의 소견보다 익숙한 사람의 말을 더 신뢰했습니다. 익숙함이 진실을 이겼습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이사야 시대의 예루살렘에서, 그리고 오늘 우리 가운데서도 말입니다.

복음을 전하다 보면 누가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워할까요? 뜻밖에도 초신자나 아예 신앙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미 종교적 열심과 전통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성경 본문의 앞뒤 문맥을 짚어드려도 별 관심이 없고, 대신 이런 말이 돌아옵니다. "
우리 목사님은 그렇게 말씀 안 하시던데요." 이 한마디 속에는 무서운 것이 숨어 있습니다. 사람의 가르침이 성경보다 위에 자리를 잡아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특별한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각종 제자훈련과 전도훈련 프로그램은 그 단체만의 색깔을 가진 제자를 길러냅니다. 각 교단은 자기 교단의 특색을 강조합니다. 우리 자신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래서 누군가 "
우리 목사님이 그러셨는데요" 하며 전도하려 한다면, 그 사람은 사실 누구의 증인이 되고 있는 것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아니라 그 목사의 증인이 되어버립니다.

그렇다면 참된 설교자와 사람을 자기에게 붙잡아 두려는 자는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설교자는 본래 증인이어야 합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받은 그대로를 "
말씀이 이렇습니다" 하고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반면 자기주장을 세우기 위해 성경 앞뒤를 잘라내고 필요한 구절만 끌어다 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이 둘은 분명히 구별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자신을 신랑에게 신부를 소개하는 중매쟁이로 소개합니다. 중매쟁이의 본분은 중매를 성사시킨 뒤에는 조용히 물러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매쟁이가 결혼이 성사된 후에도 신부 곁을 떠나지 않고 계속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면, 그것은 결혼의 본질을 훼손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기초가 특정한 사람의 가르침 위에 있는지, 아니면 말씀 그 자체 위에 있는지를 늘 점검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사야 29장은 "
아리엘"에 대한 심판 선고로 시작합니다. 아리엘은 두 가지를 동시에 뜻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암사자'라는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에스겔서에서 나오는 성전의 번제단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루살렘이 바로 이 아리엘처럼 된다는 것입니다. 번제단처럼 불타는 심판을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이 심판은 이스라엘 백성이 절기를 지키지 않아서 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본문은 오히려 해마다 절기가 어김없이 돌아온다고 말합니다. 절기마다 제사도 착실히 드립니다. 그런데도 사방에서 적군이 에워싸고 침략하여 땅의 티끌처럼 낮아지고 맙니다. 종교 행위는 완벽하게 지속되는데 어째서 심판이 임할까요?

13~14절은 이 질문에 답을 줍니다. 백성이 하나님을 입술로는 가까이하지만 마음은 멀리 떠나 있고,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한다 하는 것도 결국 사람에게 배운 계명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의 지혜자들의 지혜는 사라지고 명철한 자들의 명철은 숨겨집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성경 전체에서 아마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바로 다음 대목일 것입니다. 이 소경 됨의 원인이 다른 누구도 아닌 주님 자신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잘 깨닫게 하여 돌이키게 하시는 대신, 도리어 어떤 이들을 일부러 소경 되게 하십니다. 왜 어떤 사람은 구원하시고 어떤 사람은 그냥 버려두시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하나님이 공평하다느니 불공평하다느니 함부로 입을 놀립니다. 이런 입은 다물어야 합니다.

15~16절은 진흙과 토기장이의 비유로 이어집니다. 진흙이 토기장이를 향해 "
당신에게 무슨 명철이 있느냐" 하고 따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땅의 티끌로 지음 받은 존재임을 알진대, 곧 영어 성경이 표현하는 대로 "흙의 먼지"에 지나지 않음을 안다면, 우리가 할 일은 입을 닫고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뿐입니다.

9~13절은 이 소경 됨의 원인을 더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사람들이 소경이 되고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지만, 그것은 포도주나 독주 때문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친히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선지자와 선견자조차 하나님의 묵시를 받지 못하고 소경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니 유식한 자에게 글을 보이면 봉해졌다 하고, 무식한 자에게 보이면 글을 모른다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
우리의 가르침을 따르라, 내 말을 들으라" 하고 외칩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일이 계속됩니다.

이 원리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건이 열왕기상 22장에 나옵니다. 북이스라엘의 아합 왕과 남유다의 여호사밧 왕이 연합하여 아람에게 빼앗긴 길르앗 라못을 되찾으려 합니다. 이때 하나님의 선지자에게 승패를 묻습니다. 사백 명의 선지자가 입을 모아 승리를 예언하지만, 미가야 선지자만은 홀로 아합의 죽음을 예언합니다. 그 이유는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보내셔서 다른 선지자들의 입에 넣어 동일한 거짓 예언을 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미가야는 뺨을 맞고 옥에 갇히고, 변장하고 전쟁터에 나간 아합은 우연히 날아온 화살에 갑옷 솔기를 맞아 죽습니다. 그의 피는 개가 핥습니다. 다수의 목소리, 익숙한 목소리가 반드시 참된 목소리는 아니라는 것을 이 사건은 뼈아프게 증언합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은 이 어두운 원리를 신약에서도 확인시켜 줍니다. 사람을 유혹에 넘어가게 하시는 주체가 다름 아닌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만의 상황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상황입니다. "
내가 진리다, 내 말을 들어라,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하고 저마다 외치지만, 소경이 소경을 인도한다면 결국 함께 망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렇게 망하게 하신 후에야 비로소 자기의 남은 백성을 회복시키십니다.

심판만으로 이사야 29장이 끝나지 않습니다. 5~8절에서는 예루살렘을 에워쌌던 적군이 마치 꿈에서 본 것처럼 순식간에 물러갑니다. 그리고 17~24절에서는 놀라운 반전이 펼쳐집니다. 오래지 않아 귀머거리가 듣게 되고 소경이 보게 되며, 가난하고 빈핍한 자가 여호와로 인하여 새로운 기쁨을 얻게 되는 날이 온다는 약속입니다.

여기서 결정적인 통찰이 나옵니다. 소경이 눈을 뜨고 귀머거리가 듣게 되는 일은 사람의 전도 훈련이나 프로그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친히 하셔야 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율법 구절을 외우고 그것을 손과 이마에 매어 다녀도, 그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바로 인생의 근본적인 죄입니다.

아무리 사람의 가르침을 잘 받고 오랜 전통을 지킨다 해도 그것이 사람을 거듭나게 하지는 못합니다. 아무리 윤리와 도덕으로 자신을 다듬고 종교적 형식까지 완벽하게 갖춘다 해도, 사람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에 이를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복음이 빛을 발합니다. 복음이란 스스로 열 수 없는 그 문을 주님께서 친히 열어 주시는 사건입니다.

마태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소경이 보고 귀머거리가 듣는다고 답하십니다. 이것은 단순한 육체적 질병의 치료가 아니라 구약 예언의 성취 차원에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귀머거리가 듣고 소경이 보게 되는 바로 그때가 하나님의 심판이 행해지는 동시에 구원이 베풀어지는 종말의 때입니다. 이사야가 예언했던 "
오래지 않아서"가 바로 이 순간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을 보고 듣는다고 자부하는 자들에게는 오히려 그분이 걸림돌과 심판이 되어버립니다.

이어서 마태복음 11장 25절은 지혜로운 자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 같은 자에게는 나타내시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
어린아이'란 스스로 지혜 있다 여기지 않는, 자신을 어리석다 인정하는 자를 뜻합니다. 요한복음 9장의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의 이야기도 같은 원리를 담고 있습니다. 자신이 보지 못함을 인정한 소경은 눈을 뜨고, 자신이 잘 본다고 자부하던 바리새인들은 오히려 소경이 되어버립니다.

마태복음 15장은 장로들의 유전, 곧 사람의 가르침이 얼마나 무서운 힘을 가지는지를 보여줍니다. 사람의 가르침이 우리 마음 가득 자리 잡고 있기에 참된 말씀을 받아들이기가 참으로 힘겹습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우리 자신이 바로 그러한 사람의 가르침을 스스로 좋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사야 30장 9~11절은 이 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백성들은 선견자들에게 "
우리에게 부드러운 말을 하라"고 요구합니다. 심판의 말, 죄를 책망하는 말은 듣기 싫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기들 앞에서 떠나가게 하라고까지 말합니다. 제사는 계속 드리겠지만 그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아득히 멀리 있습니다. 그 원인은 가르치는 자들이 백성을 기쁘게 하는 말만 골라서 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가르치는 자와 듣는 자가 함께 망하게 됩니다.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나를 좋게 대해주고 기분 좋게 해주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런 우리가 어떻게 이사야의 이 준엄한 경고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성령이 임하신 증거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소경이 보고 귀머거리가 듣게 됩니다. 이제는 나를 이 세상에서 편안하게 살리는 말만 좋아할 것이 아니라, 설령 이 세상에서 나를 죽이는 것 같은 말씀이라도 그것을 "
아멘" 하고 받아들이는 자가 참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요한일서 2장 18~29절은 이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줍니다. 27절은 우리에게 특별한 사람의 가르침이 필요하지 않다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의 참과 거짓을 가르는 최종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노골적으로 예수님을 부인하는 이단은 오히려 구분하기 쉽습니다. 문제는 교묘하게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의 완전성을 은근히 흐리는 자, 그가 바로 적그리스도입니다. 수많은 광고와 프로그램과 가르침들 속에서, 과연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그 예수님이 오늘도 친히 일하고 계심이 선명하게 드러나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말세인 오늘, 우리는 더욱 사람의 가르침을 조심해야 합니다. 처음 진료실 이야기에서 그 남자에게 필요했던 것은 익숙한 사람의 편안한 말이 아니라 정확한 진단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를 기분 좋게 해주는 익숙한 목소리가 아니라, 우리를 참으로 살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이 때로 우리를 찌르고 낮추고 죽이는 것 같을지라도, 바로 그 말씀 앞에 "
아멘"으로 엎드리는 자만이 참으로 눈을 뜨고 살아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