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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이사야

이사야 - 부서지는 면류관, 다시 씌워지는 면류관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8. 17.

"에브라임의 술취한 자들의 교만한 면류관은 화 있을진저 술에 빠진 자의 성 곧 영화로운 관 같이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에 세운 성이여 쇠잔해 가는 꽃 같으니 화 있을진저, 보라 주께 있는 강하고 힘 있는 자가 쏟아지는 우박 같이, 파괴하는 광풍 같이, 큰 물이 넘침 같이 손으로 그 면류관을 땅에 던지리니, 에브라임의 술취한 자들의 교만한 면류관이 발에 밟힐 것이라. 그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에 있는 그의 영화가 쇠잔해 가는 꽃이 여름 전에 처음 익은 무화과와 같으리니 보는 자가 그것을 보고 얼른 따서 먹으리로다. 그 날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남은 자에게 영화로운 면류관이 되시며 아름다운 화관이 되실 것이라. 재판석에 앉은 자에게는 판결하는 영이 되시며 성문에서 싸움을 물리치는 자에게는 힘이 되시리로다. 그리하여도 이들은 포도주로 말미암아 옆 걸음 치며 독주로 말미암아 비틀거리며 제사장과 선지자도 독주로 말미암아 옆 걸음 치며 포도주에 빠지며 독주로 말미암아 비틀거리며 환상을 잘못 풀며 재판할 때에 실수하나니, 모든 상에는 토한 것, 더러운 것이 가득하고 깨끗한 곳이 없도다. 그들이 이르기를 그가 누구에게 지식을 가르치며 누구에게 도를 전하여 깨닫게 하려는가 젖 떨어져 품을 떠난 자들에게 하려는가, 대저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되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는구나 하는도다. 그러므로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그가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 전에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이것이 너희 안식이요 이것이 너희 상쾌함이니 너희는 곤비한 자에게 안식을 주라 하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고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사 그들이 가다가 뒤로 넘어져 부러지며 걸리며 붙잡히게 하시리라."(이사야 28:1~13)

어느 마을에 오랫동안 씨름판을 평정해온 장사가 있었습니다. 해마다 단오 씨름대회에서 우승하여 소를 타고, 마을 사람들은 그의 목에 꽃으로 엮은 화관을 씌워주었습니다. 몇 해가 지나자 그는 화관을 쓰지 않고는 마을을 걷지 않았습니다. 밥을 먹을 때도, 잠을 잘 때도 화관을 곁에 두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볼 때마다 인사 대신 허리를 숙이자, 그는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해, 젊은 장사가 나타나 그를 넘어뜨렸습니다. 화관은 땅에 떨어져 흙투성이가 되었고, 시들어가는 꽃잎들은 발에 밟혀 흩어졌습니다. 그 자리에서 사람들은 깨달았습니다. 화관은 처음부터 그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것은 잠시 씌워진 것이었고, 시들 수밖에 없는 꽃이었습니다. 이사야 28장은 바로 이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북이스라엘, 곧 에브라임의 머리에 씌워진 "
교만한 면류관"이 부서지는 장면입니다.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졌을 때, 북쪽 열 지파 가운데 가장 강성했던 지파가 에브라임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종종 에브라임이라는 이름으로 북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하게 합니다. 힘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교만이 자라나기 쉽습니다. 이사야는 이 교만을 "
면류관"이라는 이미지로 표현합니다. 면류관은 경기의 최종 승자에게 씌워지는 것, 곧 교만이 최고조에 이른 상태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이 교만의 극치를 부수어 버리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에브라임의 교만이 실제로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사사기에서 두 번이나 반복해서 드러납니다. 기드온이 삼백 명의 용사로 미디안 군대를 물리치고 도망가는 적을 에브라임 사람들에게 막아 치라고 하자, 에브라임은 전쟁에 승리한 것은 기뻐하지 않고
"왜 처음부터 우리를 부르지 않았느냐"며 기드온에게 화를 냈습니다(삿 7~8장). 기드온이 겸손한 말로 달래어 그 일은 무마되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사사 입다가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왔을 때, 에브라임은 또다시 같은 트집을 잡습니다. "
왜 우리를 부르지 않았느냐, 너를 불살라 버리겠다." 이번에는 입다가 참지 않았습니다. 전쟁이 벌어졌고, 도망하는 에브라임 사람들을 요단강 나루터에서 "쉽볼렛"을 발음하게 하여 가려내었는데, 발음을 제대로 하지 못한 사만 이천 명이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삿 12장). 이것이 에브라임의 교만입니다. 힘이 세다는 이유로, 큰 지파라는 이유로 모든 공로가 자기 몫이어야 하고, 모든 일이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마음입니다.

이 교만은 삼천 년 전 이스라엘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한 회사에서 오래 일한 직원이 있었습니다. 그는 회사가 어려울 때부터 자리를 지키며 여러 프로젝트를 성공시켰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회의 자리에서 자기 의견이 채택되지 않으면 얼굴빛이 변했고, 새로 들어온 후배가 좋은 아이디어를 내면 겉으로는 칭찬하면서도 뒤에서는 트집을 잡았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성실한 사람이라 믿었지만, 실은 회사의 모든 성과가 자신을 중심으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마음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는 사소한 인사 문제로 크게 폭발했고, 동료들은 그날 처음으로 그의 민낯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갑자기 생긴 성격이 아니라, 오랫동안 쌓여온 교만이 마침내 터져 나온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언제 화가 나고 짜증이 납니까? 대개는 세상이 내 뜻대로 돌아가지 않을 때입니다. 아이도 어른도, 남자도 여자도 예외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 밑에서 지시받는 것을 좋아서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힘이 부족하기에 참을 뿐입니다. 소풍 가는 날 비가 오면 하늘을 원망하고, 실연을 당하거나 시험에 떨어지면 방에 틀어박혀 "
차라리 온 세상이 캄캄해졌으면" 하고 생각한 적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다 아침에 어김없이 해가 떠오르면 오히려 그것이 밉게 느껴지던 경험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우리 안 깊숙이 숨어있는 교만의 얼굴입니다.

시대마다 "
세상을 바꾸자"는 구호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선거철마다 등장하는 "바꾸자"는 포스터, 유행하는 노래의 후렴구, 저마다 자기중심으로 세상이 재편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그 안에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바꾸어야 할 것은 세상이 아니라 나 자신일 때가 많습니다. 이처럼 사람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습니다. "세상의 중심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다. 너희는 내 말을 들으라."

그러나 세상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 그 버림받은 돌이 도리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셨습니다. 이사야 28장 전체가 향하고 있는 결말이 바로 이것입니다. 인간의 교만한 면류관은 부서지지만, 그 자리에 하나님이 친히 모퉁잇돌을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교만을 면류관이라 부름으로써, 우리가 아는 금이나 은으로 된 면류관과는 전혀 다른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천국에 가면 금 면류관, 은 면류관처럼 등급이 나뉜 보상을 받을 것이라 상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생명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은 물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생명 자체가 면류관이고, 의 자체가 면류관입니다.

하나님은 에브라임의 교만한 면류관을 부수십니다. 기름진 골짜기 위에 세워져 영화롭게 보이던 사마리아 성읍조차, 실은 시들어가는 꽃 한 송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위로 적군이 우박과 광풍처럼 몰려오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마치 일찍 익은 무화과가 손에 닿자마자 따 먹히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심판 후에 남은 자들에게는 다른 약속이 주어집니다. 하나님 자신이 그들의 영화로운 면류관이 되시고, 아름다운 화관이 되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
나는 불쌍한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친히 그의 영광이 되어 주십니다. 세상적인 영광에 눈멀 이유가 없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면류관입니다.

교만은 에브라임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7절부터는 남유다, 그중에서도 제사장과 선지자들의 죄가 드러납니다. 그들은 포도주와 독주에 취해 비틀거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풀이했습니다. 심판받을 일을 옳다 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일을 도리어 악하다고 말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그들의 반응입니다. 참된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그들은 "
네가 누구를 가르치려 드느냐, 우리가 젖 뗀 아이인 줄 아느냐"며 조롱했습니다. 마치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 새로운 권면을 들을 때 "내가 예수 믿은 지 몇십 년인데 그 정도도 모를까"라며 마음을 닫는 것과 같습니다.

어느 노 성도가 후배 목회자의 설교를 들으며 "
젊은 사람이 뭘 안다고"라며 귀를 닫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신앙의 연조가 오히려 겸손을 막는 벽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 본문은 정확히 짚어내고 있습니다.

11절은 하나님이 "
생소한 입술, 다른 방언을 말하는 자"를 통해 심판하시겠다고 말합니다. 앗수르 군대의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가 곧 심판의 도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익숙한 하나님의 음성, 곧 선지자를 통한 교훈과 경계와 책망을 우습게 여긴 자들에게, 이제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낯선 소리가 심판으로 다가옵니다. 익숙한 것을 가볍게 여긴 대가는 낯설고 두려운 방식으로 돌아온다는 경고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본문과 정확히 일치하는 권면을 우리에게 줍니다. "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과거의 경력이나 신앙 연조, 익숙해진 체험은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것이 마음을 굳게 만들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 이 순간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히 서는 것입니다. 씨름 장사의 화관이 흙바닥에 떨어졌던 것처럼, 우리가 스스로 쌓아 올린 교만의 면류관도 언젠가는 부서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를 하나님이 친히 채워 주십니다. 우리의 의나 힘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생명이 되시고 의가 되시고 영원한 면류관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붙들고 있던 낡은 화관을 내려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빈손 위에, 시들지 않는 하나님의 면류관을 받아 쓰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