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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이사야

이사야 - 무너지는 성과 열리는 잔치, 심판과 잔치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8. 13.

이사야 25장 1~12절

"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오리니 주는 기사를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 주는 빈궁한 자의 보장이시요 환난 당한 빈핍한 자의 보장이시며 폭풍 중에 피난처, 폭양 중에 그늘이 되셨사오니 강포한 자의 기세가 성벽을 충돌하는 폭풍과 같음이니이다. 그 날에 말하기를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우리의 여호와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는 그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할 것이며."(이사야 25:1,4,9)


새벽 예배를 마치고 나오던 한 성도가 목사님을 붙잡고 물었습니다. "
목사님, 저는 요즘 힘든 일만 겪는데 어떻게 찬양이 나옵니까?" 이사야 25장은 바로 그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24장에서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하셨습니다. 견고했던 성읍들이 무너지고, 남은 자들만 시온에 모여 하나님을 왕으로 모십니다. 그리고 25장 1절, 장로들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첫마디는 이것입니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오리니 주는 기사를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

여기서 우리가 놓치기 쉬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
성실"과 "진실"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좋은 일, 발전하는 일, 채워지는 일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이 찬양이 노래하는 하나님의 성실과 진실은 다름 아닌 심판을 행하신 일입니다. 무너뜨리시는 것도, 허무시는 것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라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정직한 의사는 병든 부위를 도려낼 때 오히려 더 신실한 것입니다. 환부를 보고도 손대지 않는 의사가 있다면, 그는 친절해 보일지 몰라도 결코 신실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바로 그런 성격의 신실함입니다. 자기 백성과 맺으신 언약을 끝까지 지키시기 위해서, 언약을 거스르는 것들을 반드시 심판하시는 것이 성실이고 진실입니다.

2절부터 5절까지 이사야는 견고한 성읍이 무더기가 되고, 화려한 궁성이 영영히 건설되지 못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왜입니까? 그 강함으로 약한 자를 포학하게 대했기 때문입니다. 몇 해 전, 세계 유수의 금융 그룹 하나가 하루아침에 무너진 사건이 있었습니다. 수십 년간 "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고 불리던 회사였습니다. 최고의 인재들이 모여 있었고, 전 세계 지사를 거느렸으며, 그 이름 자체가 신뢰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회사가 파산 신청을 하던 날, 뉴스 카메라 앞에서 박스에 짐을 싸 들고 나오는 직원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같았습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습니다. 견고해 보였던 것이 실은 모래 위에 세운 성이었던 것입니다.

이사야가 그리는 심판의 대상은 단지 옛 앗수르나 바벨론만이 아닙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쌓아 올려서 "
이제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고 말하는 모든 성읍, 모든 체제, 모든 사람이 그 대상입니다. 본문이 지적하는 죄의 핵심은 바로 이것입니다. 피조물이 창조주의 다스림을 벗어나 스스로 주인이 되려는 시도, 그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이 죄는 생각보다 우리와 가깝습니다. 창세기의 바벨탑 이야기를 기억해 보십시오. 사람들이 성읍과 탑을 쌓으며 외친 말은 "
우리 이름을 내고 흩어짐을 면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벽돌을 굽고 탑을 쌓아 올린 행위 자체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손으로 쌓은 것으로 안전을 삼으려 한 마음이었습니다.

이것은 비단 국가나 대기업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한 성도님이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습니다. "
저는 평생 성실하게 살아서 자녀 교육 잘 시키고, 노후 준비도 탄탄히 해놓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제가 하나님보다 제 통장 잔고를 더 의지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이 말하는 죄입니다. 부도덕한 삶이 아니라, 오히려 성실하고 반듯한 삶 속에서도 얼마든지 자라날 수 있는 자기 신뢰의 죄입니다.

이사야는 더 나아가 말합니다. 이런 죄는 세상적인 성공의 모습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종교적인 모습으로도 나타난다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신 것도 그들이 겉과 속이 달라서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 중 다수는 정말 열심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열심의 방향이 하나님의 의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대신, 자기가 쌓은 의를 의지하는 데 있었습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것도 바로 이 지점이었습니다. 그는 흠 없는 율법의 사람이었지만, 자기 의를 배설물로 여기고서야 비로소 그리스도를 얻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이 심판의 본문 속에서 아름다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4절입니다. "
주는 빈궁한 자의 보장이시요 환난 당한 빈핍한 자의 보장이시며 폭풍 중에 피난처, 폭양 중에 그늘이 되셨사오니." 강한 성읍은 무너지지만, 힘없는 자들에게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피난처가 되어 주십니다. 힘 있는 자들의 요새는 흔들리고, 힘없는 자들의 피난처는 견고해지는 이 역전이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흐름입니다.

다윗의 이야기가 이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다윗은 인생 말년에 자기 군대의 숫자를 세어보게 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강한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로 인해 칠만 명이 전염병으로 죽는 심판이 임했습니다. 반면 다윗이 광야에서 사울에게 쫓기며 아무 힘도 없이 도망 다닐 때, 시편 142편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
내 우편을 살펴보소서 나를 아는 자도 없고 피난처도 없고 내 영혼을 돌아보는 자도 없나이다." 아무 도움도 보이지 않는 그 자리에서 다윗은 비로소 여호와만이 자신의 피난처라고 고백합니다. 그의 신앙이 가장 깊어진 순간은 그가 강할 때가 아니라 아무것도 없을 때였습니다.

6절부터 9절은 이 모든 심판 뒤에 열리는 놀라운 잔치를 그립니다. 만민을 위한 살진 것과 오래 저장한 포도주로 채워진 풍성한 잔치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든 민족의 얼굴을 가린 수건을 벗기시고, 모든 나라 위에 덮인 덮개를 제하십니다. 새번역 성경은 이것을 "
수의를 벗긴다"고 번역합니다. 수의는 죽은 자에게 입히는 옷입니다. 슬픔과 절망, 죄의 옷을 벗기시고 그 자리에 의의 옷을 입히시는 것입니다.

이 장면은 마치 오랜 병상에서 사경을 헤매던 사람이 마침내 회복되어, 환자복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입는 순간과도 같습니다. 실제로 어느 중환자실 간호사가 이런 이야기를 전한 적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사경을 헤매던 환자가 마침내 의식을 되찾고 처음 한 요청이 "
제발 이 환자복 좀 벗겨 달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환자복은 그에게 병과 죽음의 그림자를 계속 상기시키는 옷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죽음의 옷을 벗기시고 생명의 옷을 입히시는 일입니다.

그리고 본문은 구체적으로 세 가지를 약속합니다. 사망을 영원히 멸하십니다. 눈물을 씻어 주십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십니다. 이 세 가지 약속은 훗날 요한계시록 21장에서 다시 울려 퍼지며,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완성됩니다.

그렇다면 이 잔치에 누가 참여합니까? 9절이 답을 줍니다. "
그 날에 말하기를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우리의 여호와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는 그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핵심 단어는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다른 무엇도 아니고, 오직 여호와만을 기다린 자들입니다. 자기 집안의 신앙 전통도 아니고, 자기가 섬기는 교회의 규모도 아니고, 자기가 쌓아 온 신앙 경력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붙들고 기다린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질문해야 합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의지할 것들을 자꾸 제거하시는 것일까요? 바울의 고백이 그 답을 줍니다. 고린도후서 1장에서 바울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이 얼마나 심했는지 힘에 겹도록 심한 고생을 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는 지경이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힙니다. "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바울처럼 한때 힘 있고 당당했던 사람이 오히려 철저히 무너지는 경험을 통해서만 진짜 의지할 분을 발견했다는 사실은, 우리 각자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한 은퇴하신 장로님의 고백이 떠오릅니다. "
저는 사업이 한창 잘될 때는 하나님께 감사기도만 드렸습니다. 그런데 사업이 부도가 나고 모든 것을 잃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 전까지 저는 하나님을 제 성공의 배경 음악처럼 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무너짐이 오히려 그를 진짜 신앙으로 이끈 것입니다.

이 본문의 끝, 10절부터 12절은 대조적으로 모압이 거름물 속의 초개같이 밟히는 장면을 그립니다. 끝까지 자기를 의지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은 자들의 결말입니다. 잔치의 기쁨과 심판의 비참함, 이 두 장면이 나란히 놓여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의지하고 있습니까?
설날이든 평범한 주일이든, 우리가 이 본문 앞에 설 때마다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내 삶의 견고한 성읍은 무엇입니까? 내가 흔들리지 않는다고 믿고 있는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것이 무너질 때, 나는 여전히 여호와를 기다리는 자로 남아 있을 수 있습니까?

고린도후서 6장의 바울의 고백으로 이 묵상을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
근심하는 것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케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세상이 보기에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삶, 그러나 하나님 한 분만으로 모든 것을 가진 삶, 그것이 이 잔치에 초대받은 자들의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