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사야 24장 1~23절
"그러므로 너희가 동방에서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며 바다 모든 섬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 것이라. 땅 끝에서부터 노래하는 소리가 우리에게 들리기를 의로우신 자에게 영광을 돌리세 하도다. 그 때에 달이 수치를 당하고 해가 부끄러워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시고 그 장로들 앞에서 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이라."(이사야 24:15~16,23)
몇 해 전, 어느 청년이 상담을 청해왔습니다. 취업이 안 되고 연애도 마음대로 안 풀리자 답답한 마음에 유명하다는 점집을 찾아갔다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제 미래를 누가 콕 집어 말해주니까요." 그 말을 들으며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왜냐하면 그 청년이 원했던 것은 사실 신앙이 아니라 통제였기 때문입니다. 자기 운명을 미리 알아서 손에 쥐고 싶은 마음, 그것이 점집을 찾게 만든 진짜 이유였습니다.
성경에도 선지자, 곧 예언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종종 이 두 존재를 혼동합니다. 점쟁이는 개인의 운명을 말해주는 사람이고, 성경의 선지자는 하나님의 계시를 전하는 사람입니다. 이 둘은 완전히 다른 존재입니다. 선지자가 전하는 것은 "당신의 팔자가 어떻게 될 것인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이 어떻게 성취될 것인가"입니다. 그 안에서 개인과 나라의 흥망이 언급되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언약을 거부하는 자와 언약 안에 있는 자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함이지, 누군가의 사주팔자를 알려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생의 앞날을 사람이 미리 점칠 수 없도록 가려두셨습니다. 전도서 3장에서 "모든 것에 때가 있다"고 말씀하실 때도, 그 때를 주장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자기 계산을 갖고 미리 재단하며 살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라는 뜻입니다. 개인의 운명에 집착하는 순간, 우리는 자신이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모든 언약의 중심을 자기 자신에게 옮겨놓게 됩니다. 그러한 뒤틀림에서 "우리에게만 와야 구원이 있다"는 식의 이단들이 자라납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자격도, 비결도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은혜입니다. 오직 주님의 긍휼이 임한 자만이 주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 긍휼을 받은 사람의 관심사는 완전히 바뀝니다. 더 이상 "내 인생이 어떻게 될까"가 아니라 "주님이 어떻게 일하실까"로 옮겨갑니다.
이사야 24장은 바로 그 하나님의 일하심, 곧 온 세계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보여줍니다.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호와께서 땅을 공허하게, 황무하게 뒤집어엎으신다는 것입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어느 도시에 강력한 지진이 났습니다. 그 순간 땅이 흔들리면 무슨 일이 벌어집니까? 값비싼 저택도 무너지고, 허름한 판잣집도 무너집니다. 은행 금고의 문도 뒤틀리고, 노숙자의 담요도 흩날립니다. 지진 앞에서는 그 사람이 사장이었는지 직원이었는지, 건물주였는지 세입자였는지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땅이 흔들리는 순간, 사람이 세워놓은 모든 구별의 선이 함께 흔들립니다.
2절이 바로 그 모습을 그립니다. 백성과 제사장, 종과 주인, 사는 자와 파는 자, 빚 주는 자와 빚 얻는 자, 이 모든 구별이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쓸모가 없어집니다. 세상은 늘 보이지 않는 선을 그으며 살아갑니다. 누가 부자인가, 누가 좋은 집안 출신인가, 누가 학벌이 좋은가, 누가 건강한가, 이런 기준으로 성공과 실패를 나누고, 그 선 안에 들어가려고 평생을 애씁니다.
어느 성도님이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젊었을 때는 명함에 찍힌 직함이 자기의 전부인 줄 알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은퇴하고 명함이 없어지자, 처음으로 자신이 누구인지 다시 물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목사님, 명함 없이 서 있으니 제가 참 초라해 보이더라고요." 그 고백이 바로 이사야 24장이 말하는 진실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붙들고 있던 신분과 구별들은 실은 하나님 앞에서 이미 심판받아 마땅한 것들이었습니다. 그 구별 자체가 인간의 죄악이 만들어낸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부자인 것도, 집안이 좋은 것도, 얼굴이 예쁘고 건강한 것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18절은 이 심판을 노아 홍수의 이미지로 그립니다. "위에 있는 문이 열리고"라는 표현은 하늘 문이 열려 홍수가 쏟아지던 그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앞으로도 하늘이 열려 불이 쏟아지면, 이 땅 위에 세워진 모든 가치는 무너집니다.
그런데 이것이 단지 무서운 심판의 예고에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새 하늘과 새 땅을 다스리실 때, 그곳은 사람의 차별이 없는 곳, 오직 주님의 은혜와 긍휼만 넘치는 곳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떠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심판에서 건짐받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면, 세상의 구별이 그대로 재현되는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교회 안에도 여전히 학벌과 재산과 직분으로 사람을 저울질하는 문화가 있다면, 그것은 아직도 심판받아야 할 세상의 모습이 그 안에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심판이 필요합니까? 5절과 20절이 답합니다. 사람의 죄악 때문입니다. 5절은 "그 거민이 땅을 더럽혔다"고 말합니다. 율법을 범하고, 율례를 어기고, 영원한 언약을 파기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기 욕구를 따라 산 이 세상에 대한 심판입니다. 20절은 그 죄악이 "중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진단의 원리를 배웁니다. 개인이든, 단체든, 국가든, 성경적으로 진단하면 결국 죄로 인해 망합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렇게 무너져가는 세상 한복판에서 사람들은 오히려 점쟁이를 찾아다니며 자기 생존을 보장받으려 애씁니다. 그것 자체가 이미 심판 아래 있다는 증거입니다. 무너지는 집 안에서 벽지 색깔을 고민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자기 백성만 남기시기 위함입니다. 13절은 이 남은 자를 두 가지 그림으로 보여줍니다. 감람나무를 흔들어 열매를 다 거두고 나면 꼭대기에 몇 개가 남습니다. 포도를 다 수확하고 나면 잎사귀 뒤에 가려 보이지 않던 몇 송이가 남습니다.
이 그림이 중요한 것은, 남은 자들이 자기 의로운 행위 때문에 남겨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감람나무 꼭대기에 남은 열매가 특별히 뛰어나서 남은 것이 아닙니다. 단지 손이 닿지 않은 자리에 있었을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이 남겨진 것은 그들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과 선택 때문입니다. 동일한 심판을 받아 마땅했으나, 오직 은혜로 건짐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남은 자들은 이제 다시는 세상의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빈부귀천, 성공과 실패의 잣대는 이미 심판받은 것들입니다. 오직 주님의 기준으로 살아가며, 주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이유가 나옵니다. 21~22절은 그날에 여호와께서 높은 군대, 곧 타락한 천사들과 그들의 조종을 받는 땅의 왕들을 벌하신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어느 법정에서 흉악한 범죄자에게 이미 유죄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판사의 망치는 이미 두드려졌고, 판결문도 낭독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형량이 집행되는 날짜뿐입니다. 그런데 그 범죄자가 아직 감옥 밖을 활보하고 있다고 해서, 그가 무죄라거나 힘이 그대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미 그의 운명은 결정되었습니다.
사탄과 그의 권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와 부활로 이미 심판이 내려졌습니다. 베드로후서 2장 4절은 범죄한 천사들이 이미 지옥에 던져져 심판 날까지 지킴을 받고 있다고 말합니다. 유다서 6절도 같은 진실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20장에서는 옛 뱀, 곧 마귀가 결박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전에는 아무도 사망의 권세에서 빠져나갈 수 없었지만, 이제는 십자가의 능력이 그 권세 아래 있던 자들을 건져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이 세상의 임금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기준, 세상의 가치관에 의한 평가와 판단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재판장은 이미 판결을 받은 피고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심판에서 건짐받은 남은 자들은 무엇을 합니까? 14절 이하는 이렇게 답합니다. 그들은 노래합니다. "의로우신 자에게 영광을 돌리세." 14절의 "바다와 동방"이라는 표현을 두고 어떤 이단들은 "동방"을 한국으로, 특정 인물을 그 예언의 성취자로 왜곡하여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의미는 훨씬 단순하고 웅장합니다. 서쪽에서 동쪽까지, 땅끝에서부터, 곧 온 세상 각처에서 심판을 통과하여 나온 무리가 함께 찬양한다는 것입니다.
그 찬양의 영광이 얼마나 큰지, 23절은 해와 달이 무색해질 정도라고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21장 23절도 같은 그림을 그립니다. 새 예루살렘 성에는 해와 달의 비침이 필요 없는데,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친히 비추시고 어린양이 그 빛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어린양이 성전이 되시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자신이 곧 그 성전의 실체를 이 땅에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4장에서 장로들이 보좌 앞에 엎드려 영광을 돌리는 장면도 같은 결말을 가리킵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마땅히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그날, 지금 이 순간 그 영광을 미리 찬양하는 자가 바로 그날 그 자리에 서게 될 사람입니다.
처음에 이야기했던 그 청년은 점쟁이에게서 자기 운명의 지도를 얻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24장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지도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개인의 사주팔자가 아니라,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크신 경륜입니다. 땅이 뒤집히고 모든 인간의 구별이 무너지는 그 심판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은 감람나무 꼭대기의 열매처럼, 포도나무 잎사귀 뒤의 몇 송이처럼 자기 백성을 은혜로 남겨두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내 앞날이 어떻게 될까"가 아니라 "나는 그 남은 자의 무리 가운데 있는가"입니다. 그리고 그 답을 이미 아는 사람이라면, 지금 이 자리에서부터 노래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의로우신 자에게 영광을 돌리세." 이 노래는 그날에 처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이미 시작된 노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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