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환상의 골짜기에 관한 경고라 네가 지붕에 올라감은 어찌함인고, 소란하며 떠들던 성, 즐거워하던 고을이여 너의 죽임을 당한 자들은 칼에 죽은 것도 아니요 전쟁에 사망한 것도 아니라. 너의 관원들도 다 함께 도망하였다가 활을 버리고 결박을 당하였고 너의 멀리 도망한 자들도 발견되어 다 함께 결박을 당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지어다 나는 슬피 통곡하겠노라 내 딸 백성이 패망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나를 위로하려고 힘쓰지 말지니라. 환상의 골짜기에 주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이르는 소란과 밟힘과 혼란의 날이여 성벽의 무너뜨림과 산악에 사무쳐 부르짖는 소리로다. 엘람 사람은 화살통을 메었고 병거 탄 자와 마병이 함께 하였고 기르 사람은 방패를 드러냈으니, 병거는 네 아름다운 골짜기에 가득하였고 마병은 성문에 정렬되었도다. 그가 유다에게 덮였던 것을 벗기매 그 날에야 네가 수풀 곳간의 병기를 바라보았고, 너희가 다윗 성의 무너진 곳이 많은 것도 보며 너희가 아랫못의 물도 모으며, 또 예루살렘의 가옥을 계수하며 그 가옥을 헐어 성벽을 견고하게도 하며, 너희가 또 옛 못의 물을 위하여 두 성벽 사이에 저수지를 만들었느니라 그러나 너희가 이를 행하신 이를 앙망하지 아니하였고 이 일을 옛적부터 경영하신 이를 공경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 날에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명령하사 통곡하며 애곡하며 머리 털을 뜯으며 굵은 베를 띠라 하셨거늘, 너희가 기뻐하며 즐거워하여 소를 죽이고 양을 잡아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하는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친히 내 귀에 들려 이르시되 진실로 이 죄악은 너희가 죽기까지 용서하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이사야 22:1~14)
기원전 701년, 예루살렘 성벽 위에 한 노인이 서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이사야입니다. 성 안에서는 잔칫상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소를 잡고 양을 잡고, 포도주 잔이 쉼 없이 채워졌습니다. 웃음소리, 악기 소리,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함성이 골목마다 넘쳐났습니다.
그런데 그 소란 한복판에서, 늙은 선지자 혼자만이 얼굴을 가리고 울고 있었습니다. 누군가 다가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합니다. "선지자님, 왜 이렇게 슬퍼하십니까? 오늘은 기쁜 날 아닙니까?" 이사야는 고개를 젓습니다. "돌이켜 나를 보지 말라. 나를 위로하려 힘쓰지 말라." 그의 눈에서는 시냇물처럼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같은 성 안, 같은 시각에 두 가지 풍경이 공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는 잔치, 하나는 통곡입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토록 극명하게 다른 두 장면이 한 도시 안에 겹쳐 있었을까요?
이사야 22장이 말하는 예루살렘은 본래 "훤화하며 떠들며 즐거워하던 고을"이었습니다. 훤화란 왁자지껄하고 요란한 잔치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즐거움이 넘치던 성읍에 죽음이 닥쳤습니다. 그것도 전쟁터에서 당당히 싸우다 죽은 죽음이 아니라, 도망가다가 붙잡혀 죽은 초라한 죽음이었습니다. 관원도 백성도 모두 도망하다 죽었습니다. 이런 참혹한 소식 앞에서 이사야는 도무지 사람들과 함께 웃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내 딸 내 백성이 패멸하였음을 인하여 나는 통곡하니 나를 위로하려고 힘쓰지 말라."
그리고 12절과 13절에서 이 대비는 절정에 이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날에 통곡하며 애곡하며 머리털을 뜯으며 굵은 베를 띠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의 반응은 정반대였습니다. "우리가 기뻐하며 즐거워하여 소를 잡고 양을 죽여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내일 죽으리니 오늘 먹고 마시자." 회개하고 돌아와야 할 심판의 경고 앞에서, 이들은 오히려 잔치를 벌이는 쪽을 택한 것입니다.
이 반응은 낯설지 않습니다. 언젠가 한 청년이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습니다. "복음을 들으면 참 허무해요. 세상에 아름다운 일들도 많은데, 그걸 다 죄로 보고 결국 다 불살라 없어질 세상이라고 하니까요." 그 말에 대한 대답은 이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허무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빨리 그 허무함을 알아야 합니다." 전도서의 결론이 바로 그것입니다.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것이 헛됨을 알아야, 비로소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사람의 본분임을 깨닫게 됩니다.
문제는 아직 젊고 꿈이 많을 때는 이 헛됨을 인정하기가 너무 힘들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하는데, 그 모든 것이 헛되다고 하니 도무지 힘이 빠져버립니다. 방향은 어렴풋이 알겠는데 아직 방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방황과는 다른, 더 위험한 반응이 있습니다. "그래, 어차피 망할 세상, 먹고 마시자"는 반응입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이런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다름 아닌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 그것도 복음을 좀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이 잔치만 벌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5절부터 상황이 급변합니다. 잔치의 요란함이 전쟁의 요란함으로 바뀝니다. 앗수르의 속국인 엘람과 기르 사람들이 화살통을 메고 방패를 들고 예루살렘을 향해 진군해 옵니다. 요새들이 무너지고, 적군이 성 앞에 진을 칩니다.
그러자 예루살렘 성 안에서는 분주한 움직임이 시작됩니다. 솔로몬 시대에 지어진 수풀 곳간의 무기고를 열어 무기를 점검합니다. 열왕기상 10장에 보면 솔로몬이 레바논에서 수입한 나무로 13년에 걸쳐 궁궐을 지을 때 함께 만든 무기고였습니다. 사람들은 성벽을 보수하기 위해 가옥을 헐어 무너진 곳을 메웁니다. 국가를 지키기 위해 개인의 집을 희생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저수지를 만듭니다. 옛날 전쟁은 성문을 걸어 잠그고 포위하여 굶주릴 때까지 기다리는 방식이었으니, 물의 저장은 생존의 필수 조건이었습니다. 무장하고, 성벽을 쌓고, 물을 저장하고, 상식적으로 보면 지극히 당연하고 심지어 지혜로운 대비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이 모든 준비를 칭찬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책망하셨습니다.
11절 중간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 일을 하신 자를 앙망하지 아니하였고 이 일을 옛적부터 경영하신 자를 존경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적이 왜 쳐들어왔는지, 성벽이 왜 무너졌는지, 그 모든 일의 배후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지도 존경하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준비는 완벽했으나, 그 준비 안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이런 모습은 낯설지 않습니다. 오래전 2000년을 앞두고 이른바 Y2K 대란을 걱정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컴퓨터 시스템이 마비될 것이라는 공포 속에서 사람들은 생수를 사재기하고, 비상식량을 지하실에 쌓아두고, 발전기를 준비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위기 앞에서 눈에 보이는 대비책을 세우는 것, 그것이 인간의 본능입니다.
그러나 정작 그 위기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회개하며 나아가는 사람은 드물었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무기고를 열고 성벽을 쌓고 저수지를 팠지만, 정작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자연스러운 의문이 생깁니다. 그러면 무기도 없이, 성벽도 없이, 물도 없이 어떻게 살라는 말인가? 이 질문에 답하려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땅의 특성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신명기 11장 10~11절은 애굽 땅과 약속의 땅을 대조합니다. 애굽은 나일강이 흐르는 땅이라 발로 물레방아를 돌려 강물을 끌어올리기만 하면 언제든 물을 댈 수 있었습니다. 사람의 수고와 기술로 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약속의 땅 가나안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늘에서 비가 내려야만 땅이 물을 머금는 곳입니다. 관개시설로 통제할 수 없고, 오직 하늘을 바라보아야 하는 천수답 같은 땅입니다.
농사의 관점에서만 보면 애굽 땅이 훨씬 살기 좋은 땅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하필 하늘만 바라보아야 하는 땅을 약속의 땅으로 정하셨을까요? 답은 단순합니다. 너희의 실력을 의지하지 말고 나의 도움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순종하면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에 맞게 내려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불순종하면 하늘이 놋처럼 굳어버릴 것이라고도 하셨습니다. 그러니 예루살렘 사람들이 자기 손으로 저수지를 파서 생존을 도모한 이 행위 자체가,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의 결과였던 것입니다.
예레미야 2장 13절은 이 모든 것의 핵심을 보여줍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라." 하나님을 버린 것이 첫 번째 죄요,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이 두 번째 죄입니다. 그런데 그 웅덩이조차 터져서 물을 담아내지 못하는 헛수고였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도 이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교회가 무엇을 준비해야 합니까? 재정도, 건물도, 조직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가는 일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만하면 이제 망하지 않을 거야"라고 말할 때, 그 확신의 근거가 무엇인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부동산의 규모나 조직의 방대함으로 안심하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예루살렘 사람들이 저지른 것과 같은 오류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헌금에 대해 지나치게 염려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의 힘이 통하지 않는 유일한 곳이 교회가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세상과 똑같이 돈을 의지하려 한다면 그것은 생수의 근원을 버리고 터진 웅덩이를 파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사야가 홀로 울었던 이유는 감정에 겨워서가 아니었습니다. 자기 신세를 한탄하는 눈물도 아니었습니다. 시편 119편 136절의 고백처럼, "저희가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라는 눈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예루살렘을 향한 눈물이었고,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달려가는 자기 자신을 향한 눈물이기도 했습니다.
우리의 손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그 어떤 준비도, 심지어 자기 몸을 다 바쳐 내어준다 할지라도, 회개 없이는 소용이 없습니다. 무기와 성벽과 저수지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오직 생수의 근원되신 주님께로 날마다 돌이켜 나아가는 것, 그 십자가의 사랑 안에서 참된 만족을 발견하는 것, 그것이 오늘 이사야 22장이 우리에게 건네는 마지막 초청입니다. 잔치를 멈추고, 터진 웅덩이 파는 손을 멈추고, 성벽 위의 그 노인처럼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자리로 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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