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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이사야

이사야 - 무덤을 준비하는 손, 셉나 이야기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8. 12.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가서 그 국고를 맡고 왕궁 맡은 자 셉나를 보고 이르기를, 네가 여기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여기에 누가 있기에 여기서 너를 위하여 묘실을 팠느냐 높은 곳에 자기를 위하여 묘실을 팠고 반석에 자기를 위하여 처소를 쪼아내었도다. 나 여호와가 너를 단단히 결박하고 장사 같이 세게 던지되, 반드시 너를 모질게 감싸서 공 같이 광막한 곳에 던질 것이라 주인의 집에 수치를 끼치는 너여 네가 그 곳에서 죽겠고 네 영광의 수레도 거기에 있으리라. 내가 너를 네 관직에서 쫓아내며 네 지위에서 낮추리니, 그 날에 내가 힐기야의 아들 내 종 엘리아김을 불러, 네 옷을 그에게 입히며 네 띠를 그에게 띠워 힘 있게 하고 네 정권을 그의 손에 맡기리니 그가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의 집의 아버지가 될 것이며, 내가 또 다윗의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 못이 단단한 곳에 박힘 같이 그를 견고하게 하리니 그가 그의 아버지 집에 영광의 보좌가 될 것이요. 그의 아버지 집의 모든 영광이 그 위에 걸리리니 그 후손과 족속 되는 각 작은 그릇 곧 종지로부터 모든 항아리까지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는 단단한 곳에 박혔던 못이 삭으리니 그 못이 부러져 떨어지므로 그 위에 걸린 물건이 부서지리라 하셨다 하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이사야 22:15~25)

전쟁이 코앞까지 다가온 도시를 상상해 보십시오. 성벽 밖에는 적군의 깃발이 나부끼고, 성 안 사람들은 밤새 무기를 만들고 저수지를 파며 성벽을 보강합니다. 그런데 그 다급한 손놀림 속에 정작 빠진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향한 회개입니다. 예루살렘이 그러했습니다. 적의 침략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이었습니다. 백성들이 정신을 차리고 돌이켜야 할 순간이었지만, 그들은 오히려 자기 힘으로 살길을 찾아 나섰습니다. 집을 헐어 성벽을 쌓고, 물을 저장할 못을 만들었습니다.

시편 기자는 일찍이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그러나 그들의 눈에는 오직 생존만 보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런 체념 섞인 말이 흘러나옵니다. "내일 죽을 것이니 먹고 마시자." 나라 전체가 이런 지경에 처했다면, 적어도 백성을 이끄는 지도자들만큼은 무릎을 꿇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사야 22장은 정반대의 풍경을 보여줍니다. 나라의 존망이 흔들리는 그 순간, 한 고위 관료가 몰두하고 있던 일은 다름 아닌 자기 무덤을 화려하게 꾸미는 일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셉나, 히스기야 왕 시절, 엘리아김·요아와 더불어 아람 군대 앞에 나라를 대표해 나섰던 인물이니 그 권세가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갑니다. 본문은 그를 "
국고를 맡고 궁을 차지한 자"라 부릅니다. 나라의 곳간과 왕궁의 실권을 함께 쥔, 그야말로 정점에 선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물으십니다. "
네가 여기 무슨 관계가 있느냐? 여기 누가 있기에 여기서 너를 위하여 묘실을 팠느냐?" 이스라엘의 무덤은 대개 바위굴을 파서 만들었는데, 높은 곳의 바위를 깎아 묘실을 마련하는 것은 상당한 재력과 권세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셉나는 살아 있는 동안 이미 자신의 사후 영광까지 계획해 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 아닙니까? 나라가 무너지느냐 마느냐 하는 판국에, 무덤이 대체 무슨 급한 일이란 말입니까? 먹고 사는 일도 버거운 사람에게 죽은 뒤의 문제는 한참 뒤로 밀려나는 법인데, 셉나는 오히려 그 위기의 순간을 자기 사후의 영예를 완성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나라가 흔들릴수록 자기 하나의 안녕과 영광에만 몰두했던 것입니다.

셉나와 같은 마음을 품었던 또 한 사람이 성경에 등장합니다. 아합 왕입니다. 그는 나봇의 포도원이 탐이 나서 바꾸자고 제안했지만 나봇은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조상에게 물려받은 유업을 함부로 넘길 수 없다는 이유였습니다. 이스라엘의 땅은 애초에 하나님의 소유였기에, 형편이 어려워 경작권을 잠시 팔더라도 희년이 되면 반드시 원주인에게 돌아가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왕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땅이었건만, 아합의 아내 이세벨은 나봇을 모함해 죽이고 포도원을 손에 넣습니다. 그러자 선지자 엘리야가 찾아와 선언합니다.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그 자리에서, 아합의 피도 핥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왕조차 자기 마음대로 남의 것을 취할 수 없는데, 하물며 신하인 셉나가 나라의 곳간을 맡은 권세로 자기 무덤을 높은 곳에 마련한 것은 얼마나 큰 월권이었겠습니까? 백성을 섬기라고 준 권세를 자기 배를 불리는 데 쓴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무덤의 위치조차 그 사람의 삶을 증언했습니다. 역대하는 왕들의 마지막 자리를 하나하나 기록합니다. 여호람은 다윗성에 묻히긴 했으나 열왕의 묘실에는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반면 여호야다는 하나님과 성전에 대한 헌신 때문에 열왕의 묘실에 안장되는 영예를 얻었습니다. 악한 왕 아하스는 열왕의 묘실에 들이지 못했고, 히스기야는 다윗 왕의 묘실 중에서도 높은 곳에 묻혀 그 죽음에 존경이 표해졌습니다.

이처럼 무덤 자리 하나에도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그리고 백성 앞에 어떻게 살았는지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셉나는 그 자리를 스스로 높여 미리 예약해 둔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까지 겸손이 아니라 교만을 택한 셈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냉정합니다. 마치 종이를 둘둘 말아 공처럼 만들어 던져버리듯, 셉나를 광막한 땅으로 내던지겠다고 하십니다. 그가 왕에게, 나아가 하나님께 끼친 수치에 걸맞은 처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심판은 셉나 한 사람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의 자리를 이용해 함께 배를 불리던 친인척들까지 모두 함께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단단한 곳에 박혔던 못이 삭아 부러지면, 그 못에 걸어두었던 모든 물건이 함께 땅에 떨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여기서 잠시 멈춰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셉나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는 흔히 "
저 나쁜 사람"이라 손가락질하고, 자신은 그 뒤를 이은 신실한 엘리아김쯤으로 여기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정직하게 들여다보면,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도 셉나가 살고 있습니다.

가정에 어려움이 닥치거나 몸담은 공동체에 위기가 찾아올 때, 우리가 가장 먼저 계산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보다 먼저 자기 손익을 따지지는 않습니까. 교회에 문제가 생겼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자든 성도든, 하나님의 뜻을 좇아 반응하기보다 자신에게 돌아올 유불리부터 헤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상갓집에서 슬픔보다 유산 문제에 더 신경이 쏠리는 모습, 공동체의 위기 앞에서 자기 자리 보전에 더 골몰하는 모습,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 안에 자리 잡은 셉나의 얼굴입니다.

하나님은 셉나를 그 자리에서 끌어내리시고 엘리아김을 세우십니다. 그에게 옷을 입히고 띠를 띠워 정권을 맡기시며,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 집의 아비가 되게 하십니다. 그리고 다윗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시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고 닫으면 열 자가 없게 됩니다. 고대에는 제사장이 자신의 신분을 나타내기 위해 열쇠를 어깨에 두르는 관습이 있었다고 하니, 이는 곧 권세의 상징이었습니다. 잘 박힌 못처럼 견고하여, 그 집안의 모든 영광이, 크고 작은 그릇 하나하나까지, 그에게 걸리게 됩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25절은 다시 말합니다. 그날에는 그 못마저 삭아서 부러지리라고 말입니다. 셉나뿐 아니라 엘리아김도 결국 영원하지 못했습니다. 다윗의 궁 자체가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견고해 보이는 못이라도, 그 못이 박힌 집이 무너지면 함께 부서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말씀은 신약에서 뜻밖의 방식으로 다시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이 구절을 둘러싸고 오랜 신학적 논쟁이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베드로가 초대 교황으로서 영원한 천국 열쇠를 가졌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셉나와 엘리아김의 이야기를 통해 보면 다른 그림이 보입니다. 엘리아김은 열쇠를 손에 쥐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인의 명을 받드는 청지기의 자리였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열고 닫은 것이 아니라, 왕의 뜻대로 움직인 것입니다. 베드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매고 푸는 권세를 가진 것은 그의 신앙고백이 자기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이 알게 하신 고백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그 누구도 영원한 열쇠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열쇠의 참된 주인은 누구입니까? 요한계시록 3장은 빌라델비아 교회에 나타나신 주님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자가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인내로 믿음을 붙든 성도들에게, 주님은 아무도 닫을 수 없는 열린 문을 두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 열쇠를 가지신 분이 바로 일찍이 죽임당하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셉나도, 엘리아김도 결국은 삭아서 부러지는 못이었습니다. 이 땅에서 아무리 견고해 보이는 자리와 권세도, 그것을 지탱하던 집이 무너지면 함께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평생 쌓아 올린 성취, 사람들에게 인정받은 지위, 스스로 자랑스러워하는 신앙의 이력조차도 그리스도께 붙어 있지 않다면 언젠가 삭은 못처럼 부러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던져지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지금 무엇에 매달려 있는가? 세상이 흔들릴 때 가장 먼저 계산기를 두드리는 셉나의 마음으로 살고 있지는 않은가? 아니면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그분,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붙들고 있는가?

나의 행위나 공적, 세상이 견고하다고 여기게 만든 그 모든 것들이 언젠가는 삭아 부러질 못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고, 열면 닫을 자 없고 닫으면 열 자 없는 그 약속의 주인이신 주님만이 우리가 영원히 매달릴 수 있는 참된 못이 되십니다. 오늘도 우리의 소망을 어디에 걸어두고 있는지, 조용히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아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