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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이사야

이사야 - 벗은 발로 걷는 예언자, 애굽과 구스를 의지하지 말 것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8. 6.

"앗수르의 사르곤 왕이 다르단을 아스돗으로 보내매 그가 와서 아스돗을 쳐서 취하던 해니라. 그 때에 여호와께서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갈지어다 네 허리에서 베를 끄르고 네 발에서 신을 벗을지니라 하시매 그가 그대로 하여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니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종 이사야가 삼 년 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며 애굽과 구스에 대하여 징조와 예표가 되었느니라. 이와 같이 애굽의 포로와 구스의 사로잡힌 자가 앗수르 왕에게 끌려갈 때에 젊은 자나 늙은 자가 다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볼기까지 드러내어 애굽의 수치를 보이리니, 그들이 바라던 구스와 자랑하던 애굽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놀라고 부끄러워할 것이라. 그 날에 이 해변 주민이 말하기를 우리가 믿던 나라 곧 우리가 앗수르 왕에게서 벗어나기를 바라고 달려가서 도움을 구하던 나라가 이같이 되었은즉 우리가 어찌 능히 피하리요 하리라."(이사야 20:1~6)

어느 겨울, 한 목회자가 심방을 나섰다가 신발장 앞에서 잠시 멈춰 섰습니다. 낡은 운동화와 새로 산 구두가 나란히 놓여 있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
내가 오늘 어떤 신발을 신고 나가느냐에 따라 걸음걸이가 달라지는구나." 좋은 신발을 신으면 발걸음이 당당해지고, 낡은 신발을 신으면 왠지 위축이 됩니다. 신발 하나가 이렇게 사람의 마음가짐을 바꾸어 놓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에게 신발을 벗으라고 하셨습니다. 옷도 벗으라고 하셨습니다. 삼 년 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불편함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가장 기본적으로 갖추는 최소한의 존엄, 그것을 벗어버리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이사야 20장의 배경은 앗수르 왕 사르곤의 시대입니다. 오랫동안 성경 밖에서는 사르곤이라는 왕의 실존이 확인되지 않아 의심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근래에 고대 앗수르의 폐허에서 발견된 비문을 통해, 사르곤이 살만에셀의 후계자요 예루살렘을 공격했던 산헤립의 아버지로서 여러 나라를 정복한 영웅적인 왕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역사는 이렇게 성경의 기록이 결코 허구가 아님을 증명해 줍니다.

이 사르곤 왕이 군대장관을 보내어 아스돗을 침공하던 그 삼 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에게 이상한 행동을 명령하셨습니다. 옷을 벗고 신을 벗은 채로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장차 애굽과 구스가 앗수르에게 정복당하여 포로로 끌려갈 때의 모습을 미리 보여 주는 예표였습니다. 젊은 자나 늙은 자나 할 것 없이 벗은 몸, 벗은 발로 엉덩이까지 드러낸 채 끌려가는 그 수치스러운 모습을, 이사야는 자신의 몸으로 삼 년 동안 예언했던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남진 앞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살아남기 위한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애굽과 구스라는 강대국과 동맹을 맺는 것이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군사력, 눈에 보이는 경제력, 눈에 보이는 힘을 의지하는 것이 당연해 보였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자니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오직 약속의 말씀만 주어질 뿐이었습니다. 그 약속을 붙들 믿음이 없으니, 자연히 눈에 보이는 강대국으로 마음이 기울었던 것입니다.

한 마을에 큰 느티나무가 있었습니다. 수백 년 동안 그 자리를 지키며 마을 사람들에게 그늘을 주었기에, 사람들은 폭풍이 몰아쳐도 그 나무 아래로 피신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태풍이 지나간 다음 날, 마을 사람들이 눈을 떠 보니 그 거대한 느티나무가 뿌리째 뽑혀 쓰러져 있었습니다. 오랜 세월 믿고 의지했던 그 그늘이, 정작 가장 필요한 순간에 함께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의지하던 애굽과 구스도 그러했습니다. 이사야는 미리 예고합니다. 그들이 믿고 자랑하던 그 나라가, 이스라엘보다 먼저 벗은 몸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갈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날, 해변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탄식하게 될 것입니다. "
우리가 도움을 얻으려고 바라던 나라가 이 꼴이 되었으니 우리가 어찌 능히 피하리요."

시대는 바뀌었지만 사람이 무언가를 의지하려는 마음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어떤 이들은 유전자 연구가 인간의 모든 것을 설명해 줄 것이라 기대합니다. 사람이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고 문화를 만드는 것조차 유전자의 자기복제 명령이라 설명하려는 시도들이 있습니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분명 놀랍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 존재의 궁극적인 답이 되어 줄 수는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 손에 잡히는 것만을 진리의 기준으로 삼으려는 태도는, 결국 이스라엘이 애굽과 구스를 바라보던 그 시선과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각자의 애굽과 구스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통장의 잔고일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자녀의 성공일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사회적 지위일 수 있습니다. 그것들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을 붙들고 "
이것만 있으면 안전하다"고 여기는 마음입니다.

에스겔 29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애굽을 심판하시는 이유를 분명히 밝히십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의지하였기 때문에, 그 의지하는 지팡이를 부러뜨리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언뜻 가혹해 보이지만, 실은 이스라엘을 향한 은혜였습니다. 의지하던 지팡이가 부러져야, 비로소 참된 반석이신 주님을 붙잡게 되기 때문입니다.

한 등산객이 가파른 산길에서 나뭇가지를 지팡이 삼아 짚으며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가지가 뚝 부러지면서 몸이 휘청했습니다. 하마터면 크게 넘어질 뻔한 순간, 그는 본능적으로 옆에 있던 단단한 바위를 붙잡았습니다. 나중에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
그 나뭇가지가 부러지지 않았더라면, 저는 계속 그 약한 것을 믿고 의지했을 겁니다." 부러짐이 오히려 그를 더 견고한 반석으로 이끈 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의지하는 것들을 종종 부러뜨리십니다. 그것은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것이 아니라, 부러지지 않는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우리 손을 옮기게 하시려는 사랑의 손길입니다.

이사야가 삼 년 동안 벗은 몸으로 살았던 것은, 세상의 눈으로 보면 수치스럽고 이해할 수 없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하나님의 메시지였습니다. 참된 선지자의 삶은 이처럼 세상의 흐름을 거스르는 삶입니다. 세상이 강대국을 의지하라 할 때, 하나님만 의지하라고 외치는 삶입니다.

이러한 삶은 환영받지 못합니다. 오히려 믿는다는 사람들 안에서조차 배척당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이 시대의 흐름 속에서 얼마나 안일하게 살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거울이 됩니다. 고난과 핍박이 없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세상의 대세를 그대로 따라 흘러가고 있다는 뜻일지도 모릅니다.

에스겔의 부자 비유에서 하나님께서는 물으십니다. "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우리가 붙들고 있는 것이 진정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지, 오늘 우리의 영혼을 두고 점검해야 합니다.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것보다 더 시급한 것은, 지금 내가 무엇을 의지하며 살고 있는지를 살피는 일입니다.

이사야의 벗은 발은 부끄러움의 상징이었지만, 동시에 진실을 향한 초대였습니다. 우리가 붙들던 것들이 벗겨지는 그 순간에도 여전히 굳게 서 계신 분, 그분만이 참된 반석이십니다. "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는 말씀처럼, 오직 그 반석 위에 선 자만이 마지막 날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