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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이사야

이사야 - 손으로 지은 것, 손으로 지으신 분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8. 3.

"그 날에 사람이 자기를 지으신 자를 쳐다보겠으며 그 눈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바라보겠고 자기 손으로 만든 단을 쳐다보지 아니하며 자기 손가락으로 지은 아세라나 태양상을 바라보지 아니할 것이며"(이사야 17:7~8)

어느 해 12월 초, 한 목회자가 설교를 준비하다가 문득 달력을 보고 놀랐습니다. 머릿속으로는 아직 11월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미 12월이 시작된 지 며칠이 지나 있었던 것입니다. 예전 같으면 이런 일로 밤잠을 설쳤을 그였습니다. 새해가 다가온다는 것, 한 해가 저문다는 것에 유난히 예민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한 달이 바뀌고 한 해가 바뀌어도, 심지어 천 년이 바뀌어도 별다른 동요가 없어진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처음엔 이것이 무뎌진 것인가 걱정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오히려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만약 그가 여전히 원대한 계획과 야심을 품고 살았더라면,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참된 안식 없이 날마다 시간과 날짜에 쫓기며 살았을 것입니다. 새해가 되면 부흥의 비결을 찾아 이 세미나 저 세미나를 기웃거리고, 주변 사람들까지 그 조급함에 함께 지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교회가 연말이 되면 "
새롭게 하자"는 구호 아래 특별새벽기도회와 각종 행사를 쏟아냅니다. 날짜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그 날짜가 무언가를 바꿔줄 것처럼 매달립니다. 그러나 정직하게 물어야 합니다. 해 아래 새것이 어디 있습니까?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만이 날마다 새로운 존재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 진짜 새로움은 달력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정체성에서 옵니다. 세상의 야심을 성경의 언어로 포장하는 일을 그쳐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사야 17장은 다메섹과 이스라엘, 두 나라를 향한 하나님의 경고로 시작됩니다. 다메섹은 훗날 사도 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가던 길에서 오히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회심하게 되는, 바로 그 "
다메섹"입니다. 이 다메섹은 아람의 수도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우리가 아는 대로 남북 분열 이후 북쪽 왕국을 가리키는 이름이며, 열두 지파 중 가장 영향력이 컸던 에브라임 지파의 이름으로도 불렸습니다.

두 나라가 함께 심판의 대상이 된 이유는 단순합니다. 이스라엘과 다메섹이 북쪽의 강대국 앗수르에 맞서기 위해 군사 동맹을 맺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지혜로운 생존 전략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동맹을 향해 경고하십니다. 1~3절은 다메섹에 대한 심판, 4~11절은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그리고 12~14절은 이 두 나라를 심판의 도구로 사용했던 앗수르 자신의 멸망을 예고합니다. 하나님의 막대기로 쓰임 받았던 나라조차 교만해지면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심판의 첫째 이유는 우상숭배입니다. 8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 손으로 만든 제단과 손가락으로 지은 아세라와 태양상 앞에 절하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다메섹이야 원래 우상을 섬기는 나라였다지만, 여호와의 백성이어야 할 이스라엘 안에도 온갖 우상이 가득 들어차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대목을 읽으며 의아해합니다. 나무와 돌로 깎은 형상에 왜 절을 했을까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우상숭배의 본질, 곧 그 정신을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아세라와 태양신은 풍요와 다산을 약속하는 신이었습니다. 그 신에게 잘 보이면 농사가 잘되고, 자식이 잘되고, 집안이 일어선다고 믿었습니다. 여호와를 섬긴다고 하면서도 삶이 궁핍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히려 이방 신을 섬기는 이웃들이 더 잘사는 것처럼 보이자 "
그럼 우리도 저 신을 섬겨서 잘살아보자" 하고 마음을 빼앗긴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상의 본질입니다. 우상이란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 곧 사람의 생각과 욕구와 이익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그것은 '
문화'라는 이름으로, '환경'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와 전혀 우상처럼 느껴지지 않을 뿐입니다.

어느 목회자가 월요일 아침, 유치원 앞을 지나다가 어린아이를 데리고 가는 젊은 부부의 대화를 들었던 일입니다. "
우리 아이도 뽑히도록 기도해야겠다"며, "오늘 꿈을 잘 꿔야겠다"고 말하는 소리였습니다. 원하는 유치원에 들어가는 것도 추첨으로 정해지다 보니, 그 추첨에 당첨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그런 일도 하시는 분일까요? 이런 순간, 신앙은 어느새 풍요와 다산의 신을 부르는 것과 다를 바 없어져 버립니다.

한 유명 시트콤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있었습니다. 등장인물이 길에서 목사인 친구를 우연히 만나 집으로 데려와서는, 처제가 취직할 수 있게 기도해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 예수님 하지만 그 속에는 풍요와 다산을 구하는 옛 아세라와 바알이 여전히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이 우상숭배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낳는지는, 얼마 전 일본에서 있었던 사건에서도 드러났습니다. 옆집 아이는 좋은 유치원에 들어가고 자기 아이는 떨어지자, 그 질투를 이기지 못해 이웃 아이를 해친 사건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단순한 범죄로 보지만, 본질은 우상숭배입니다. 자녀의 성공이 나의 신이 되어버릴 때, 사람은 그 신을 지키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게 됩니다.

10절은 이 우상숭배가 왜 일어나는지 그 근본 원인을 짚어줍니다. 구원의 하나님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자기 능력의 반석이신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자녀가 예수를 잘 믿는 것과 공부를 잘하는 것, 둘 다 좋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마음은 이미 후자로 기울어 있을 때가 많습니다.

처음엔 기도로 시작하지만, 기도만으로 성적이 오르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면 기도와 과외를 함께 붙잡습니다. 그러면서 은연중에 하나님의 영역과 자신의 영역을 나눕니다. '
하나님은 구원이나 맡아 주시고,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십일조는 받으시고 가만히 계셔 주십시오' 하는 마음입니다.

어느 영화에서 극한의 위기를 헤쳐 나가던 주인공이 마지막 관문 앞에서 이렇게 말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습니다. "
하나님, 이제는 방해나 하지 마세요." 이 대사가 섬뜩한 이유는, 많은 이들의 신앙생활이 실제로 이런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임종 직전에나 챙기는 마지막 보험 정도로 미뤄두고, 살아가는 동안에는 자기 방식대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새로운 현상이 아닙니다. 중세 교회가 모든 권력을 쥐고 있을 때는 교회가 하는 말이 곧 진리였습니다. 그러나 자연과학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 교회의 말을 무조건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교회는 점점 '
천국 가는 티켓을 발급하는 곳' 정도로 축소되었고, 사람들은 자기 삶의 실제 방향은 전혀 다른 기준 위에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 기준이란 결국 하나입니다. '
나에게 이익인가, 손해인가.' 이익이 되면 선이고, 손해가 되면 악입니다. 이 틀 안에서는 하나님조차 나에게 손해를 끼치면 원망의 대상이 됩니다. 지나친 말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정작 큰 어려움이 닥쳤을 때 우리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는지 돌아보면 압니다. "하나님, 제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하필 저에게 이러십니까?"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서도 손익계산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어떤 모습으로 임할까요? 4~6절은 야곱의 영광이 쇠하고, 살졌던 몸이 야위어가며, 추수가 끝난 후 이삭마저 남김없이 주워가 버린 텅 빈 들판과 같아진다고 말합니다.

어느 목회자가 예전에 아이들 설교를 위한 예화를 찾으려고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을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를 실제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얼마나 알뜰하게 추수를 하고 이삭까지 주워갔는지, 몇 줄기 밖에 건지지 못했습니다. 감나무를 흔들어 감을 다 따고 나면 맨 꼭대기에 서너 개만 남는 것처럼, 심판 뒤에 남는 자는 그렇게 적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오늘 한국 교회를 돌아보게 됩니다. 우상숭배하지 않는 교회, 우상숭배하지 않는 성도가 얼마나 있겠습니까? 우리 자신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박국 선지자가 "
주여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라고 부르짖었던 것은, 단순히 좋은 시절을 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시기를, 그리고 그 심판 가운데서도 긍휼을 잊지 말아 달라고 간구한 기도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드려야 할 기도도 다르지 않습니다. "주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진노 중에도 심판 중에도 주의 긍휼을 잊지 마소서."

그러나 이사야 17장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7~8절은 심판 이후 남은 자들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줍니다. "
그 날에 사람이 자기를 지으신 자를 쳐다보겠으며... 자기 손으로 만든 단을 쳐다보지 아니하며 자기 손가락으로 지은 아세라나 태양상을 바라보지 아니할 것이며." 이것이 심판의 진짜 목적입니다. 심판은 파괴로 끝나지 않고, 사람의 시선을 자기 손이 만든 것에서 자기를 지으신 분께로 되돌리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손으로 이루어낸 모든 것은 결국 우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주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만이 우상이 되지 않습니다.

성도의 삶이 고달픈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 스스로는 결코 끊어낼 수 없는 우상을 우리 안에서 계속 끊어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심판받지 않고 편안해 보이는 세상을 부러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 평온함 자체가 이미 다른 종류의 심판 가운데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반면 주님께 택함 받은 자는 지금 이 순간에도 다듬어지고 있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소망의 증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