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압에 관한 경고라 하룻밤에 모압 알이 망하여 황폐할 것이며 하룻밤에 모압 기르가 망하여 황폐할 것이라. 그러므로 그들이 얻은 재물과 쌓았던 것을 가지고 버드나무 시내를 건너리니, 디몬 물에는 피가 가득함이로다 그럴지라도 내가 디몬에 재앙을 더 내리되 모압에 도피한 자와 그 땅에 남은 자에게 사자를 보내리라. 다윗의 장막에 인자함으로 왕위가 굳게 설 것이요 그 위에 앉을 자는 충실함으로 판결하며 정의를 구하며 공의를 신속히 행하리라. 모압이 그 산당에서 피곤하도록 봉사하며 자기 성소에 나아가서 기도할지라도 소용없으리로다. "(이사야 15:1,7,9 16:5,12)
부산의 한 아파트 주민이 신문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옆 동네에 지은 지 삼십 년 된 아파트가 정밀안전진단에서 위험 판정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는 "우리 아파트는 괜찮을 거예요. 여긴 다르니까요"라고 했습니다. 근거는 없었습니다. 그저 자신이 사는 곳만은 예외일 거라는 막연한 믿음이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런 마음을 갖고 삽니다. 고속도로에 "졸음운전, 당신도 예외가 아닙니다"라는 경고판이 서 있어도, 운전대를 잡은 사람은 속으로 생각합니다. '나는 괜찮아.' 재난 영화를 보면서도 관객은 늘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다른 사람은 죽어도 나는 살아남을 것 같은 이상한 확신, 그것이 인간의 마음속에 뿌리내린 착각입니다.
이사야서를 읽어가다 보면 이 착각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바벨론에게 경고하셨습니다. 그 크고 화려한 제국을 빗자루로 쓸어버리듯 청소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앗수르에게도 경고하셨습니다. 세계를 경영하는 것은 앗수르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하셨습니다. 블레셋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모압 차례입니다.
우리는 이 심판의 목록을 읽으면서도 무의식중에 생각합니다. '저건 그 시대, 그 나라 이야기지. 나와는 상관없어.' 그러나 하나님의 경고는 그 당시 한 번으로 끝나는 말씀이 아닙니다. 시대를 초월해서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울리는 말씀입니다.
모압은 롯의 큰딸에게서 난 자손입니다. 사해 동편, 요단강 건너편에 자리 잡고 살았던 민족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가나안으로 들어올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모압을 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롯의 후손에게 그 땅을 기업으로 주셨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런 모압에게 이제 하나님의 심판이 선포됩니다.
이사야 15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룻밤 사이에 모압의 수도 '알'과 요새 '길'이 무너집니다. 하룻밤입니다. 수도와 요새, 국가의 심장과 방패가 동시에 무너지는 데 걸린 시간이 겨우 하룻밤이었습니다. 저녁까지만 해도 평온하게 불이 켜져 있던 도시가, 다음 날 아침이면 잿더미가 되어 있는 광경을 말입니다. 사람들은 산당으로 올라가 통곡합니다. 머리를 밀고, 수염을 깎고, 굵은 베옷을 입고 웁니다. 온 나라가 통곡의 바다가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뜻밖의 디테일을 하나 짚습니다. 7절입니다. 사람들이 자기의 재물을 손에 들고 버드나무 시내를 건너 도망칩니다. 평생 모은 재산을 챙겨 들고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사람들, 그러나 그 재물이 그들을 구원하지 못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것은 낯선 장면이 아닙니다. 화재가 난 집에서 사람들이 귀중품을 챙기려다 정작 빠져나올 시간을 놓치는 사고 소식을 우리는 종종 접합니다. 불이 나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몸을 피하는 것인데, 순간의 판단은 종종 반대로 움직입니다. 금고 속의 문서를, 서랍 속의 패물을 먼저 챙기려 합니다. 그러나 정작 그 재물은 생명을 구해주지 못합니다. 디몬의 물이 피로 가득 찼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재앙은 더해지고, 남은 자들에게까지 미칩니다.
그런데 이 절망적인 심판의 한복판에서 선지자는 뜻밖의 말을 전합니다. 16장 1절, "이 땅 치리자에게 어린양을 드리라." 이 치리자는 유다의 왕입니다. 시온산으로, 즉 유다 왕에게로 어린양을 보내라는 것입니다. 공물을 바치라는 뜻입니다. 공물을 바친다는 것은 항복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제 당신의 종입니다"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실 모압에게 이것은 낯선 일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의 시대에도, 아합의 아들 여호람의 시대에도 모압은 유다에 공물을 바친 전례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지금 다시 그 길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망하게 된 상황에서 유일한 살길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압은 그 길을 택하기가 죽기보다 싫었습니다. 6절이 그 이유를 밝힙니다. "우리가 모압의 교만을 들었나니 심히 교만하도다." 모압을 심판대에 세운 근본 원인은 다름 아닌 교만이었습니다. 자존심이 있는데 어떻게 무릎을 꿇겠습니까? "항복합니다, 살려주세요"라는 말이 목에 걸려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한 직장인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실수로 프로젝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상사에게 가서 "제 잘못입니다"라고 말하는 대신 온갖 자료를 밤새 만들어 정당성을 입증하려 애썼습니다. 야근을 하고, 보고서를 몇 번이나 고쳐 쓰고, 회의 준비를 완벽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노력의 밑바닥에는 단 한마디, "제가 틀렸습니다"를 피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결국 문제는 그 한마디를 하지 않는 한 풀리지 않았습니다.
모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2절을 보면 모압 사람들이 자기 신을 섬기는 산당에서 피곤하도록 봉사하고, 자기 성소에 나아가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종교적 열심이 헛되다고 성경은 단언합니다. "무효하리로다." 왜입니까? 항복 대신 자구책을 택했기 때문입니다. 진짜 필요한 것은 무릎을 꿇는 것인데, 그 대신 분주한 종교 행위로 대체하려 한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는 모압보다 하나님과 더 먼 이방인입니다. 그런 우리가 감히 유다의 왕 앞에 엎드리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정말 "저는 아무 공로도 없습니다, 그저 항복합니다" 하는 자세로 나아가는 것인지, 아니면 여전히 자존심을 붙든 채로 "저는 다른 건 몰라도 봉사 하나는 열심히 합니다"라고 자기 의를 세우려 하고 있는 것인지 말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런 모습을 종종 봅니다. 어떤 이는 예배 때마다 가장 먼저 와서 가장 늦게까지 남아 봉사합니다. 기도도 누구보다 열심히 합니다. 그러나 정작 마음 깊은 곳에는 하나님 앞에 완전히 내려놓지 못한 무언가가 있습니다. 자기 실력으로, 자기 성실함으로 하나님 앞에서도 인정받고 싶은 마음입니다.
이럴 때 봉사와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세우는 통로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 의를 쌓는 도구로 변질됩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봉사와 기도가 자기 욕심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오히려 화를 자초하는 일이 됩니다. 피곤하도록 봉사해도, 무릎이 닳도록 기도해도, 그것이 주님과 상관없는 일이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진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16장 5절이 답을 줍니다. "다윗의 장막에 왕위는 인자함으로 굳게 설 것이요 그 위에 앉을 자는 충실함으로 판결하며 공평을 구하며 의를 신속히 행하리라." 유다 왕에게 항복하라는 말씀은 결국 이 왕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왕위는 힘으로 섭니다. 힘이 있으면 유지되고, 힘이 빠지면 무너집니다. 그러나 유다의 왕위는 다릅니다. 인자하심으로 세워지는 보좌입니다. 그 위에 앉으실 분은 공평과 의로 다스리십니다. 이것은 바로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모압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기 재물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신에게 피곤하도록 종교 행위를 반복하지 않고, 오직 이 메시아의 통치 아래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아모스 9장 11~12절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이 다시 세워질 때, 이방 나라들도 그 기업 안으로 들어오게 될 것을 예언합니다. 모압도, 우리도 그 열방 가운데 하나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모압보다도 더 먼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지금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와 "주님만이 저의 생명이요 구원입니다" 고백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살길입니다.
이사야 16장 13~14절은 시한을 못박습니다. 유다 왕에게 항복하지 않으면 품꾼이 정한 기한처럼 삼 년 안에 모압의 영화가 능욕당하고, 남은 수가 심히 적어져 소용없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당시 품꾼의 계약 기간이 삼 년이었다고 합니다. 그 계약이 정확히 지켜지듯이, 하나님의 심판도 어김없이 임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가 붙들고 사는 것은 무엇입니까? 회사입니다. 사업입니다. 집이고 통장 잔고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사야는 삼천 년 전부터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이 지으신 손으로 짓지 않은 영원한 집이 하늘에 있음을 우리가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 거하면서도 하늘의 처소를 덧입기를 사모하며 탄식합니다.
왜 그렇게 사모해야 합니까?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기 때문입니다. 바벨론도, 앗수르도, 블레셋도, 모압도, 그리고 우리도 예외 없이 그 자리에 섭니다. 그날 통곡해도 이미 늦습니다. 지금, 오늘, 두 손 들고 그분의 다스림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보증으로 와 계신 증거는 무엇입니까? 주님과 함께 거하기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 몸으로 살든지 죽든지 그분을 기쁘시게 하고 싶은 소원, 그것이 성령이 임하신 증거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런 소원이 우리에게 낯설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우리가 성령을 온전히 받지 못했거나 말씀을 제대로 붙들지 못했다는 신호일지 모릅니다.
한 세기가 끝나고 새로운 천년이 시작될 즈음, 사람들은 저마다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새로운 다짐을 합니다. 그러나 정작 물어야 할 질문은 다른 데 있습니다. 재물이 나를 구원할 수 있는가? 내 열심과 봉사가 나를 구원할 수 있는가? 아니면 나는 이미 오래전에 항복해야 했던 왕 앞에서 여전히 자존심을 붙들고 서 있는가?
모압에게 주어졌던 살길은 오직 하나, 유다 왕에게 나아가 무릎 꿇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살길도 다르지 않습니다. 인자와 충실과 공평과 의로 다스리시는 그 메시아 앞에, 오늘 이 순간 다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러나 땅이 무너지는 날, 우리가 딛고 설 곳은 어디입니까? 이사야는 삼천 년 전부터 그 답을 우리에게 가리켜 왔습니다. 오늘 밤, 나의 영혼은 어디에 서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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