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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이사야

이사야 - 두 개의 포도원 이야기, 포도원의 노래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8. 15.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의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 그 날에 너희는 아름다운 포도원을 두고 노래를 부를지어다. 나 여호와는 포도원지기가 됨이여 때때로 물을 주며 밤낮으로 간수하여 아무든지 이를 해치지 못하게 하리로다. 나는 포도원에 대하여 노함이 없나니 찔레와 가시가 나를 대적하여 싸운다 하자 내가 그것을 밟고 모아 불사르리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 힘을 의지하고 나와 화친하며 나와 화친할 것이니라. 후일에는 야곱의 뿌리가 박히며 이스라엘의 움이 돋고 꽃이 필 것이라 그들이 그 결실로 지면을 채우리로다. 주께서 그 백성을 치셨던들 그 백성을 친 자들을 치심과 같았겠으며 백성이 죽임을 당하였던들 백성을 죽인 자가 죽임을 당함과 같았겠느냐. 주께서 백성을 적당하게 견책하사 쫓아내실 때에 동풍 부는 날에 폭풍으로 그들을 옮기셨느니라. 야곱의 불의가 속함을 얻으며 그의 죄 없이함을 받을 결과는 이로 말미암나니 곧 그가 제단의 모든 돌을 부서진 횟돌 같게 하며 아세라와 태양상이 다시 서지 못하게 함에 있는 것이라. 대저 견고한 성읍은 적막하고 거처가 황무하며 버림 받아 광야와 같은즉 송아지가 거기에서 먹고 거기에 누우며 그 나무 가지를 먹어 없이하리라. 가지가 마르면 꺾이나니 여인들이 와서 그것을 불사를 것이라 백성이 지각이 없으므로 그들을 지으신 이가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시며 그들을 조성하신 이가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시리라. 너희 이스라엘 자손들아 그 날에 여호와께서 창일하는 하수에서부터 애굽 시내에까지 과실을 떠는 것 같이 너희를 하나하나 모으시리라. 그 날에 큰 나팔을 불리니 앗수르 땅에서 멸망하는 자들과 애굽 땅으로 쫓겨난 자들이 돌아와서 예루살렘 성산에서 여호와께 예배하리라."(이사야 27:1~13)

몇 해 전, 지방의 한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성도들이 오래도록 헌신한 목사님을 위해 마음을 모아 안식년을 선물했습니다. 일 년 동안 목회의 자리를 떠나 쉬면서 공부도 하고 재충전하시라는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 목사님은 그 귀한 선물을 온전히 누리지 못했습니다. 교회를 떠나 있는 동안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것입니다. '
내가 없는 동안 교회가 흔들리면 어떡하나, 성도들이 흩어지면 어떡하나.' 결국 그는 일 년의 안식년 대신, 한 달씩 쉬는 안식월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참 성실한 목회자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사야 27장의 말씀 앞에 서면, 이것이 단순한 성실함이 아니라 믿음의 문제임을 깨닫게 됩니다. 포도원지기이신 하나님이 밤낮으로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자기 포도원을 지키신다는 약속을 정말 믿는다면, 우리는 왜 그렇게 자리를 비우지 못해 안절부절못하는 것일까요? 결국 우리는 주님의 솜씨보다 나의 실력을, 하나님의 돌보심보다 나의 부재중 관리 공백을 더 크게 느끼고 사는 것은 아닐까요?

이사야서에는 두 개의 포도원 노래가 나옵니다. 5장의 포도원과 27장의 포도원입니다. 둘 다 이스라엘을 가리키지만, 그 결말은 정반대입니다. 5장의 포도원은 심판을 받습니다. 좋은 포도나무를 심고 극진히 돌보았음에도 들포도만 맺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27장의 포도원은 하나님의 극진한 보호 아래 있습니다. 같은 하나님의 포도원인데, 어째서 한쪽은 무너지고 한쪽은 지켜지는 것일까요?

그 답은 5장 8절에 있는 죄의 실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
가옥에 가옥을,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홀로 그 땅 가운데 남으려 했던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런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노후가 불안해서 밤낮 재산을 불리는 데만 몰두합니다. 자식에게도, 이웃에게도 곁을 내주지 않고 오직 자기 곳간 채우는 일에만 골몰합니다. 성경은 이것을 단순한 부지런함이 아니라 죄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 마음의 밑바닥에 하나님 없이도 내 힘으로 안전을 만들어 내겠다는 태도가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여 스스로 서려는 것, 피조물이면서 창조주인 것처럼 살려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뱀이 하와에게 속삭인 말도 결국 이것이었습니다. "
너희도 하나님처럼 되리라." 죄란 대단히 극악무도한 범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내일을 염려하며 스스로 안전을 확보하려는 그 몸부림 자체가 이미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죄의 증거입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이 염려가 얼마나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가정을 생각해도 염려, 자녀의 미래를 생각해도 염려입니다. 교회를 향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
우리 교회가 잘 되어야 할 텐데.' 이런 염려는 얼핏 신앙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교회가 마치 나를 구원해 주는 것처럼, 그 성장과 부흥이 곧 나의 안전인 것처럼 착각하는 데서 나옵니다. 그리고 이런 염려를 가장 많이 짊어지는 사람이 다름 아닌 목회자라는 지적은, 뼈아프지만 정직한 자기 성찰입니다.

물론 이런 말을 하면 곧바로 반문이 돌아옵니다. "
그럼 예배도 안 드리고 헌금도 안 하면 교회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이 반문 자체가 이미 잘못된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마치 우리의 헌신과 노력이 교회의 존폐를 좌우하는 것처럼 여기는 태도 말입니다. 종은 마땅히 죽도록 충성해야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눅 17:10) 고백해야 합니다.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교회가 서고 무너진다고 여기는 순간, 우리는 이미 주님의 자리에 스스로를 앉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사야 27장이 그리는 참된 포도원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3절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포도원지기이신 하나님이 물을 주시고, 밤낮으로 지키시고, 누구든지 그 포도원을 상하게 하지 못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대적이 오면 불살라 버리기까지 하십니다. 이것은 마치 갓난아기를 품에 안고 밤새 잠들지 못하는 어머니의 모습과 같습니다. 아기가 조금만 뒤척여도 눈을 뜨고, 조금만 열이 나도 손을 얹어 보는 그 어머니처럼,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그렇게 지키고 계십니다.

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고 외친 것도,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말씀하신 것도 바로 이 진리를 가리킵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으면 애써 열매를 맺으려 힘쓰지 않아도 저절로 과실이 맺힙니다. 나무를 떠난 가지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시들어 갈 뿐입니다. 신앙생활의 본질은 내가 무엇을 이루어 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붙들고 계신 그분께 붙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포도원의 백성들이 아무 어려움도 겪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7~8절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치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방식이 다릅니다. 대적을 심판하실 때처럼 진노로 멸하시는 것이 아니라, "
적당히 견책"하십니다. 마치 부모가 자녀를 훈육할 때, 남의 자녀를 대하듯 매섭게 몰아붙이지 않고, 사랑이 담긴 한도 안에서 다스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 징계의 목적은 9절에 분명히 나타납니다. "
야곱의 불의가 속함을 얻고 그 죄를 없이함을 얻게 하려 하심"입니다.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간 것은 그들이 의지했던 우상, 곧 이방 나라의 힘과 종교가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뼈저리게 깨닫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손길이었습니다. 마치 큰 병을 앓고 난 후에야 비로소 건강의 소중함을 깨닫는 사람처럼, 이스라엘은 포로 생활이라는 아픈 훈련을 통해서 우상의 무력함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동시에 배우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결코 편안하게만 이 말씀을 읽을 수 없습니다. 에스겔 9장은 예루살렘의 가증한 일들에 대한 심판이 다름 아닌 성전에서, 늙은이와 장로들로부터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베드로전서 4장 17절도 동일하게 경고합니다. 심판이 하나님의 집에서 먼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서운 진실입니다. 교회에 다닌다는 사실, 직분을 맡고 있다는 사실이 결코 자동적인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참으로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지금 내 안에, 우리 교회 안에 정말로 흐르고 있는 것이 그리스도의 보혈입니까, 아니면 사람의 땀과 열심과 실력입니까?

사도행전 20장 28절이 말하듯 교회는 주님이 자기 피로 값 주고 사신 것이기에, 그 자리에 다른 무언가가 대신 흘러들어서는 안 됩니다. 목회자와 직분자의 사명은 결국 이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능력이나 성취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피만을 바라보고 의지하도록 이끄는 일입니다.

이 모든 심판과 훈련의 끝은 절망이 아닙니다. 12~13절은 그날에 유프라테스강에서부터 나일강에 이르기까지, 흩어졌던 자들을 마치 과실을 하나하나 떨어 모으듯 모으실 것이라 노래합니다. 앗수르 땅에서, 애굽 땅에서 쫓겨났던 자들이 돌아와 예루살렘 성산에서 여호와께 경배할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온 열방 가운데서 자기 백성을 하나하나 찾아 모으시는 하나님의 그림으로 다가옵니다.

돌아보면 우리 각 사람이 바로 그렇게 모아진 자들입니다. 한때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우상을 섬기며 살았습니다. 어떤 이는 재물을, 어떤 이는 자기 자신을, 어떤 이는 종교적 성취를 붙들고 그것이 자신을 지켜 줄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은혜로, 오직 은혜로 우리는 그 헛된 것들을 내려놓고 참된 포도원지기 되신 주님께로 옮겨졌습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에게 남은 일은 단 하나입니다. 날마다 말씀 앞에서 내가 지금 진짜로 무엇을 의지하며 살고 있는지 점검하는 것입니다. 여전히 나의 재산, 나의 실력, 나의 안식월조차 포기하지 못하는 손을 붙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만 있으면 저절로 열매를 맺듯이, 우리가 할 일은 애써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밤낮으로 우리를 지키시는 그 포도원지기의 손길 안에 가만히 머무르는 것, 그것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