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라 여호와의 이름이 원방에서부터 오되 그의 진노가 불 붙듯 하며 빽빽한 연기가 일어나듯 하며 그의 입술에는 분노가 찼으며 그의 혀는 맹렬한 불 같으며, 그의 호흡은 마치 창일하여 목에까지 미치는 하수 같은즉 그가 멸하는 키로 열방을 까부르며 여러 민족의 입에 미혹하는 재갈을 물리시리니, 너희가 거룩한 절기를 지키는 밤에 하듯이 노래할 것이며 피리를 불며 여호와의 산으로 가서 이스라엘의 반석에게로 나아가는 자 같이 마음에 즐거워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장엄한 목소리를 듣게 하시며 혁혁한 진노로 그의 팔의 치심을 보이시되 맹렬한 화염과 폭풍과 폭우와 우박으로 하시리니, 여호와의 목소리에 앗수르가 낙담할 것이며 주께서는 막대기로 치실 것이라."(이사야 30:27~31)
정비소 사장님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오래된 중고차는 함부로 열면 안 됩니다. 브레이크 패드 하나만 갈려고 열었다가, 결국 엔진까지 다 뜯어야 하는 경우가 태반이거든요." 낡은 집을 수리해 본 사람도 같은 말을 합니다. 벽지 하나 바꾸려고 뜯었더니 그 안의 배관이 다 썩어 있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를 고치려면 결국 전부를 다시 해야 하는 상황, 우리는 그것을 "손쓸 수 없는 상태"라고 부릅니다.
이사야가 바라본 이스라엘이 꼭 그랬습니다. 겉으로 조금 손보면 될 것 같지만, 사실은 뿌리부터 병들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낡은 옷에 생베 조각을 대고 깁는 식의 임시방편을 거부하셨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답은 수선이 아니라 귀환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는 심히 거역하던 자에게로 돌아오라"(사 31:6). 돌아오라는 말은 무서운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너는 지금, 완전히 잘못된 길 위에 서 있다는 선언입니다.
우리 시대는 "돌아가라"는 말을 싫어합니다. 대신 "더 나아가자"고 말합니다. 문제가 있어도 그것은 아직 충분히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여기고, 조금만 더 애쓰면, 조금만 더 기술이 좋아지면 나아질 것이라 믿습니다. 그러나 정직하게 돌아봅시다. 인류는 지난 수십 년간 눈부신 기술의 진보를 이루었지만, 사람의 마음은 더 평안해졌습니까? 오히려 문제는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손댈수록 더 엉키기만 합니다.
이것이 이사야 시대 유다의 착각과 정확히 겹칩니다. 앗수르라는 거대한 위협 앞에서 유다는 회개가 아니라 동맹을 택했습니다. 그들이 손을 내민 곳은 애굽이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군사 대국, 최첨단의 병거와 기마대를 가진 나라입니다. 유다 입장에서 이것은 지극히 합리적인 "발전적 해법"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패역이라 부르셨습니다.
여기서 짚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애굽을 의지한 것이 왜 그렇게까지 큰 죄였을까요? 애굽은 이스라엘에게 그냥 이웃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종살이하던 압제의 땅이자, 하나님이 어린양의 피로 건져내신 땅이었습니다. 출애굽 사건 자체가 이스라엘 정체성의 뿌리였습니다. "너희는 힘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구원받았다." 그런데 위기가 닥치자 유다는 바로 그 애굽으로, 그 힘의 논리로 되돌아가려 한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외교 정책의 실수가 아니라, 구원의 은혜를 배반하고 다시 종의 멍에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행위였습니다.
조선 말기, 한 나라가 위태로워지자 청나라에 기대고, 러시아에 기대고, 결국 일본의 문을 두드렸던 역사를 떠올려 봅니다. 저마다 그 순간에는 나라를 지키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라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의존의 끝에서 나라는 오히려 무너졌습니다. 힘을 빌리러 간 곳에서, 결국 삼켜지고 만 것입니다. 이사야 31장 3절의 선언은 그래서 더 서늘합니다.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아무리 강해 보여도 결국 사람이고 육체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들도 같은 노래를 부릅니다. 어떤 이는 "병거와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한다 하였고(시 20:7), 어떤 이는 많은 용사와 큰 힘이 결국 헛것이라 하였으며(시 33:16~17), 또 어떤 이는 방백들, 곧 사람은 도울 힘이 없는 존재라고 노래합니다(시 146:3~4). 말과 병거의 자리에 오늘 우리는 무엇을 채워 넣고 있습니까? 통장의 잔고, 인맥, 스펙, 자격증, 심지어 "이렇게 목회하면 성공한다"는 세상의 경영 이론까지, 위기 앞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손을 뻗는 곳이 어디인지, 그것이 곧 우리의 애굽입니다.
30장 후반부는 그 결과를 무섭게 그립니다. 여호와의 진노가 불붙듯 하며, 그 혀는 맹렬한 불 같고, 물이 차고 넘쳐 목에까지 미친다고 합니다. 그리고 앗수르를 심판하시기 위해 예비하신 곳이 '도벳'입니다. 도벳은 힌놈의 골짜기, 사람들이 자기 자녀를 몰렉 신에게 불살라 바치던 그 골짜기였습니다. 이 골짜기가 훗날 신약에서 '게헨나', 곧 지옥이라는 이름의 근거가 됩니다. 하나님을 대신할 힘을 찾아 헤매던 자리가, 결국 심판의 자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서운 이유는, 앗수르만이 아니라 앗수르를 피하려고 애굽에 기댄 유다까지도 함께 심판의 그늘 아래 놓인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잘못된 것을 피하려고 또 다른 잘못된 것에 기대는 순간, 우리는 이미 같은 심판권 안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야서는 절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37장에 이르러 실제로 일어난 사건 하나가 나옵니다. 앗수르의 산헤립 왕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협박 편지를 보냈을 때, 히스기야 왕은 그 편지를 들고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그가 한 일은 군대를 소집하는 것이 아니라, 편지를 하나님 앞에 펼쳐 놓고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그날 밤, 앗수르 진영에서 십팔만 오천 명이 사람의 칼이 아닌 칼에 쓰러졌습니다. 산헤립은 홀로 도망쳐 돌아갔다가 결국 자기 아들들의 손에 죽습니다. 히스기야가 한 일은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정확히는, 자기 힘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의 언약만을 붙든 것입니다.
역대하 20장의 여호사밧 왕도 마찬가지입니다. 거대한 연합군이 쳐들어왔을 때 그는 병력을 점검하는 대신 금식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합니다.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찌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대하 20:12). 이 고백 뒤에 여호사밧이 전쟁터에 내보낸 것은 정예 부대가 아니라 찬양대였습니다. 노래하는 자들이 맨 앞에 섰고, 적군은 스스로 자중지란을 일으켜 서로를 쳤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무모함이라 부를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을 '여호와의 전쟁'이라 부릅니다.
여기서 반드시 구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울도 금식을 선포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금식은 자기 공로를 드러내려는 금식이었고, 결국 백성들에게 피 채로 고기를 먹게 하는 죄를 낳았습니다. 같은 금식이라도, 방향이 다릅니다. "보라, 내가 이만큼 했다"는 금식이 있고, "주님, 우리에게는 오직 주님밖에 없습니다"라는 금식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행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겉모습이 같아도, 그 마음이 자기 힘의 증명인지 아니면 전적인 의탁인지에 따라 전혀 다른 것이 되고 맙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돌아오라"는 말씀은 무엇을 요구합니까? 그것은 막연한 반성이 아니라 구체적인 결별입니다. 31장 6~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까지 의지하던 은 우상과 금 우상을 스스로 버리라고 합니다. 돌아간다는 것은 지금까지 급할 때마다 달려가던 그 익숙한 곳으로 더 이상 달려가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인간관계가 무너질 때마다 SNS 속 인정으로 도망칩니다. 어떤 사람은 마음이 불안할 때마다 소비로 그 틈을 메웁니다. 어떤 목회자는 교회가 침체될 때마다 말씀과 기도의 골방보다 성공한 목회 사례집을 먼저 펼칩니다. 이 모든 것이 오늘의 애굽입니다. 그 자체로 악한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애굽도 그 자체로 악한 나라는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사야는 마지막으로 아름다운 그림 하나를 남깁니다. 주님께로 돌아오는 자를, 주님은 먹이를 지키는 사자처럼, 새끼를 감싸 보호하는 새처럼 지키신다고 하십니다(사 31:4~5). 이것은 우리가 그럴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무능하고 어린아이 같이 아무 힘도 없이 그저 주님만 바라보는 그 자리, 바로 그 무력함의 자리를 하나님은 가장 견고히 지키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 일하시는 그 주님 앞에서, 우리는 오늘 어떤 애굽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까? 돌아가는 길은 멀어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너무 오래, 너무 많은 것을 의지해 왔기에 그 길이 낯설게 느껴질 뿐입니다. 그러나 주의 성령이 오늘도 우리를 조명하시며 부르고 계십니다. "너희는 심히 거역하던 자에게로 돌아오라." 우리는 아무 힘도 능력도 없사오나, 그저 주님만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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