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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이사야

이사야 - 우리의 보배, 사라지지 않는 것을 향하여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8. 22.

이사야 33장 1~16절

"너 학대를 당하지 아니하고도 학대하며 속이고도 속임을 당하지 아니하는 자여 화 있을진저 네가 학대하기를 그치면 네가 학대를 당할 것이며 네가 속이기를 그치면 사람이 너를 속이리라.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우리가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시며 환난 때에 우리의 구원이 되소서. 요란한 소리로 말미암아 민족들이 도망하며 주께서 일어나심으로 말미암아 나라들이 흩어졌나이다. 황충의 떼 같이 사람이 너희의 노략물을 모을 것이며 메뚜기가 뛰어오름 같이 그들이 그 위로 뛰어오르리라. 여호와께서는 지극히 존귀하시니 그는 높은 곳에 거하심이요 정의와 공의를 시온에 충만하게 하심이라. 네 시대에 평안함이 있으며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할 것이니 여호와를 경외함이 네 보배니라."(이사야 33:1~6)


주전 701년, 예루살렘 성 안에는 침묵만이 흘렀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전 백성에게 함구령을 내렸습니다. 성벽 밖에는 앗수르의 대군이 진을 치고 있었고, 그들의 장수는 성벽을 향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
너희가 애굽을 의지하느냐? 그것은 오히려 손에 찔려 들어갈 뿐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정복한 나라마다 그 신들이 우리를 막지 못했는데, 너희의 여호와가 무엇이관데 예루살렘을 건지겠느냐?"

히스기야는 이미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습니다. 성전 문의 금박을 벗겨내고, 왕궁의 은을 긁어모아 앗수르 왕에게 조공으로 바쳤습니다. 그가 평생 모아온 보물, 나라의 모든 금과 은이 그렇게 사라졌습니다. 그런데도 앗수르 군대는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큰 소리로 조롱하며 성을 향해 몰려왔습니다. 이 장면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하나입니다. 금과 은으로도 막을 수 없는 순간이 온다면, 그때 우리를 지켜줄 보배는 무엇입니까?

이사야 33장 6절은 이렇게 답합니다. "
여호와를 경외함이 네 보배니라." 그런데 우리는 살면서 은근히 다른 것을 보배로 여기며 살아갑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처럼, 우리는 무언가 커다란 업적을 이루어내야 인생이 성공했다고 믿습니다. 이 가치관은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스며듭니다. 더 큰 교회를 세우고, 더 많은 사람을 전도하고, 더 눈에 띄는 사역의 성과를 남겨야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의 뿌리를 파고 들어가 보면, 결국 인간이 자신을 죄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데서 시작됩니다. 예수를 믿었으니 이제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해내야 한다고 여기는 순간, 우리는 이미 십자가의 의미를 잊은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내가 이미 죽은 자임을 인정하고 따르는 일입니다. 죽은 사람이 무슨 대단한 것을 만들어 내겠습니까? 죽은 자가 스스로 몸부림칠수록 오히려 냄새만 더 진동할 뿐입니다.

이사야 33장 10~14절은 하나님이 친히 일어나시는 장면을 그립니다. 여호와의 호흡이 불이 되어 경건치 않은 자를 사르실 때, 그제야 죄인들은 두려워 떨며 묻습니다. "
우리 중에 누가 이 영영히 타는 불과 함께 거하리요." 신명기 4장 24절은 하나님을 "소멸하는 불"이라 부릅니다. 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무엇을 내밀 수 있을까요?

미가 선지자는 이 질문에 냉정하게 답합니다. "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드리면 되겠느냐, 내 몸의 열매를 드리면 되겠느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고,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어느 아버지가 있습니다. 자녀가 거짓말을 하고 성적표를 위조해 왔는데, 그 사실을 아버지가 뻔히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녀가 재롱을 떨며 다가온다고 해서 아버지가 기뻐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아버지가 진짜 바라는 것은 자녀가 손해를 보더라도 정직하게 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물며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은 세상에서, 우리가 무엇을 이루어 낸다고 하나님이 그것으로 기뻐하실 리 없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업적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과 바른 관계 속에 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삶일까요? 이사야 33장 15절은 여섯 가지로 말합니다. 의롭게 행하는 자, 자기 이익이 아니라 옳음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정직히 말하는 자, 상황에 따라 말을 바꾸지 않는 사람입니다. 토색한 재물을 가증히 여기는 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익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입니다. 뇌물을 받지 않는 자, 좋은 자리, 좋은 기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피 흘리려는 꾀를 듣지 않는 자, 남의 희생 위에 내 안전을 세우지 않는 사람입니다. 악을 보고도 눈을 감지 않는 자, 불의를 외면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시편 15편과 24편도 같은 사람을 그립니다. 정직하게 행하고,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남을 헐뜯지 않고, 손해를 보더라도 약속을 지키는 사람. 이 말씀 앞에서 스스로 "
나는 흠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그래서 이 본문은 우리를 절망으로 몰아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다른 곳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 모든 하나님의 요구를 100% 이루신 분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 안에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질그릇은 별것 아닙니다. 깨어지기 쉽고, 볼품없고, 흠집투성이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 진짜 보배가 담겨 있다면, 그 그릇은 그 자체로 귀해지는 것이 아니라 담긴 것 때문에 귀해지는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성전의 금과 은을 다 벗겨 앗수르 왕에게 바쳤던 그 밤을 기억해 봅니다. 그 모든 보물이 사라진 뒤에도 성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성을 지킨 것은 왕궁에 남아 있던 금이 아니라, 함구령 속에서 성전에 들어가 무릎 꿇었던 히스기야의 기도, 곧 여호와를 경외하는 그 마음이었습니다. 그날 밤 앗수르 진영에서는 십팔만 오천 명이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금과 은으로는 안 되던 일이,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삶에도 언젠가 모든 것을 다 내어주어도 소용없는 순간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를 지키는 것은 우리가 쌓아온 업적도, 통장의 잔고도 아닙니다.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 그 보배 하나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부자보다 더 부요한 삶은, 바로 그 보배를 알고 붙들고 사는 데서 시작됩니다.